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김지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불안해서요.”
“준비가 부족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고, 철저히 준비했으면 자신감이 넘치는 게 당연할 일 아니야?”
“그렇긴 합니다만, 선생님 세 분이 함께 계시는 걸 보니까 솔직히 불안합니다. 그래도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병원 대 병원으로 만나는 날이야. 봐줄 생각 없으니까 최선을 다해.”
신기동 교수의 눈빛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가장 논리적인 데다 행정 경험까지 풍부한 이혁민 교수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면서도 결코 방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게다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 송재덕 교수마저 손에 든 서류를 놓지 않고 있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제대로 걸렸다.
천안 병원 원장단 역시 똑같은 각오로 참석했을 것이다. 참석 인원부터 시작해 모든 면에서 불리했지만 김지훈 또한 전문 병원의 대표였고, 민정호라는 든든한 힘이 있었다.
‘신기동 선생님 말씀대로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 병원 대 병원으로 미래를 두고 싸우는 날이다. 결국 모든 병원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겠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기필코 올해 안에 종합 병원 건립에 착수해야 한다.’
스멀스멀 전투력이 상승했다.
송재덕 교수가 힐끗 눈길을 주었다.
“김 부원장, 눈빛이 너무 무섭다. 무서워. 다들 최선을 다했을 텐데 어느 병원 안이 채택될지 누가 알겠니? 살살 하자. 살살. 허허허!”
웃으며 하는 말이 더 무섭다.
이혁민 교수까지 나섰다.
“원장님 말씀이 맞다. 천안 병원도, 전문 병원도 급하겠지만 우리 역시 급하다. 하지만 조급하게 군다고 될 일이 아니다. 침착하고 냉정한 쪽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어이쿠! 시간이 다 됐네. 원장님, 들어가시죠. 더 있다간 김 부원장 눈빛에 찔려 죽겠습니다.”
화기애애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한 긴장이 흘렀다.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은 사사로운 인연을 배제하고, 자신이 소속된 병원을 위해 움직이겠다는 각오가 분명하게 전해졌다.
김진호 교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서울 병원 선생님들 각오가 보통이 아니네. 민 부원장,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어.”
“각 병원이 준비한 서류를 보니 정말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원장님은 물론 부원장님도 기세에 밀리시면 절대 안 됩니다. 설득력은 자신감에서 나오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던 김지훈이 돌연 눈가를 좁혔다. 진지하다 못해 치열하게 임하는 자세는 어느 병원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어떤 제안이 채택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는 말이었다.
‘심사의 핵심이 무엇일까?’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불안함 속에 확신이 깃들었다.
“원장님, 작전을 바꿔야겠습니다.”
“작전? 이제 와 무슨 소리야.”
“우선순위를 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 병원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오늘의 논의 주제입니다만, 결정은 우리가 아니라 이사회에서 내립니다. 새로운 이사회와 신 이사장이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과연 다른 병원이 준비한 자료가 우리보다 허술할까요?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극히 미미할 겁니다. 우리에겐 모험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나직한 대화가 오고 갔다.
민정호가 다소 당황했지만 예상했던 분위기보다 훨씬 치열할 것이 빤했고,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김지훈의 제안이 가장 설득력을 가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감각일까? 아니면 누구보다 현실과 상황을 잘 파악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당황스러운 발상이긴 하네.’
때론 사소한 변화 하나가 큰 변화를 이끌어 내기도 하는 법이었다. 또한 김지훈이 이른 나이에 부원장이 되고, 학회까지 설립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핵심을 꿰뚫는 본능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좋습니다. 말씀대로 해 보죠.”
“민 부원장님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핵심을 정확하게 전달해 주셔야 합니다.”
김지훈이 회의실을 바라보았다.
신현수와 신임 이사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이사들은 몰라도 신현수만큼은 당장 달려 나와 서로 인사를 해야 하건만 얼굴 한번 비치지 않았다. 심지어 서울과 천안 병원 원장단에게도 말이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백지에서, 원점에서 제안을 판단하고 싶다는 말이겠지. 더욱이 내가 알고 있는 신현수는 기존 이사장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정 기준이 재정을 비롯한 현실적인 실행 가능성뿐일까?’
정확한 상황 판단과 깊은 고민이 필요했다.
회의가 시작됐다.
신현수와 신임 이사들이 차례차례 소개를 받으며 가벼운 목례로 공식 인사를 대신했다. 낯이 익은 사람이 거의 없어 완전히 새로운 이사회라 할 수 있었다.
김지훈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동안 여러 성격을 가진 크고 작은 회의에 무수하게 참석했다. 논의 주제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결정을 내릴 사람들의 성향이나 면면을 파악하는 일 역시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당장은 현상 유지와 안정을 취했지만 현수 성격상 현실에 안주할 리가 없다. 이사진이 상당히 젊어진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이것으로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바로 제안 청취에 들어가겠습니다. 순서는 서울 병원, 천안 병원, 전문 병원 순이고, 발표 시간은 삼십 분으로 제한합니다.”
역시 신현수다웠다.
쓸데없는 사족을 붙이지 말라는 말이었다.
시간 제한을 예측하지 못한 각 병원이 부리나케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대책을 세웠다. 김지훈 역시 상의를 해 가며 한편으로 이면에 숨은 뜻이 있는지 고민했다.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설명하는 데만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텐데 계획만 듣고 끝낼 생각일까? 서류 제출로 끝낼 수도 있는 일을 두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유가 뭘까? 단지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병원을 설득하기 위해서일까?’
골치가 아프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이상스럽게도 머리가 맑아지며 팽팽 돌았다. 숱한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은 능력일지도 몰랐다.
신현수가 직접 회의를 주재했다.
“서울 병원 제안 발표 시작하시죠.”
송재덕 교수가 말문을 열었다.
서울 지역 대학 병원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건물 및 좁은 공간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진료 차질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노련함이 실려 있어 상당한 설득력을 가졌다. 물론 반복을 거듭하는 특유의 말투도 완벽하게 사라졌다.
이혁민 교수가 뒤를 이었다.
신기동 교수, 거대 병원의 실무를 맡고 있는 행정 직원과 호흡을 맞추며 만든 확장을 위한 구체적 실행 계획을 논리적으로 풀어 나갔다.
세상에 완벽한 계획은 없는 법이었다.
일종의 허점이나 미흡한 부분을 찾았는지 민정호가 눈을 번뜩이며 귓속말을 했다. 반응이 있어야 할 김지훈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나는 눈치도 못 챘는데 재정이나 숫자에 관한 문제는 놓치질 않네. 정말 대단한 능력이야. 이런 사람 옆에 진상미 씨까지 있다는 게 무서울 정도네.’
제안 설명이 끝났다.
민정호가 곧바로 물었다.
“이 부분을 지적할까요?”
“하지 마세요. 아무리 노련해도 결국 의사입니다. 자존심을 찾을 분들이 아니지만 기분이 상할 수도 있어요. 게다가 우리가 듣자마자 찾을 수 있다면 이사회에서도 곧 찾아낼 겁니다. 우리 제안 역시 완벽하지 않을 테고요.”
민정호가 순순히 수긍했다.
회의 직전까지만 해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심산이었지만 김지훈의 생각을 듣는 순간 깨끗이 접었다. 의사는 의사가 가잘 잘 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가는 도리어 일을 망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분도 아니고, 상대가 스승과 같은 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 지금은 전적으로 부원장님을 믿어야 한다.’
천안 병원이 이어 제안을 발표했다.
확장이 아닌 이전인지라 재정 소요가 상당했고, 기간도 적지 않은 시일이 필요했다. 때문에 서울 병원 이상으로 치밀하게 준비했고, 내용도 상당히 달랐다. 동일한 점이라고는 구체적인 계획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는 점뿐이었다.
민정호가 또 물었다.
“천안 병원도 마찬가지입니까?”
“절대 안 됩니다. 그것보다 민 부원장님도 서울 병원과 천안 병원이 정말 잘 준비했다는 사실에 동의하죠?”
“불행히도 그렇습니다.”
김지훈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현수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서류로 눈을 돌렸다.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도 제대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잘 들었습니다. 준비하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전문 병원의 제안을 듣겠습니다. 힘드시겠지만 바로 시작하시죠.”
무척 심각한 기색으로 앞선 발표를 들은 김진호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김 부원장, 다들 정말 철저하게 준비했는데 어떻게 할 거야? 예정대로 해도 되겠어?”
김지훈이 신현수와 이사들의 반응을 떠올렸다.
분명 자료를 읽으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발표가 끝날 때마다 만족스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행정이나 재정적인 문제가 핵심이 아니라는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이런 일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의사들이 만들고 이해한 자료를 굳이 설명까지 들어야 납득할까? 형식에 불과한 자리가 아니라면 원하는 것이 따로 있다. 현수는 절대 쓸데없는 일을 할 사람이 아니야.’
정확한 판단일까?
확률은 반반이었다. 하지만 회의 전부터 지금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직감을 따라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계획대로 하죠.”
“정말 괜찮겠어?”
“불리할 일은 없다고 봅니다.”
단호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김진호 교수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제안 설명을 시작했다. 다른 원장들의 간단했던 소개말과 달리 십여 분을 소진했다.
“다음 발표 듣겠습니다.”
민정호가 일어섰다.
“전문 병원 행정을 맡고 있는 민정호입니다. 김지훈 부원장님을 대신해 제가 설명드려도 되겠습니까?”
신현수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누구 생각일까?’
“전문 병원 결정이라면 무방합니다.”
송재덕 교수를 비롯해 참석자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서울 병원과 천안 병원은 부원장급에 준하는 의사들이 구체적인 계획을 설명했다. 민정호의 능력을 알고는 있지만 김지훈을 두고 행정 직원이 나섰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운 모습까지 보였다.
분위기에 휘둘릴 민정호가 아니었다.
냉정한 눈빛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당당했다.
미흡한 부분이 없다는 듯 시종 자신 있는 태도로 설명을 이어 갔다. 다만 자세히 설명해도 모자랄 판에 굵직굵직한 사항만 설명했고, 그마저도 간략했다.
불과 십 분 만에 끝났다.
하지만 핵심을 찌른 것만은 확실했고, 덕분에 도리어 듣는 사람이 이해하기 훨씬 쉬웠다. 반면 의사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너무 비교되는 상황에 이혁민 교수마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장님, 보기 드물게 치밀한 사람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중요한 사항은 다 언급했지만 너무 간략한데 설득력이 있을까요?”
“그러게. 쟤들이 왜 저러지? 설마 포기한 것은 아니겠지? 그치? 그러면 안 되는데 큰일이다. 큰일.”
“큰일까지는 아니죠.”
“세상일 모른다. 우리가 선배잖니. 선배. 전문 병원을 억지로 눌렀다는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어. 난 그런 소리 듣기 싫다. 근데 지훈이 얼굴이 왜 저렇게 편안하니? 이상해. 이 교수도 이상하지? 그치? 맞지?”
아닌 게 아니라 김지훈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정호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침착한 얼굴로 마지막 발언을 이어 갔다.
“저희 병원의 계획을 너무 간단하게 발표해 놀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단 하나의 이유로 우리의 제안이 실행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송재덕 교수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들렸나?’
참석자들의 이목이 쏠렸다.
신현수는 기대 어린 눈으로 집중했고, 이사들은 모든 병원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현실적인 계획 대신 어떤 말을 할지를 두고 흥미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바로 우리의 미래입니다. 확장과 이전, 그리고 신설 모두 병원의 발전을 위한 제안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동시에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제안이 재단 산하 전체 병원의 미래를 확실하게 담보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전문 병원의 제안이 가장 합당하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병원의 확장성과 발전 가능성, 비용 대비 효율성과 타당성까지 최적의 제안임을 감히 단언합니다. 전문 병원이 종합 병원으로 승격되면 오히려 서울 병원의 확장과 천안 병원의 이전이 빨라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만큼 이익을 낼 수 있다고 봅니까?”
“당연합니다. 경기 서부권의 유일한 종합 병원입니다. 지금도 주변 도시는 팽창을 거듭하며 나날이 인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문 병원임을 표방했지만 지금도 보다 질 높은 치료를 원하는 환자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종합 병원 건립은 곧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무엇보다 수많은 환자들의 바람입니다.”
김지훈의 열변이 계속됐다.
당당하고 단호했다.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간 이식과 복강경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병원을 만들어 낸 힘이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고스란히 실렸다.
“개별 병원의 이득이 아닌 전체 병원의 미래를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보다 많은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김지훈은 끝까지 힘을 잃지 않았다.
가슴속 뜨거움을 아낌없이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