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월요일 아침.
김지훈의 얼굴이 유달리 좋았다.
“상쾌한 아침! 주말 동안 환자 많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 적당히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왔습니다. 부원장님, 좋은 일 있으세요? 오늘따라 유난히 힘이 넘치시네요.”
“있고말고요.”
응급실부터 시작해 회진을 도는 내내 활기차게 움직였다. 일요일 내내 휴식을 취한 덕분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전신을 짓눌렀던 행정 업무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살 만하네. 새 마음 새 뜻으로 시작해 볼까!’
수술 방에 들어선 김지훈이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부지런히 수술을 준비하는 이혁원, 나종진, 오만석을 비롯해 송진우, 모찬우, 한수영까지 그렇게 믿음직할 수 없었다.
‘너희 셋은 내년에 교수도 임용될 테고, 종합 병원 건립이 확정되면 남은 펠로우들도 상당수 교수가 될 수 있을 거야. 진우야, 지금처럼만 하면 돼.’
후배들의 앞날을 보장할 수 있다는 생각에 없던 힘까지 생겼다. 열 시간에 걸친 간 이식 수술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김지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언제 알려 주는 것이 좋을까?’
급히 이준영 교수와 사인방을 찾았다. 이젠 진충기 교수도 전문 병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커져 함께 논의하는 것이 당연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상황이 변했다고 해이해질 후배들이 아니었다. 미리 교수 임용을 알린다면 오히려 보다 안정적인 상태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외과 전체가 모였다.
김지훈이 신현수와 합의한 사실을 알렸다.
“우리 과를 비롯해 내년에 근무 기한이 끝나는 예정된 펠로우 선생 모두 정식으로 교수 임용이 될 겁니다. 단, 기존 교수진의 추천을 받아야 하니까 절대 긴장 늦추지 말기를 바랍니다.”
당사자만이 아니라 선후배 할 것 없이 소리 없는 환호성을 터트렸다. 이혁원을 바라보는 이준영 교수의 눈길이 유난히 편안하게 보였다.
‘스승님, 이젠 한시름 놓으셔도 됩니다. 아들하고 며느리까지 다 교수가 되면 정말 교수 집안이네요.’
바라 마지않았던 기쁜 소식 전했으니 무척 힘든 일거리 하나 던질 때가 됐다. 손일석, 진충기 교수와도 이미 얘기가 오간 터였다.
“간 이식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해야 한다는 사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이혁원 선생은 나와 함께, 오만석 선생은 이준영 선생님, 진충기 선생님과 함께 삼 개월 내에 논문을 작성해야 하고, 나종진 선생은 손일석 선생님, 이경석 선생님과 함께 간 이식 분야에서 응용 가능한 라파로에 대해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경석이 짐을 하나 더 얹었다.
“일반적인 내용의 논문은 안 됩니다. 이왕이면 국제 학술지에 게재할 수 있는 수준의 논문을 써야 합니다. 교수 임명의 중요한 척도로 삼을 생각이니까 펠로우 선생들은 확실하게 준비해 주세요. 나종진 선생, 기존 라파로 논문과는 별도라는 사실 잊지 마세요.”
“헉!”
주거니 받거니 김지훈이 다시 받았다.
“다른 과 역시 마찬가지 기준을 적용합니다. 불만 갖지 마시고 열심히 작성하시길 바랍니다. 서도훈 선생과 강병옥 선생도 준비하세요. 교수 고과 점수에 무척 큰 비중으로 반영될 겁니다.”
여기저기에서 입이 쩍쩍 벌어졌다.
평생 신분이 보장되는 정교수라 해도 논문 작성 등이 의무화된 상황이지만 국제 학술지에 게재할 수 있는 수준이라니 이만저만 부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못했다.
부원장이자 학회장이자 정교수의 위엄이었다. 더군다나 후배들에게 논문 맡긴 후 자기 이름을 공짜로 올리는 선배들이 아니기에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이혁원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바라고 바라던 교수 임용이 거의 확정됐다. 아직 일 년이 더 남았지만 강은미까지 대상이 된 이상 마냥 기뻐할 일이 분명한데 환하게 웃지 못했다.
‘국제 학술지에 실릴 수준의 논문을 쓰라고? 그것도 문제지만 교수 임용보다 김지훈 선생님을 통과하는 게 더 어려울 텐데 죽었다. 간 이식 파트 전체가 논문 작성에 들어가는 이상 도와달라고 할 사람도 없고, 어떻게 하지?’
절로 펠로우들에게 눈길이 갔다.
사인방과 진충기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나종진과 오만석은 기쁨과 압박감 속에 표정 관리가 안 됐고, 송진우는 그저 부러워할 뿐이었다.
‘난 백 개도 쓸 수 있는데.’
그런 표정이었다.
교수 임용 확정에도 불구하고 어마무시한 수준의 논문 작성이 주는 부담을 떨쳐 버리지 못한 채 송진우과 함께 회의실을 나가던 이혁원이 나직한 목소리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혁원 선생!”
“예, 선생님.”
“나 시간 많지 않다. 교수 임용이 100퍼센트 확정된 거 아니니까 들뜨지 말고 논문 주제부터 빨리 잡아. 송진우 선생? 잠깐 보자.”
김지훈이 심각했다.
“다소 빠른 말일 수도 있는데, 설마 너희 둘 모두 소아 외과 할 생각은 아니지?”
“소아 외과요? 관심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혁원 선생은?”
강은미 때문인지 바로 입을 열지 못했지만 이내 자신의 생각을 확고하게 밝혔다.
“간 이식 파트에 남고 싶습니다.”
“다행이다. 둘 다 간 이식 파트에 남을 거면 지금부터 소아 외과를 맡을 선생을 키워야 하니까 송진우 선생도 빨리 정해.”
“저도 교수로 임용이…….”
“일 년 후의 일을 누가 알겠어? 하지만 송진우 선생이 지금처럼 노력하는 한 책임을 회피하진 않아. 종합 병원 건립이 무산되더라도 소아 외과가 필요하고.”
송진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알겠습니다. 빨리 결정하겠습니다.”
“말 꺼내자마자 간 이식 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고민해 본다고? 에이! 마음에 안 들어. 이 고생을 누가 알아줄까? 소아 외과 할 거면 너도 논문 하나 빨리 써. 아주 빡빡하게 볼 거야.”
쓰윽 송진우를 째려본 김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라졌다. 말과 달리 돌아선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유유자적 발걸음에 여유가 넘쳤다.
송진우의 얼굴이 난로로 변했다.
“이혁원 선생님, 설마 화나신 건 아니겠죠?”
“화나셨으면 넌 복받은 거지. 소아 외과는 필요한데 널 놓치기 싫으니까 저러시는 거 아니겠어? 근데 정말 세부 전공 바꿀 거야?”
“전공의 때부터 하고 싶은 분야였지만 잊고 살았는데, 선생님과 함께 수술하며 마음이 조금씩 바뀌네요. 둘 다 할 수 있는 방법은 없겠죠?”
“있지, 왜 없겠어?”
“정말요?”
“김지훈 선생님보다 체력을 두 배쯤 키우고, 열정은 세 배쯤 가지면 되지 않겠어? 물론 잘 생각은 말아야지. 평생. 알지? 평생~”
송진우가 피식 웃었다.
‘지금도 쫓아가기 바쁜데.’
그 시간 이후 펠로우들의 분위기가 변했다.
삼 년 차 선배들의 교수 임용 소식에 강한 희망을 품었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잊지 않았다. 미리 실적을 쌓기 위해 제각기 논문을 받은 선배들과 접촉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자신의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후배 사인방에게도 강력한 자극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일을 찾아 하는 것만큼 강력한 발전의 계기는 없는 법이었다.
선순환이었다.
김지훈도 고민에 빠졌다.
종합 병원을 건립하게 되면 모든 과를 갖춰야 한다. 다른 과 교수 임용 문제나 직원 선발은 재단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만 외과 진용만큼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를 바랐다.
‘현수와 합의가 돼야 하겠지만 교수 선발이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도 아닌데 지금부터 슬슬 고민해야겠지? 세부 전공 분야를 모두 개설하면 좋겠지만 자격이 안 되는 사람까지 뽑을 수는 없어.’
한 명, 두 명 머릿속을 스쳤다.
간 이식, 위장관, 대장, 간담췌, 소아, 혈관, 유방 및 갑상선 등등 주요 분야만 해도 상당한 인원이 필요했다. 그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다니 생각만으로도 뿌듯한 일이었다.
같은 인재를 두고 자연스럽게 다른 병원과 경쟁해야 할 것이다. 송재덕 교수를 비롯한 서울 병원 외과는 물론 천안 병원과 인재 쟁탈전을 벌여야 한다니 부담스러우면서도 짜릿했다.
‘생각만으로도 빡빡하네.’
준비해야 할 과는 외과만이 아니었다.
행여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이 될지 몰랐지만 종합 병원 건립은 언젠가 반드시 시행될 사업이었다. 전문 병원을 떠나지 않는 한 곧 직면하게 될 일이었다.
“경아 씨, 종합 병원 건립에 대비해 간호 부장님과 미리미리 상의해 두세요. 필요한 인원이 굉장히 많잖아요.”
“우리가 주도하나요?”
“우리 병원 직원들이 모두 종합 병원 소속이 되는데 전부는 아니더라도 의견을 적극 수렴하지 않겠어요?”
“일이 점점 많아지네요. 그래도 기분 좋다!”
고경아가 밝게 웃었다.
희망, 발전, 참 좋은 말이었다.
***
일상은 여전히 치열했다.
한 치 앞도 못 본다더니 행정적인 일을 덜었다고 좋아하던 김지훈이 혀를 빼물었다. 논문 선정과 지도에 창립 학회 준비로도 벅찬데 종합 병원 건립 제안이 또다시 발목을 잡았다.
덕분에 민정호 얼굴을 원 없이 봤다.
“또 보완 요구가 왔다고요?”
“일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이사회의 관심이 높다는 것은 곧 채택 확률이 높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이러다 무산되면요?”
“다시 독립채산제를 얻어 내거나 수익 이상의 지원을 끌어내 우리 병원을 종합 병원 못지않게 키워야죠.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제 체질이 아닙니다.”
“그럴 돈이 있어요?”
“적절하게 대출받고, 부원장님이 조금만 더 노력해 주시면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빚을 진다고요?”
“사업적인 측면에서는 부채도 자산입니다. 하여튼 그런 문제는 진 과장님과 제게 맡기시고, 부원장님은 지금처럼 월말 실적 회의가 안 열리도록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실적 회의!
은근한 협박성 발언에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다행히 최근 서면으로 대체했지만 얼굴 보며 돈 얘기 하는 것만큼 적응하기 힘든 일도 없었다.
‘얼마 벌었네. 얼마 썼네. 면전에서 이런 소리 안 듣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생각하기도 싫었다.
김지훈이 바로 말을 돌렸다.
“혹시 언제쯤 결정 나는지 들은 소리 있었어요? 서울 병원 고위직이나 재단 업무를 보는 직원들은 대충 감 잡지 않았을까요?”
“부원장님이 모르시는데 누가 알겠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은 이사장님을 만나 볼 생각입니다. 독립채산제를 사람과 맞바꾸었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을 자주 상기시켜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압력 팍팍 넣으세요.”
“부원장님도 적절하게 전화 한 통씩 하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저보다는 훨씬 강하게 압박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현수가 만만한 놈이 아니라서…….”
“부작용도 많지만 인맥이라는 것이 참 무섭습니다. 사석에서라도 욕하며 이름을 부르실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 송재덕 원장님과는 상황이 다르기도 하고요.”
“송재덕 선생님과는 다르다고요?”
“스승과 제자, 친구와 친구 중에 어느 쪽이 더 말하기 쉽겠습니까? 이사장님이 아무리 냉철해도 무시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김지훈이 서류에 눈을 박았다.
혼자만의 바람이 아니었다.
수많은 직원과 후배들의 거취가 달려 있는 만큼 결정이 날 때까지 사활을 걸어야 했다. 부정한 방식이 아니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싶을 정도였다.
민정호와 늦은 시간까지 머리를 맞댔다.
보완 요구에 완벽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탓에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의 퇴근도 툭하면 미뤄졌다.
“김 부원장, 순서를 바꾸면 안 될까? 학회 일을 먼저 상의하고, 병원 일을 그다음에 하면 적어도 두 명은 멀쩡하게 살 수 있잖아.”
“안 돼.”
“왜?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왜 안 돼?”
“혼자 죽을 수는 없어. 일석아, 우리 같이 죽자. 진충기 선생님, 일심동체란 말 잊지 마십시오.”
김지훈이 물귀신으로 변했다.
진충기 교수가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죠. 겸사겸사 오만석 선생과 논문 작성해 가면서 친분도 쌓고 괜찮습니다.”
“헉! 논문! 혁원이 이 자식은 왜 말이 없지? 아! 어제 밤늦게까지 상의했구나.”
손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표정이 묘했다.
‘어떻게 넌 해가 갈수록 일이 더 늘어나니? 나보다 훨씬 바쁘게 사는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정말 죽겠다. 처형이 부처네. 부처. 어쨌든 고맙고 미안하다.’
세간이 생각하는 명예를 중시한다면 모르지만, 지금 진행되는 모든 일이 다 이뤄진다고 해도 김지훈 입장에서 대단한 대가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얻는 것 중 개인적인 이득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달콤한 과실을 얻는다면 모두가 똑같이 누릴 혜택이었다.
희생일 수 있었다.
덕분에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었다.
절대 놓을 수 없는 대가를 향한 꿈에 한 발 한 발 올라갈 수 있는 든든함이기도 했다. 대신할 수 없는 일이기에 미안할 따름이었다.
“참! 신 이사장하고 연락은 돼?”
“맨날 바쁘다는데 연락이 되면 뭐 해?”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끝까지 전화해서 무언의 압력 팍팍 넣어야지. 내 말 무시하고 편하게 자기는 힘들 거야.”
그렇게 바쁜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