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14화 (1,214/1,329)

20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송재덕 교수가 중얼거렸다.

“우리도 이깟 서류 쪼가리가 아니라 저런 비전을 제시했어야 했는데 한 방 먹었다. 먹었어. 허어! 부원장답다. 부원장다워. 학회장은 될 이유도 없었다. 없었어.”

김지훈을 이경석만큼이나 아끼는 스승이자 선배의 마음만은 아니었다.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는 김지훈의 성장에 놀랄 뿐이었다.

민정호도 다르지 않았다.

‘확실한 계획하에 실행해 가는 능력은 누구 못지않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능력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저런 설득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이 병원임을, 모든 일의 핵심은 환자임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주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기에 자칫 이기적이고 자신만이 옳다고 들릴 수 있는 말이 뜨거운 감흥으로 다가올 것이다.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네가 내 친구이자 라이벌이라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럽다. 신임 이사님들도 어떤 제안이 환자를 위한 길인지를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될 거야. 고맙다. 나 역시 원하는 일이었지만 도와주지 못해 미안했다.’

분위기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각 병원 원장단들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보다 강한 연대의 끈을 만드는 것도 회의를 연 중요한 목적이었다. 자칫 쌓일 수 있는 앙금까지 방지해야 했다.

“이상으로 논의를 마치겠습니다. 제출하신 자료와 오늘 발표를 토대로 빠른 시일 내에 최종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어떤 제안이 채택되든 남은 제안 역시 실행될 것임을 분명하게 약속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구내식당에서 식사 자리가 이어졌다.

자체적으로 마련한 뷔페였다.

송재덕 교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신 이사장, 경비를 너무 아끼는 거 아니야? 근데 맛있다. 맛있어. 술도 넉넉하게 준비해서 더 좋다. 좋아. 신 이사장, 김 부원장, 한잔하자. 한잔.”

“감사합니다. 원장님, 맛부터 가짓수까지 이 정도면 호텔 뷔페 못지않은데요.”

“그런가? 어? 김 부원장, 너하고는 결론 날 때까지 말 섞으면 안 되는데 실수했다. 실수했어. 학회장한테 준 거로 치자. 그럼 되겠지? 그치?”

많은 이들이 김지훈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각자 자신의 제안이 채택되기를 바라지만 어떤 결론이 나도 납득할 수 있다는 의사까지 전했다.

상대를 반드시 쓰러트려야 이득을 얻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개인의 이득보다 병원 발전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감사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확장이나 이전이 결정된다면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분위기가 달아오르며 화제가 바뀌었다.

“김 부원장, 그 나이에 학회장까지 되다니 욕심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선배들 자리도 좀 남겨 줘. 우리도 설 공간이 있어야지.”

“전공의 때부터 유명했잖아요. 부원장에 학회장이라니, 이젠 함부로 얘기하지도 못하겠네. 송 원장님, 신 교수부터 김 부원장까지 외과는 무슨 복이 이렇게 많아요?”

“우리가 한 게 뭐 있나? 자기들도 쟁쟁한 제자들 많으면서 엄살은! 근데 경석이하고 일석이는 왜 빼? 왜? 날개만 달면 더 멀리, 더 높게 날 인재들인 거 몰라?”

“둘로는 성이 안 차시는 모양입니다.”

“허허허! 둘보단 넷이지. 넷. 아암! 그렇고말고.”

기분 좋은 하루였다.

치열했던 회의는 다 잊고, 간만에 교수들과 즐거운 자리를 가졌다. 학회장 당선을 축하한다며 잔을 많이 받았지만 눈치껏 적당히 먹었다.

민정호도 상당히 바빴다.

서울 병원과 천안 병원의 행정직들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았다. 언제 어디서나 능력 있는 사람들과의 인연을 중시하는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다 좋은데 저놈의 무표정한 얼굴은 언제 고치나! 사람 꼬이는 거 보면 신기해.’

한편으로 자리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김지훈을 대하는 선배들의 태도도 달라졌지만 김진호 교수를 보고 확실하게 느꼈다. 연배 차이가 제법 나는데도 불구하고 모두들 원장으로 대우했다. 청년에서 중년, 장년이 되며 적응해야 하는 일임이 분명했다. 물론 자격이 되는 사람에 한해서 말이다.

‘금경태나 진상건 같으면 어림도 없는 소리지. 껍데기보다 내용에 충실하며 살자.’

자리가 끝날 무렵 신현수가 슬쩍 말을 던졌다.

“술 많이 마셨어?”

“입에다 댄 정도야. 왜?”

“식사 끝난 후 김진호 원장님, 민 부원장하고 따로 자리 갖자. 할 말이 있어.”

김지훈이 반색했다.

설마 벌써 마음의 결정을 내린 걸까?

그럴 리 없었다.

다만 개인적인 자리라면 둘만 보자고 했을 테니 전문 병원 일임이 분명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참에 할 말을 해야 했다.

넷만의 자리를 가졌다.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김지훈이 냉큼 찬물 한 잔 마셨다.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구나.’

“다들 술기운은 문제없겠죠?”

“걱정하지 말고 말씀하세요.”

“먼저 오늘 논의에 대비해 정말 잘 준비해 줘서 고맙습니다. 따로 만나자고 한 이유는 독립채산제 때문입니다. 진상건 때문에 발생한 상황인데 계속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민정호가 곧바로 반응했다.

“재단 이사장님으로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군요. 종합 병원 건립안이 통과된다면 모를까, 현 시점에서는 독립채산제를 유지해야 합니다. 물론 재단의 투자가 우리 병원의 수익을 상회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겠죠.”

“김 부원장이 회의석상에서 한 말과 완전히 다르네요. 전문 병원만이 재단 산하 병원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발전을 꾀하기 위해서는 재정 통합이 절실합니다.”

“알고 있습니다만,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의 규모를 이룬 서울 병원이나 천안 병원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앞으로 수년간 종합 병원 건립과 관계없이 투자가 지속돼야 하는데, 만일 전입금보다 전출금이 많아지게 되면 치명적인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

신현수가 콧등을 찡그렸다.

단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전문 병원의 제안을 지지하지만 독단의 폐해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겪었다. 이사회의 결론에 따라 자금 집행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확장이나 이전이 결정된다면 당연히 전문 병원의 수익이 다른 병원으로 흘러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재정 운용을 이원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맙게도 전문 병원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네. 민 부원장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발이겠지.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정상화돼야 할 때다.’

이사장으로서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면 되지만 가급적 잡음 없이 처리하고 싶은 신현수였다.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민정호가 목숨처럼 여기는 계약도 마음에 걸리는 참이라 어떻게든 합의를 구해야 했다.

내심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의사들 중에는 고지식한 사람이 많았다.

김진호 교수도 당연히 그런 면이 있었다.

‘지훈이는 원칙에 목을 매니까 김진호 선생님만 동의하면 민 부원장도 물러서겠지.’

“원장님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민 부원장 말에 힘을 실어야 하지만 애초 비정상적인 상황이었고, 이제 신 교수가 이사장이 된 이상 재정 통합이 당연…….”

신현수가 원하는 말이 나오려는 순간 김지훈이 갑자기 김진호 교수의 손을 꽉 잡았다.

“원장님, 잠깐만요.”

동의하지 않는다는 행동이었다.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김 부원장, 원장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거야? 지금은 전문 병원을 만들어야 했을 때와 상황이 완전히 다르잖아. 재단 자체가 바뀌었어.”

“일단 정리 좀 해 봅시다.”

김지훈이 주절주절 신현수와 민정호가 한 말을 반복했다. 진지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신현수가 다시 안경을 고쳐 썼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후우! 이제 정리가 됐네.”

다들 귀를 쫑긋 열었다.

“먼저 확인할 게 있습니다. 신 이사장님, 민 부원장 걱정에 일리가 있다는 점 동의하시죠.”

“솔직히 인정해.”

“민 부원장님, 신 이사장님 말씀이 원칙에 맞는다는 점 인정하죠. 독립채산제가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는 건 애초 우리 모두 알고 있었던 사실 아닙니까?”

민정호의 눈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상황을 보며 이리저리 잴 김지훈이 아니었고, 전문 병원에 갖는 강한 애착을 생각할 때 어중간한 입장을 취할 리도 없었다.

‘뭔가 있다. 내줄 건 내주고 다른 걸 얻겠다는 생각을 하시는 걸까? 예전이었으면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요즘 김지훈 선생님을 보면 무리가 아니다. 그래도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겠지.’

“동의합니다만, 일방적인 손해가 발생한다면 제 계약 조건에 위배될 소지가 다분합니다. 우리 병원이 부실해진다면 재단에도 좋을 일이 없고요.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제시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민 부원장답네요. 신 이사장님, 민 부원장을 절대 놓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실 테니 우리와 거래 하나 하시죠.”

“거래?”

신현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독립채산제는 결국 돈과 관련된 일이었다. 최근 들어 행정에 깊숙이 관여한다지만 김지훈이 거론할 만한 돈 문제로 무엇이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물론 원장님과 민 부원장이 동의해야 하지만, 내년 교수 임용 및 펠로우 선발 때 우리 안을 확실하게 관철시켜 달라는 것이 내가 응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교수와 펠로우 임용?”

“이혁원, 나종진, 오만석부터 소아과 강은미 선생에 내과 티오까지 제법 많습니다. 능력은 우리가 보증할 테니 모두 보장해 주세요.”

순간 민정호의 표정이 확실하게 변했다.

“부원장님! 어차피 몇몇 분은 교수 임용이 될 텐데 거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재단은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한 사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만일 재정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김지훈이 눈에 힘을 주었다.

“민 부원장님, 몇몇이 아니라 우리가 추천한 선생 모두입니다. 결코 손해가 아니에요. 우리가 번듯한 건물 몇 개 짓자고 종합 병원 건립을 제안했나요?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돈과 공간이 아니라 환자를 치료할 사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인재를 확보하면 오지 말라고 해도 환자가 올 테고, 결국 돈은 절로 따라오게 될 겁니다.”

민정호가 입을 열지 못했다.

“돈과 사람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난 무조건 사람부터 택할 겁니다. 민 부원장님과 함께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리 지금도 잘 먹고 잘살잖아요. 신 이사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논의가 필요하다면?”

“시끄러워지겠죠.”

협박 아닌 협박이었다.

김진호 교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가 부원장을 정말 잘 뽑았네. 독립채산제를 포기하고 교수와 펠로우 확보하자는 안에 찬성해. 마취과도 있다는 걸 잊지 마. 민 부원장, 뭐 해?”

“후우! 동의합니다.”

김지훈이 짝짝 손뼉을 쳤다.

“신 이사장님!”

신현수가 웃고 말았다.

인력이 대거 충원된다고 해도 김지훈이 얻을 개인적인 이득은 거의 없었다. 전문 병원을 크게 키우겠다는 말이었고, 결국 재단이 원하는 방향이었다.

‘자식! 내 체면을 살려 주면서 전문 병원의 실리를 얻겠다, 이 말이지? 고맙다. 이렇게만 가자.’

“오케이! 책임지고 전문 병원이 요구하는 교수 및 펠로우 전원을 임용시킬게.”

“말로는 안 되죠. 민 부원장님!”

민정호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지 두 장을 꺼냈다. 빠르게 몇 글자 적어 내려가자 완벽한 계약서가 완성됐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호흡이 딱딱 맞았다.

“확인해 보시죠. 다른 병원 제안이 채택될 경우 우리 병원에서 출연할 자금의 비율도 문서화시켰으면 합니다. 이익의 30퍼센트를 제시합니다.”

“80퍼센트.”

민정호가 고개를 저었다.

70과 35로 내려가다 결국 60 대 40으로 결정됐다. 양측 모두 만족할 수준이 아니었지만 민정호의 완강한 저항에 신현수도 손을 들고 말았다.

“이사장님과 원장님 두 분 사인하시죠. 약속을 어겼을 경우 물어야 할 페널티는 따로 적지 않았습니다만, 법적 효력이 있다는 사실 잊지 마십시오.”

“이런 일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할 줄 몰랐지만 서명하죠. 내 명예를 걸고 이행하겠습니다.”

김지훈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신 이사장님, 감사합니다.”

“언제까지 존댓말할 거야?”

“흠흠! 방금 전까지. 현수야, 고맙다.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축하주 한잔할까? 민 부원장님, 돈 문제는 그때 가서 생각합시다.”

민정호가 계약서를 보며 입술을 모았다.

어느 쪽이 이득일까?

‘결과적으로 그런 문제가 아니었네. 어떤 일이든 사람이 우선이라는 말 정말 고맙습니다.’

신현수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괜찮은 집 있으니까 그리 갑시다.”

“이사장님 업무 추진비나 사비로 내시는 거겠죠? 대리비까지 내고 나면 출장비가 하나도 안 남습니다.”

“민 부원장님, 설마 돈 내라고 하겠습니까?”

“이왕이면 확실하게 해야죠.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김지훈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어차피 줘야 할 거 주었을 뿐이고, 우리가 원하는 걸 얻었으니까 이득이네. 하하하!’

이제 종합 병원 건립 제안만 채택된다면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룬 셈이었다. 안달복달한다고 될 일이 아니기에 지금은 후련하게 털 때였다.

“건배!”

넷 모두 기분 좋게 원샷을 했다.

카르페 디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