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손일석이 손가락을 꼽았다.
“일곱 표를 얻어야 당선인데 확실한 표는 후보 본인하고 우리 고 과장님까지 딱 두 표네요. 삼파전인데 다섯 표를 더 얻을 수 있을까요?”
많은 병원이 지지 의사를 표했지만 예의상 보인 태도일 수 있어 은근히 초조한 모양이었다. 후보 모두 간 이식을 대표하는 병원 소속이기에 뚜껑을 열기 전까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선거이기도 했다.
“할 만큼 했잖아.”
“아무리 따져 봐도 일차 투표에서 과반을 얻는 사람이 나오긴 힘들어. 이차 투표까지 가든 안 가든 부산 병원이 강력한 변수인 것만큼은 확실해.”
“변수라니?”
“결선 투표에 두 명만 진출하면 떨어진 사람 표를 얻는 쪽이 이길 수밖에 없잖아. 부산 병원이 우리에게 호의적이란 사실이 유리하긴 한데……. 아니지. 무조건 일차 투표에서 꼴찌를 면해야 하니까 처음부터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게 먼저네. 김 교수, 준비 위원장으로 끝내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라는 생각을 팍팍 심어 줘야 해. 잘할 수 있지?”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어떤 선거든 일단 자리 욕심이 강해야 선거 연설에 호소력이 실리기 마련이었다. 다른 후보, 특히 경기복 과장과 비교한다면 부족한 상황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백번 양보해서 학회장에 별 미련이 없는 건 좋은데 학회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지는 말자. 무엇보다 종합 병원 건립과 우리가 책임져야 할 식구가 몇인지 잊지 마. 막말로 매년 들어오는 펠로우들 일만 시켜 먹고 내보낼 거야? 고 과장님, H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정신 교육 부탁드립니다.
“예. 김 부원장님! 경기복 과장님은 애초 다른 분야가 함께하는 것을 반대한 분이에요. 만일 그분이 학회장이 되면 우리 처지가 어떻게 될까요?”
“짜 놓은 틀이 있는데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죠? 가뜩이나 초기에는 겉돌 수밖에 없는데 배제된다는 생각이 들면 다들 참여 자체를 꺼릴 거예요. 손 교수님 말씀대로 학회가 시작부터 유명무실해지는 거죠.”
서울 가는 내내 조곤조곤 탔다.
진충기 교수까지 가세해 다시 한번 책임 의식과 미래를 언급했다. 게다가 없는 자리에서 욕하기 뭐했지만 학회장 자리에 사활을 건 경기복 과장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낱낱이 까발렸다.
“이미 부학회장 선임까지 약속했다는 말이 들립니다. 몇몇에게 뇌물을 주고 학회 자리를 나눠 먹겠다는 소리와 뭐가 다릅니까? 그런 학회가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부산 병원 선생님은 다르지…….”
“부산 병원 선생님도 훌륭한 분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경기복 과장을 이길 수 있을까요? 더구나 간 이식 학회의 성격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그 사람이 적임자입니다.”
경기복 과장에 대해 좋은 말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사적 감정을 가졌다 해서 없는 말까지 꾸며 낼 진충기 교수가 아니었다.
때문인지 점점 전투 의욕이 솟구쳤다.
‘누가 돼야 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누가 되지 말아야 하는지는 확실해. 다들 걱정이 많은 건 알지만 그건 이미 나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네요.’
마침내 H 병원이 보이는 순간 훅훅 거친 숨을 내뱉을 수준에 이르렀다. 어쩌면 김지훈도 학회장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김지훈이 긴 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준비 위원장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외과 사람들이야 대부분 안면이 있지만 내과를 비롯해 다른 분야는 모두가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부지런히 서로를 소개시키고, 함께 인사를 나누며 데면데면한 분위기를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선거운동이었다.
경기복 과장과 부산 병원 대표가 열심히 인사하며 후보로 나선 자신들의 존재를 피력했다. 반갑게 웃어 주는 사람부터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 사람까지 다양한 반응을 보여 어느 누구에게도 선거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었다.
김지훈으로서는 다소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이미 선거 실시를 공고했기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준비 위원장 신분을 가진 상황에서 똑같이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중립을 지키며 준비 위원장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맞아. 나만이 가능한 선거운동일 수 있으니까 손해 본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
마음 다잡았다.
오히려 후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에게 두 후보를 직접 소개하기까지 했다.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가 고개를 흔들면서도 미소를 머금었다.
‘저 모습이 김지훈만의 매력이기도 하지. 대부분 좋은 결과를 이끌어 냈지만 오늘은 어떨까?’
두고 볼 일이었다.
곧 회의가 시작됐다.
각 분야 대표들이 차례로 정식 인사를 했다.
“전문 병원에서 근무하며 간호과 대표를 맡은 고경아입니다. 간 이식 전문 간호사 육성에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애초 반대했던 사람이 제법 있을 텐데 많은 이들이 환영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각 병원 나름의 준비를 하며 필요성을 절감한 모양이었다.
이어 김지훈이 진척 상황을 발표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을 감안할 때 무척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미진한 부분은 곧 선출할 학회장의 몫으로 넘겼다.
“이상으로 준비 상황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십 분간 휴식 후 학회장 선거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신 준비 위원장님과 준비 위원님들에게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짝짝!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었다.
후보들에 대한 평이 주된 관심사였다.
공기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이제 준비 위원장이 아닌 한 명의 후보로 선 김지훈도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며 부지런히 자신을 알렸다. 그동안 전화와 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이 상당수였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현장의 분위기는 달랐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미흡하지만 후보로 나섰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후보 세 분 모두 훌륭한 분들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잘해 오셨고, 고생 많이 하셨지만 학회장은 준비 위원장과 다르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동의할 수 있는 비전을 보여 주시길 바랍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역시 만만치 않네. 미리 선거운동을 했다고 해도 다들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결국 후보 연설이 관건이겠구나. 경기복 과장이 주요 임원 자리를 제시했다는 말이 헛소문이었으면 좋겠다. 후우! 내가 아니라 학회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래야 해.’
짧은 시간 동안의 인사가 끝났다.
후보 연설이 시작됐다.
경기복 과장이 가장 먼저 연단에 올라 열변을 토했다. 상대적으로 풍부한 행정 경험과 H 병원의 간 이식 성과를 거론하며 자신이 적임자임을 강조했다.
박수 소리가 결코 작지 않았다.
몇몇 의사와 주고받는 미소 속에 의미심장한 눈빛이 섞였다. 김지훈이 자신의 선입견에서 비롯된 착각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두 번째로 김지훈이 후보 연설을 시작했다.
그동안 무수히 논의한 학회 구성과 운영의 원칙을 다시 한번 제시하며, 초대 학회장은 명예가 아니라 일꾼이 돼야 한다는 점을 적극 피력했다.
“특히 각 분야가 유기적으로 협조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간 이식 분야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간 이식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위한 길이며, 우리의 의무라고 감히 단언합니다.”
처음과 못지않은 박수가 터졌다.
손일석이 환하게 웃었다.
‘김지훈! 은근히 고단수야. 학회장 역할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을 거론해야 각 대표들의 마음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고 있네.’
진충기 교수 역시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당당한 목소리와 태도 좋습니다. 우리 학회만큼은 연공서열이나 친분 관계에 따라 운영되지 않도록 이끌어 갈 사람이 학회장으로 선출돼야 합니다.’
부산 병원 대표가 뒤를 이었다.
김지훈이 귀를 열었다.
‘그동안 느낀 점을 종합하면 내가 안 될 경우 간 이식에 우리 못지않은 열정을 가진 부산 병원 대표분이 되는 게 맞아.’
마지막 후보 연설이었다.
김지훈과 경기복 과장에게 쏟아진 우열을 가리기 힘든 호응 때문인지 부산 병원 대표에게 더욱 눈길이 쏠렸다. 더구나 지방을 대표한다는 의미까지 있어 반응에 따라 선거 판도가 완전히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삼파전이 될까? 아니면 이파전이 될까?
첫마디가 끝났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김지훈도 깜짝 놀라 입을 열지 못했고,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 역시 예상치 못한 사태에 눈만 멀뚱거렸다. 당사자만이 태연할 뿐이었다.
사회자가 다시 물었다.
“후보를 사퇴하신다고요?”
“맞습니다. 행여 제게 표를 주시고자 했던 분이 계신다면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하지만 투표를 두 번이나 치를 이유가 없고, 무엇보다 이제 학회가 출범하기에 희생에 가까운 열정과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런 시기에 어떤 분이 적임자인지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묘한 울림이 있었다.
적임자로 누구를 지칭하는지 각자의 생각에 달렸지만 똑같은 경쟁력을 갖고도 후보를 사퇴한 상황이었다. 결코 가벼운 행동이 아니기에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삼십 분 후 투표에 들어가겠습니다. 그 전에 각 대표분들은 자신이 속한 병원의 의견을 취합해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기복 과장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선거 지형이 완전히 달라졌다.
삼파전과 결선 투표를 예상해 미리 손을 썼건만 생각지도 못한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게다가 경쟁자로만 여겨 이렇다 할 접촉도 없었다. 부산 병원 대표의 말 한마디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난 서울 지역 대표들과 대책을 상의할 테니 강 선생은 다른 분야 대표들을 만나 봐. 이 선생은 내가 갈 때까지 나를 지지하기로 했던 대표들을 붙잡고 있어.”
‘제길! 애초에 후보로 나서지 말았어야지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꿍꿍이속인지 몰라도 생각대로 되지 않을 거야.’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면 선거를 치를 수 없었다. 서울 지역 대표들에게 재차 지지를 호소한 경기복 과장이 곧바로 부산 병원 대표를 찾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결과에 상관없이 중책을 맡으셔야 할 분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뽑아만 주시면 열심히 할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말씀대로 열심히 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신설 학회에 무엇이 필요한지, 학회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더 깊이 고민하겠습니다. 앞으로 선생님께서 서울과 지방의 원활한 소통을 책임지셔야 합니다. 제가 그렇게 이끌어 나가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이어졌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대화를 나누던 경기복 과장이 헛기침을 하며 다른 대표를 찾았다. 유일한 경쟁 상대인 김지훈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뜻밖입니다.”
“오늘 갑자기 생각한 일이 아닙니다.”
“드리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죄송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학회장이 되면 무엇부터 하실 생각입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간 이식 분야를 더욱 발전시켜 한 명의 환자라도 더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만이 아닌 관련 분야 전체와 함께해야 한다고 제안했고요.”
“임원진 구성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김지훈이 웃었다.
“이미 주요 병원과 각 분야의 대표를 다 뽑았는데 임원 구성을 따로 고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원칙을 지키면서 그분들의 의견을 취합해 실행하는 것이 학회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산 병원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질문에 다른 답이 나왔다.
“경기복 선생님이 학회 운영 방침이나 임원 구성에 대해 훨씬 더 구체적인 답을 주셨습니다. 신설 학회인 이상 실행력이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답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선생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개개인의 능력에 큰 차이가 없는 이상 의지와 열정이 더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시간을 쪼갤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겠죠.”
“저 역시 동감합니다. 준비 위원장을 맡아 설립 준비를 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다른 분들도 만나 보셔야죠?”
삼십 분이란 시간은 짧았다.
하지만 공평했다.
김지훈과 경기복 과장 모두 최대한 자신의 생각을 알렸고, 부산 병원 대표는 안면이 있는 사람과 만나며 환담을 나누었다. 오간 대화의 내용에 따라 지지했던 대표들의 표심에 영향을 줄 것이다.
“투표 시작하겠습니다. 대표분들은 투표장으로 입장해 주십시오.”
후보인 김지훈 대신 진충기 교수가 참여했고, H 병원도 대리인을 들여보냈다. 손일석, 고경아와 함께 결과를 기다리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선거가 뭔지 한 달 만에 두 번이나 치르는데도 꽤 초조하네.”
“떨어질까 봐?”
“안 됐으면 하는 사람이 뽑힐까 봐 걱정이 돼. 부산 병원 선생님이 사퇴하신 것도 너무 마음에 걸려. 두 명 중 한 명인데, 그게 그 소린가? 하하하!”
김지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학회장 자체가 지닌 무게에 전문 병원의 미래까지 짊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더구나 당사자인데 초조하지 않으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투표 진행을 맡은 대표가 나왔다. 김지훈을 비롯해 모든 이들이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