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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16화 (1,216/1,329)

2화

최종 결론을 내리기 위한 재단 이사회가 열렸다. 수시로 보완 자료를 요청한 신현수는 끝끝내 일언반구 언질조차 주지 않았다. 철저한 기밀을 유지해 손일석의 정보망, 민정호의 인맥은 물론 사방팔방 연락을 취한 김지훈의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째깍! 째깍!

연락 오기로 한 시간이 임박했다.

전문 병원 전체의 관심사였다.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였다.

“국가고시 발표 때보다 더 초조하네.”

“전화 올 때가 지나지 않았나?”

“이러다 미뤄졌다는 소리 듣는 거 아니야? 급하지 않은 일이 없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

김지훈이 다리를 달달 떨었다.

가장 초조한 사람일 것이다.

마침내 병원 전화가 울렸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김지훈이 몸을 내던지다시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를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선생님, 웬일이십니까?”

신현수에겐 보일 수 없는 반응이었다.

손일석이 눈짓으로 물었다.

‘누구야?’

‘송재덕 선생님.’

분위기 묘해졌다.

누구나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이자 선배였지만 지금 이 순간 경쟁자라는 사실 또한 분명했다.

위로의 말을 전하려는 걸까?

민정호마저 티가 날 정도로 긴 숨을 내쉬었다. 이런 경우 백이면 백 승자가 패자에게 위로 전화를 걸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송재덕 교수와의 관계와 인연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원장님, 아무래도 재단을 상징하는 병원인 서울 병원부터 개선할 모양입니다.”

“그러게. 신 이사장도 우리와 한 말이 있는데 직접 연락하기에는 갑갑하겠지.”

“그 점은 조금 이상하네요.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신 이사장님답지 않습니다.”

김지훈의 얼굴은 더 심각했다.

(김 부원장, 큰일이다. 큰일.)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들으셨습니까?”

(들었지. 내가 제일 먼저 들었지. 다들 노력 많이 했는데 착잡하다. 착잡해.)

가장 먼저 연락을 받았다면 분명 희소식이었을 것이다. 개원 초부터 줄곧 함께한 송재덕 교수로서는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었다.

‘최선을 다했으니까 됐어.’

막상 마음은 생각을 따라 주지 않았다.

묵묵히 자신을 응원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은 스승과 수많은 날을 함께하며 고생한 민정호와 동료들, 종합 병원 건립에 미래를 걸었던 직원들까지 모두 눈에 밟혔다.

이미 벌어진 현실이었다.

실망을 넘어 무기력한 기분까지 들었지만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신현수도 음으로 양으로 무척 노력했을 것이다.

김지훈이 어깨를 폈다.

‘나까지 힘들어하면 안 된다.’

“원장님, 축하드립니다. 어차피 모두 추진해야 할 사업인데 우리에게도 곧 기회가 오겠죠.”

일제히 탄식이 터졌다.

무거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퍼졌다.

누군가는 너무 심한 실망에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자리부터 정리했다. 서로의 눈길이 마주쳐도 위안이 되기는커녕 힘만 빠질 뿐이었다.

(종합 병원 건립을 바로 진행한다는 결정이 났는데 무슨 소리야? 설마 연락 못 받았니? 이 교수하고 신 교수 얼굴 보기 힘들어 큰일 났다. 큰일 났어. 김 부원장, 너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거지? 그치?)

“예? 그게 정말입니까?”

(어쨌든 고생했고, 수고했다. 정말 잘 준비해서 모두에게 내세울 수 있는 병원 만들어야 된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니? 어떻게? 뭐라고 해야 충격을 안 받을까?)

김지훈의 입가가 서서히 말렸다.

반어법에 완벽하게 당했다.

숨도 쉬기 힘들 만큼 기뻤다.

‘우리 제안이! 우리 제안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준영 교수, 김진호 교수, 민정호를 보는 눈에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훅 터진 숨길이 김지훈을 보는 모든 이들을 휘감았다.

“됐습니다.”

제자의 변화를 모를 스승이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의 목소리가 살짝 들떴다.

“됐다니, 뭐가 됐다는 소리야?”

“선생님, 종합 병원 건립으로 결정됐습니다. 곧바로 시행하겠답니다.”

후욱! 후욱!

생각지도 못한 반전에 일순 몸이 굳었던 손일석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마치 기폭제가 터진 것처럼 흥분과 기쁨이 밀물처럼 몰려 들어와 모두의 가슴을 꽉 채웠다.

“원장님, 부원장님, 축하합니다.”

“손 교수, 수고했어.”

서로가 서로에게 축하의 말을 던졌다.

“민 부원장님, 고생하셨습니다.”

짝짝짝짝!

사방에서 박수가 터졌다.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확인이라도 해 주듯 한 통의 전화가 또 왔다.

(김 부원장, 축하해. 자료 검토는 이것으로 충분하고, 재정 부분도 언제든 집행이 가능한 상황이야. 내일 바로 실무 작업에 들어갈 거야. 이번 주말에 민 부원장과 함께 서울 병원으로 와.)

“주말에?”

(상의할 일이 산더미야.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자. 다시 한번 축하한다. 고생했어.)

이로써 확실하게 확정됐다.

들뜬 분위기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늦은 저녁까지 병원에 남아 있던 직원들이 곳곳에서 소리를 질렀다. 손일석이 씨익 웃으며 휴대폰을 흔들었고, 민정호는 조용히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한동안 즐거운 대화를 이어 가며 웃음을 터트린 참석자 모두 고무된 가슴을 안고 하나둘 퇴근을 했다. 김지훈과 민정호는 축하 인사에 파묻혀 마지막까지 일어서지 못했다.

“정말 고생했습니다.”

“축하합니다.”

마음을 울리는 말이 귓가를 떠나질 않았다.

꽤 시간이 흘렀다.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어딘가를 응시하던 김지훈이 한참 지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민 부원장님, 고생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부원장님이 제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웃어요. 이럴 때는 마음껏 기뻐해도 됩니다. 신 이사장이 주말에 보자고 하니까 시간 비워 두세요.”

“실무 작업 때문이겠군요. 알겠습니다. 미리 철저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술 한잔할까요?”

“아닙니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습니다.”

사실 김지훈도 마찬가지였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끝에 간절히 원하던 일이 이뤄지면 떠들썩한 자리보다 조용한 자리를 찾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함께 병원을 나섰다.

인사 대신 눈길만 주고받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뜨거운 기운이 흘렀다.

신뢰이자 고마움이었다.

한동안 사라지지 않을 즐거움이 분명했다.

고경아가 소식을 듣자마자 방방 뛰었다.

“지훈 씨! 축하해요.”

“경아 씨도 축하해요.”

치맥이다!

김지훈은 단번에 잔을 비웠고, 술과 담을 쌓고 살던 고경아까지 시원하게 한 모금 마셨다. 웃음이 끊이질 않자 닭다리를 든 희연이까지 덩달아 방방 뛰었다.

아랫집에서 눈살 찌푸릴 것이다.

급히 희연이를 안은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행복했다.

정말 감격스러운 일이 벌어진 하루였다.

카르페 디엠!

***

종합 병원 건립이 확정됐다는 소식이 가져온 여파가 대단했다. 개원 초부터 함께 고생하며 전문 병원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기에 모두들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전문 병원과 종합 병원은 위상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직장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질뿐더러 같은 직급이라도 더 큰 권한을 갖게 되고, 그만큼 대우도 좋아진다.

물론 일이 훨씬 더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인원 충원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김지훈이 중심을 잡고 있는 한 사람을 갈아 넣어 수익을 내는 고질적인 병폐 역시 상당 부분 사라질 것이라 믿었다.

애석하게도 의사는 다소 예외였다.

김지훈으로서는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었다.

‘공헌도가 커 연봉이 높은 건데, 그 때문에 충원이 어려운 게 정상적인 일은 아니지. 이놈의 수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모든 환자가 절실하게 원하는 수준 높은 진료는 기계나 장비보다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지만 개개인의 노력이나 병원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기에 고민만 깊어졌다.

어쨌든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 바쁜 나날이었다.

‘나 혼자 한 일이 아닌데…….’

어느새 금요일 오후에 접어들었다.

김지훈이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침부터 연이어 수술을 했다.

점심 식사를 건너뛰는 일이 드문 것도 아닌데 유난히 배가 고팠다. 저혈당이라도 발생한 것처럼 어질어질하면서 힘이 하나도 없었다.

허기진 배와 분명 달랐다.

‘이건 빵으로 해결할 상태가 아니다.’

“이혁원 선생, 배 안 고파?”

“배고프십니까? 빵하고 계란이라도 가져올까요?”

“아니. 밥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이 시간에도 구내식당에서 밥을 줄까?”

이혁원이 찬찬히 김지훈의 안색을 살폈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으신데 어디 아프신가? 얼굴색은 괜찮아 보이고, 힘만 없어 보이기도 하네.’

사실 종종 겪는 일이었다.

시간이 안 맞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물 한 모금으로 버티면 몸에 무리가 오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요일을 가리지 않고 밀려 있는 수술은 하나같이 극심한 체력 소모를 요구했다.

최고의 치료는 역시 밥이었다.

가끔 부탁해 때늦은 식사를 하곤 했었다.

“알아보겠습니다.”

재빨리 구내식당에 연락한 이혁원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루 세끼 식사에 야식까지 준비해야 하는 업무상 아무 때나 끼니를 제공하기 어려워 평소에는 몇 번씩 부탁을 해야 들어주던 직원이 단박에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부원장님이 드신다고요? 아이고! 지금까지 식사도 못하시고 힘드시겠네요. 바로 준비할 테니까 빨리 모시고 오세요.)

“선생님, 바로 오시랍니다.”

“그래? 식사 시간도 아닌데 미안하네.”

곧바로 구내식당으로 달려가 텅 빈 배를 채웠다. 연신 허리를 숙이며 미안하다는 김지훈의 말에 직원 모두 언제든 오시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혁원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 사람은 파워가 있어야 해. 부럽다.’

덕분에 잘 먹긴 했다.

김지훈의 상태도 좋아 보였다. 하지만 평소 가장 젊은 고경철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한 체력을 자랑하던 선배였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일이기에 걱정이 앞서 피검사라도 해야 안심이 될 상황이었다.

경험상 의사가 본인 입으로 아프다는 말을 할 정도면 누가 보아도 심각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바쁜 의사일수록 자신의 몸을 챙기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억지로 등 떠밀어 응급실로 향했다.

“당이 떨어져서 그런 건데 왜 이래?”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확인 차원이라고 생각하시고 검사받으세요.”

상황을 들은 간호사들이 난리를 쳤다.

마치 가족이 아파 온 것처럼 신경을 쓰며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김지훈도 내심 걱정이 되는지 순순히 팔을 내밀어 검사를 받았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은근히 불안했다.

어떤 검사를 했는지 빤히 알면서도 검사 결과를 가져오는 간호사와 신중하게 확인하는 이혁원을 보는 것조차 초조함을 불러일으켰다.

‘환자 심정이 이렇구나.’

다행히 모든 항목이 깨끗했다.

김지훈은 별다른 반응이 없는데 이혁원부터 간호사들까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김지훈이 공연한 타박을 했다.

“거봐. 순간적으로 저혈당이 온 거라니까.”

“왜 왔을까? 혹시 아침에 식사 안 하셨어요?”

“밥? 어제저녁 입맛이 없어서 밥 대신 라면 먹은 게 다네. 어쩐지 아침부터 배가 많이 고프더라.”

이혁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일도 많은데 라면으로 때우니 몸이 버티겠습니까? 이러다 쓰러지십니다. 형수님, 아니 고 과장님이 뭐라고 안 그러세요? 안 되겠네. 당장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기를 잡자 김지훈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이준영 교수와 더불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실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혁원아! 왜 그래? 말하지 마. 가뜩이나 라면으로 저녁 때운다고 혼났는데 나 또 혼난다. 참아! 네가 이러면 안 되지.”

“그걸 아시는 분이 다른 것도 아니고 밥 부실하게 먹어서 생기는 저혈당에 빠지십니까? 깜짝 놀랐잖아요.”

핀잔에 타박에 욕만 안 먹었다.

부원장이 펠로우에게 쩔쩔매다니 체면도 말이 아니었다. 은근슬쩍 귀를 기울이던 간호사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뻘게졌다.

재빨리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김지훈이 부리나케 가운을 입었다.

그때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상황을 가리지 않는 일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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