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투표 결과가 발표됐다.
“총 열두 표 중 아홉 표를 받은 김지훈 선생님이 초대 학회장으로 선출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불끈 주먹을 쥐었다.
초대 학회장!
고경아, 손일석, 진충기 교수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많은 이들이 다가와 축하의 말을 건네며 악수를 청해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접전을 예상했건만 압도적인 표 차였다.
부산 병원 대표를 지지했던 표가 모두 김지훈에게 쏠린 것이 분명했다. 경기복 과장이 얻은 표는 H 병원 소속 외과 및 내과, 그리고 부학회장 자리를 약속받은 병원의 표가 전부라는 말이었다.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의미였다.
전문 병원 다음으로 간 이식 수술을 많이 하는 병원의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 심지어 경기복 과장이 가장 공을 들였을 서울 지역조차 김지훈에게 표를 던졌다.
전폭적인 신뢰였다.
준비 위원장으로서 성실하게 설립을 추진한 결과였다. 혼자가 아닌 손일석, 진충기 교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함께했기에 더욱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고경아의 존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김지훈이 누군가를 찾았다.
고맙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만 먼저 찾아 인사해야 할 사람이 있었다. 후보 사퇴라는 결정적 변수가 아니었다면 이런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부산 병원 대표에게 다가갔다.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될 사람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이 학회장이 되셔서 마음이 놓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초대 학회장으로서 최선을 다해 주시길 바랍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마음속 말을 꺼낼 때가 됐다.
“임원분들이 계시지만 부학회장으로서 함께 상의할 분이 필요합니다. 일간 연락드리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투표 전에 하셨어야 하는 말 아닙니까?”
편안한 미소가 오고 갔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과 자주 볼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특히 좋든 싫든 간 이식 수술을 하는 써전과는 일정 수준의 친분을 유지하는 것이 마땅했다.
김지훈이 경기복 과장을 찾았다.
‘내가 먼저 인사하는 것이 예의다.’
선거인 이상 승자와 패자가 갈렸다.
표정 관리를 못하고 있을 줄 알았건만 의외로 담담한 얼굴이었다. 약간의 어색함 속에서도 내민 손을 맞잡으며 축하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적절히 응대하는 것이 도리였다. 하지만 앙금처럼 남아 있는 선입견이 여전했고, 학회는 어떤 식으로든 정치의 장이 될 수 없었다.
‘이런 일에 승자와 패자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겠지. 열정이 아예 없다면 학회장 자리를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회가 사적인 욕심을 채우는 자리가 돼서는 안 된다.’
“고생하셨습니다.”
“내 힘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감사합니다.”
원하는 말이 있을지 모르지만 김지훈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적어도 학회장을 다른 자리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바쁜 시간이 이어졌다.
열두 명의 대표를 비롯해 학회 실무를 담당한 사람들과 추가 회의를 가졌다. 필요할 때마다 전체가 모두 모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구체적인 인선과 향후 계획까지 논의했다.
사람 눈과 판단 대부분 비슷한 모양이었다.
부산 병원 대표가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 속에 부학회장으로 추대됐다. 후보로 나서 끝까지 경쟁한 경기복 과장은 언급조차 되지 않아 항간에 들리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암시했다.
김지훈이 정중히 목례를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학회장님과 함께 우리 학회를 최고 수준으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학회 실무를 맡을 임원으로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가 각각 추대됐다. 전문 병원 사정상 세 명이나 학회 업무를 보는 것이 무리였지만 가장 먼저 제안하고 준비까지 시행한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경아 씨까지 네 명이구나.’
실무자라는 위치가 열심히 해도 본전이요, 생색조차 내기 힘든 데다 욕 안 먹으면 다행이었지만 모두들 흔쾌히 수락했다. 과중한 업무에도 불구하고 김지훈이 학회장이 되는 순간 이미 각오한 일이 분명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고마울 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다.
창립총회 겸 학술 대회 일정이었다.
간 이식 학회 출범을 정식으로 알리는 자리인 데다 학술 대회를 겸하면 논문 발표 등이 병행되기에 상당한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마냥 뒤로 미룰 수 있는 사안도 아니었다.
의견을 취합한 김지훈이 결정을 내렸다.
“세 달 후 창립총회를 열겠습니다. 실무를 담당하는 분들께 최대한 협조해 주시고, 논문은 각 병원과 자신의 분야에서 반드시 하나 이상 발표하셔야 합니다.”
“동의합니다. 기존에 논문을 쓰고 있던 병원이 많을 테고, 다른 분야 역시 예상하셨을 일인 만큼 학술 대회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전문 병원의 업무가 너무 많아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부학회장의 말에 손일석이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정도 일은 이미 각오했고, 경험도 충분합니다.”
“다른 학회 실무를 맡으신 적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고요. 일복 많은 사람과 일하다 보니 웬만한 정도로는 힘들다는 생각조차 안 듭니다.”
“일복 많은 사람이요?”
“우리 학회장님이 그런 분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환자를 어마어마하게 끌고 다닙니다. 최근에는 사방에 행정적인 일까지 뿌리는 중이십니다.”
“그래서 간 이식 건수가 가장 많군요. 우리 실력이 뒤떨어지는 줄 알고 마음을 졸였는데 다행입니다.”
“하하하!”
가벼운 농담에 큰 웃음이 터졌다.
경직되고 어색한 분위기가 풀리며 자유로운 논의가 이어졌다. 덕분에 갑갑한 일 중 하나였던 학회 운영비 분담까지 수월하게 해결됐다.
회의가 끝났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간 이식 학회의 출발이 정말 좋았다.
다들 배고픔 대신 부푼 가슴을 안았다.
거의 유일하게 경기복 과장의 얼굴이 좋지 않았지만 이미 결정된 일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아마도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 H 병원 부원장, 혹은 그 이상의 힘을 가진 자리에 도전할 것이다.
무작정 비난할 일이 아니었다.
폐해를 예상하고 걱정했을 뿐 실제 벌어진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의 체면과 야망을 위해서라도 가장 질 높은 논문을 발표할 수도 있었다.
삶이라는 것이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든 김지훈에겐 최고의 하루였다.
단 한 명만 경험할 수 있는 초대 학회장이 됐다.
무조건 외쳐야 했다.
카르페 디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김지훈이 아직도 남아 있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남은 일을 생각했다. 하나하나 따져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주일 후 종합 병원 건립 최종안 제출과 논의, 세 달 후 창립총회에 학술 대회라! 학회장으로서 논문 하나 정도는 발표해야 할 텐데 일반적인 논문을 쓸 수도 없고 부담되네.’
할 일이 태산이었다.
“후우! 언제 다 하지?”
고경아가 살짝 팔을 쳤다.
“부원장님! 우리가 있잖아요.”
“학회에 재단 문제도 있지만, 수준 있는 논문을 쓰려면 삼 개월로는 부족한데 걱정이네요.”
손일석이 투덜거렸다.
“그걸 알면서 우리 병원은 최소 세 개 정도 발표하겠다는 말을 그렇게 뻔뻔하게 하셨습니까? 덕분에 진충기 선생님과 나도 덩달아 죽을 지경입니다. 일복이 넘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새로 만들지는 말아야지.”
누굴 탓하랴!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경아 씨하고 일석이 네가 있어 정말 다행이야.”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말고 믿어.”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스스로를 믿고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동료들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긴 하루였다.
여진처럼 남아 있는 흥분 속 뿌듯함과 산더미처럼 쌓인 일 사이에서 묘한 갈등을 느끼던 김지훈이 낑낑 숙제를 하는 희연이를 보다 말고 웃었다.
‘내일 또 숙제가 있지만 오늘 숙제를 다 하고 나면 신나게 놀겠지? 우리 인생도 똑같네. 힘든 일의 연속인 것 같아도 하나를 끝내고 난 후 느끼는 즐거움 때문에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겠지. 부정적으로 살지 말자.’
긍정은 힘이다.
할 일이 태산처럼 남은 것이 아니라 태산의 절반을 이미 올랐다. 이제 종합 병원 건립에 관한 건과 창립총회만 잘 해결하면 된다. 더구나 학회를 운영하고, 참여하는 일은 의사 본연의 일이었다.
잠에 빠진 김지훈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
월요일 아침.
김지훈이 여기저기에서 축하 인사를 받았다.
전문 병원 과장을 거쳐 최연소 부원장도 모자라 간 이식 학회 초대 학회장이라니, 부러움을 떠나 시샘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지훈의 노력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뒷말을 할 여지조차 없었다.
김지훈도 사람인지라 어깨가 으쓱거릴 법도 했지만 자신의 일을 잊지 않았다. 지금까지 해 온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이 남았다.
김지훈, 김진호 교수와 민정호가 매일 오후 일과가 끝난 후 머리를 맞댔다. 어지럽기만 했던 숫자들이 눈에 들어오고, 머릿속으로만 그려야 했던 건물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사이 최종안이 완성됐다.
회의 시 역할 분담까지 마쳤다.
김진호 교수는 원장으로서 종합 병원 건립의 당위성과 미래를 설득하고, 김지훈은 의료 부분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설명하기로 했다. 재정 소요 등의 실제적인 문제는 당연히 민정호의 몫이었다.
다른 병원 원장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량감이 떨어지지만 모두의 바람대로 학회장이란 타이틀이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났다.
학회장 선거를 치른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주말이 다가왔다. 전화 한 통 할 법한 신현수는 매정하게도 연락 한번 주지 않았다.
‘정말 백지에서 검토할 모양이네.’
화염이 난무하는 주말 집담회 속에서도 오후에 있을 회의에 정신이 팔렸다. 결과를 자신할 수 없어 불안했지만 이번에는 김진호 교수와 민정호가 있었다. 서로를 믿고 추진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건립안 제시는 오늘로 끝이지?”
“재단 이사회는 일정대로 세 번 열리지만, 보완 요청이 없다면 회의는 한 번만 여는 것으로 변경됐습니다.”
“그동안 준비하느라 수고했다. 후회하지 않도록 모든 것을 쏟아붓고 와.”
“부족한 점이 많을까 봐 걱정이 앞섭니다.”
“서울이나 천안 병원이라고 해서 다를 것 같아? 다들 마찬가지 입장일 테니 걱정하지 마. 난 준비한 사람들의 땀을 믿는다.”
‘특히 너를.’
이준영 교수의 눈빛이 든든했다.
자신들의 미래가 달린 일이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모여들어 파이팅을 외치는 후배들의 당찬 기운은 어깨를 펴게 하는 힘이었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종합 병원 건립이 확정돼야만 혁원이, 종진이, 만석이 모두 교수로 확실하게 임용할 수 있다. 해내자. 아니, 기필코 해내야 한다. 파이팅!’
모두의 기대를 안고 서울로 출발했다.
의사 인생 대부분을 보낸 서울 병원이 보였다. 온갖 추억 속에 은근한 그리움마저 느껴졌지만 지금 몸을 담고 있는 곳은 전문 병원이었다. 그곳에 자신을 믿는 동료들이 있기에 냉정하게 대처해야 했다.
‘그래도 산이 너무 높네.’
생각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교수와 학생으로 인연을 시작해 천안 병원 원장단만 해도 절로 허리가 굽혀질 판인데, 서울 병원 원장단은 아예 범접하기 힘들 정도였다.
송재덕 교수가 보였다.
병원 규모가 큰 때문에 이사회도 추가 참석자를 인정했는지 부원장 옆에 이혁민 교수까지 떡하니 앉아 있었다. 그도 모자라 신기동 교수가 서류를 든 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김지훈의 허리가 반으로 접혔다.
김진호 교수는 물론 다른 교수들을 잘 모르는 민정호도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형식적 예의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온 인사 같았다.
송재덕 교수 때문일까?
“안녕하십니까?”
“김 부원장, 왔니? 왔어?”
“별일 없으셨습니까?”
“맨날 똑같지, 뭐. 준비 많이 했지? 많이? 우리도 많이 했으니까 후회 없이 붙어 보자. 참! 학회장 됐다며? 축하한다. 축하해. 허어! 전공의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우리랑 똑같아졌구나. 세월 빠르다. 빨라. 살살 하지. 살살.”
“저희야말로 살살 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선생님도 참석하십니까?”
신기동 교수가 슬쩍 시선을 주었다.
“왜? 안 돼?”
순간 칠지도가 뇌리를 스쳤다.
춥다. 추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