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김지훈이 살짝 콧등을 찡그렸다.
함께 학회를 꾸려 나가야 할 사람이건만 껄끄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학회장 자리를 두고 다툴 상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경기복 과장이 보인 노골적인 욕심 탓이었다. 갑갑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리한 제안이나 의견을 제시한 쪽이 대부분 H 병원과 관련이 있어 억측만은 아니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전체 회의 때 결정할 일이 하나 더 있어 전화했습니다. 지방까지 모두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쉽지 않을 텐데 이번 기회에 학회장 선출까지 진행했으면 합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후보 등록도 안 된 상태입니다. 임원이 확정이 된 것도 아니고, 최소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알고 투표를 해야 하는데 후보를 알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신설 학회라 해도 준비 위원장 체제를 오래 끌어 좋을 일이 없습니다. 서울 지역은 합의를 했고, 지방 병원도 일부 동의했습니다. 온라인으로 후보 등록을 받고, 회의 당일 시간이 걸리더라도 마무리 지어야 학회 설립이 더욱 힘을 받지 않겠습니까?)
절차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무리한 요구였다. 각 지역 대표들이 동의했다는 말도 온전히 신뢰하기 어려웠다. 집요하게 요구했다면 마지못해 긍정적인 의사를 표한 사람이 태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준비 위원장을 거치지 않은 이상 월권이 분명했다.
‘이미 선거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인데 이걸 의욕이라고 봐야 하나? 노골적인 욕심이라고 봐야 하나? 내가 반대한다면 어떻게 나올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반면 순순히 제안을 철회할 경기복 과장이 아니었다. 동조하는 사람이 서너 명 이상이라면 회의 당일 더 큰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선뜻 답을 안 하자 경기복 과장이 다시 강력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준비 위원장보다 책임과 권한이 훨씬 크고 명확한 학회장이 빠르게 선출돼야만 설립에 지장이 없다는 것이 주요 논리였다.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리를 떠나 학회를 주도해야 하는 사람과 시작부터 척을 져서 좋을 일이 없기도 했다. 동의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이 답이었다.
‘딱 잘라 거부하면 사사건건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대표자들이 모두 뽑힌 상황을 이용하자.’
“알겠습니다. 대표자분 전원에게 의사를 물어 과반이 동의한다면 바로 후보 등록을 받고, 회의 당일 학회장 선거를 시행하겠습니다.”
외과 대표 여덟 명에 다른 분야 대표 네 명을 합쳐 열두 명이었다. 불과 일주일 앞두고 일곱 명의 동의를 얻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과반이라면 일곱 명이군요. 일단 동의 여부를 떠나 후보로 등록하겠습니다. 준비 위원장으로서 정식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소리에 자신감이 엿보였다.
김지훈도 일일이 통화하기 어려운데 이미 원하는 결과를 얻은 모양이었다. 학회 설립에 매진해도 모자랄 판에 선거 준비만 했다는 생각에 입맛이 썼다.
“알겠습니다.”
(그럼 합의된 것으로 알고 각 병원 대표들에게 저도 연락하겠습니다. 회의 날 보죠.)
학회장 선출에 관한 사안 말고는 단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다른 병원은 몰라도 H 병원 대표라면 설립 자체에 관심을 두었어야 했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뭐가 그렇게 급할까? 스스로 발등을 찍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하나? 나도 생각을 바꿔야겠어. 출세의 발판으로 여기는 한 학회장으로서 제대로 일한다는 보장이 없다.’
그동안 철저히 중립을 지켜 왔지만 김지훈의 입이 무거운지, 가벼운지조차 알지 못할 경기복 과장이 고스란히 속을 보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민 부원장님, 지금도 H 병원 소식을 듣고 있습니까? 혹시 부원장 선임이 가까워졌단 말은 없었습니까?”
오고 간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상황을 파악한 민정호였다. 통화 전후로 표정이 바뀐 김지훈을 보며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상황이 안정되면 부원장으로서 내부만이 아니라 병원 협회 일도 관여해야 하는 이상 지금보다 훨씬 더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내 할 일만 열심히 한다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세상이 아닙니다.’
“강력한 경쟁자까지 나타나 경기복 과장님이 꽤 급한 상황에 몰린 것으로 들었습니다. 재단 내 주도권 싸움이 부원장 자리 쟁탈로 표면화된 거겠죠.”
“그렇군요.”
“학회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르지만 부원장님이 적임자라는 사실은 확신합니다. 할 일이 많으실 텐데 최종안 점검은 내일 만나 상의하시죠.”
“오늘 안 하고요?”
“선거가 코앞의 일이 될지도 모르는데 선거운동 들어가셔야죠.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것만큼 최악의 일은 없습니다. 그럼 이만!”
홀로 남은 김지훈이 얼굴을 감쌌다.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경쟁자를 바랐지만 상황이 정반대로 흐르고 있었다. 젯밥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을 믿을 수 없었다. 뒷짐 지고 점잖은 척하다간 학회를 설립하자마자 무너질지도 몰랐다.
전화기를 들었다.
대표자들에게 경기복 과장의 제안을 알렸다. 상당수가 이미 알고 있는 눈치를 보여 상당히 찜찜했지만 도리어 말하기가 수월했다.
“경기복 과장님께서 정식으로 후보 등록을 요청하셨습니다. 학회장 선출 건에 과반수가 동의하신다면 저도 후보 등록을 하겠습니다.”
(두 분 이외에는 없습니까?)
“더 계실 것으로 믿습니다.”
(공약이든 뭐든 정보가 있어야 할 텐데, 선거 전 후보들의 생각을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준비하실 수 있겠습니까?)
“촉박한 시일이 문제지만 준비 위원장으로서 차질 없이 진행하겠습니다. 후보들의 이력과 소개는 빠른 시일 내에 메일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김지훈이 자신감을 갖고 대처했다.
구두로 확인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의한다고 밝힌 대표가 일곱 명에 점점 근접해 더더욱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자리를 위해 자리를 탐하는 사람이 학회장 자리에 오르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학회장은 결코 출세의 발판이 아니야. 오직 학회장에만 욕심을 냈다면 모를까, 사적인 욕심을 앞세워 무리하게 움직이는 사람에게 지고 싶지 않네.’
전에 없는 의욕에 불탔다.
욕심이어도 좋았다.
마지막 통화가 끝났다.
과반을 훌쩍 넘는 동의를 받아 내심 놀랐다. 게다가 부산 병원도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곧바로 학회장 후보를 냈다는 점은 정말 뜻밖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결국 삼파전이 됐다.
서울 지역의 지지를 받을 경기복 과장과 지역 병원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 부산 병원 대표를 생각할 때 김지훈의 기반이 가장 약했다.
반면 준비 위원장으로서 폭넓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나이는 어리지만 의사로서 성취한 바가 적지 않았고, 이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불리하지도, 유리하지도 않은 선거다. 무엇을 강조해야 내 자신과 우리 병원의 존재를 강조할 수 있을까? 이제 부원장이 됐으니까 결국 이력이라고는 과장이 전부인 이상 역시 기본이겠지?’
신중하게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차근차근 그동안 이뤄 온 일을 기록했다.
형식은 선거 홍보를 위한 글이었지만 의사가 된 이후의 발자취였다. 모험이나 다를 바 없었던 선도적 수술, 전문 병원 개원 후 과장이자 간 이식 센터장으로 시행한 수술, 정훈철과의 인연으로 시작한 소아 희귀 질환 수술, 복강경을 이용한 췌장암 수술을 위해 매진한 나날까지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행정적인 면은 어떨까?
탁월한 행정가인 민정호에게 많이 배웠다. 전문 병원의 운영에 참여하고, 종합 병원 건립을 준비하며 쌓은 경험도 만만치 않았다.
혼자만 알고 있으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메일로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 빤해 염치 불고하고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에게 겸사겸사 선거운동까지 부탁했다.
(투표 경험이라곤 과대표 선거가 다지만 최선을 다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셔. 우리 동네 국회의원 선거운동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뛸게. 진충기 선생님께는 내가 연락할 테니까 선거 때 발표할 내용하고 수락할 말까지 구상해.)
“수락?”
(천하의 김지훈이 후보야. 경기복 과장이나 부산 병원 대표 선생님에게 꿀릴 게 뭐가 있어? 인성부터 수술 건수까지 갑 중의 갑이니까 이미 됐다고 생각하면 돼.)
든든했다.
더욱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남았다. 준비 위원장으로서 중립에 서 제 할 일을 충실히 해낸다면 그것이 바로 선거운동이었다.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결국 난 하던 대로 하면 된다는 말이네.’
학회장에 눈이 팔려 기본적인 일을 잊으면 경기복 과장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최선을 다해 환자를 보고 수술하면 저절로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 믿었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
빡빡한 일과를 쪼개고 쪼개 두 번째 변형 휘플을 시행했다. 단 한 번뿐인 경험이었지만 서도훈은 집도의로서 손색이 없었고, 김지훈은 퍼스트를 서며 또 다른 시각을 얻었다.
“서도훈 선생, 기존 기구만으로 휘플 라파로를 하기엔 무리가 많을 것 같아. 퍼스트가 해야 할 일이 지나치게 많아 실수하기 딱 좋겠어. 휘플 때 필요한 기구 목록 다시 작성하자.”
“저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문합과 수처용 기구를 다양하게 확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서도훈 선생이 먼저 목록을 뽑아 시뮬레이션해 보고, 그다음에 나하고 검토해 보자.”
“알겠습니다.”
“이번에 수술한 환자까지 두 케이스에 불과하지만 사례 보고를 하자. 만일 다른 병원에서도 시도했다면 서로의 경험이 꽤 필요할 거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던 김지훈이 서도훈을 보며 눈가를 문질렀다.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휘플을 하는 손이 뛰어났다. 지금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언젠가 자신을 뛰어넘어 췌장 분야 최고의 써전이 되고도 남았다.
‘췌장 쪽만 생각하면 살이 떨릴 정도로 무서운 경쟁자인 데다 후배가 날 추월하려 하는데 왜 기분이 좋지? 간 이식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에휴! 그쪽은 경쟁자가 더 무시무시하네. 이러다 쫓아가기 급급해지는 거 아니야?’
등골이 서늘해지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문득 이혁원과 나종진까지 생각났다.
한 발 한 발 전진해 자신의 목표를 이뤄 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또한 선배로서 후배의 앞길을 열어 줄 절대적 의무가 있었다. 때문에 학회장을 비롯해 종합 병원 건립이 더욱 절실해졌다.
‘부원장이 된 순간 이미 정해진 길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절대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엄청난 시간을 빼앗겨도 말이다.
며칠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기본 업무도 벅찬데 학회 설립 준비에 선거까지 겹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민정호가 최종안 결정 기한에 여유를 두지 않았다면 아마 혀 빼물고 쓰러졌을 것이다. 물론 최종안 작성은 차근차근 진행됐다.
“원장님, 죄송합니다.”
“원내 업무 때 보는 서류하고는 차원이 다른 데다 민 부원장까지 너무 빡빡하게 굴어서 힘들긴 힘들다.”
“이번 주만 참아 주십시오.”
“그런 소리 하지 마. 어차피 각 병원 안을 논의할 때 내가 발표해야 할 사안 미리 알아 두는 건데, 뭐. 이렇게 힘든 작업인지도 모르고 그동안 김 교수에게만 맡겨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 할 일 많을 텐데 빨리 가 봐.”
김진호 교수가 기분 좋게 웃었다.
원장으로서 일일이 확인하고 결정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을 티끌만치도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 부원장의 역할을 종합 병원 건립에 매진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해도 양보와 배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나 단점이 있겠지만 존경할 수밖에 없는 선배들이 너무 많았다. 이런 직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진심으로 허리를 깊게 숙였다.
드디어 약속한 날이 밝았다.
여느 때처럼 치열한 주말 집담회를 마친 후 주요 인물들이 모여 머리를 맞댔다. 이준영 교수의 조언은 마음을 편안하게 했고, 이경석의 말에 어깨가 든든해졌다.
“사람들의 눈은 보기보다 훨씬 매서운 법이다. 원하는 일이 되든 안 되든 학회 설립의 주역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편안하게 임하면 좋은 결과 있을 거다.”
“김 교수, 우리 병원의 힘을 믿어. 비록 규모는 작아도 간 이식 전문을 표방하는 병원은 우리밖에 없잖아. 분명 유리한 점이야.”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준비 상황을 점검한 후 전체 회의가 열리는 H 병원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준비 위원인 손일석, 진충기 교수에 간호과를 대표하는 고경아까지 함께했다.
김지훈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누구보다 책임이 무거운 준비 위원장으로서 모든 사안을 완벽하게 파악해야 했다. 또한 머릿속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도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예상되는 질문에 적절한 답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그간 기울인 노력이 반감되고도 남았다.
“고 과장님, 간호과를 비롯해 각 분야의 연락 체계가 적당해 보입니까?”
“문제없을 것 같은데요.”
“진충기 선생님, 간담췌 분회가 아닌 외과 산하 학회로 등록하는 문제를 두고 이해관계에 따라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질문이 있을 경우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학회 유지 비용 분담도 우리 안에 동의할지 걱정이네요. 흐음! 회의가 눈앞인데 왜 이렇게 미흡한 부분이 많아 보이죠? 아! 선생님이 준비한 부분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하하! 원래 책임을 맡은 사람이 가장 불안한 법입니다. 누가 준비했어도 이 이상은 못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근데 손 교수는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해?”
그러고 보니 가장 바삐 입을 놀렸어야 할 손일석이 몇 마디 하지 않았다. 내심 고민이 많았던 김지훈도 의아한 눈치를 보였다.
손일석이 콧등을 찡그렸다.
“회의도 회의지만 학회장 선거가 꽤 신경 쓰이네요. 부산 병원도 후보를 내는 게 당연한 일이긴 한데, 우리에게 불리할지 유리할지 알 수가 없어요. 다들 선거 준비에 전념했을 텐데 답답합니다.”
학회장 선거!
잠시 잊고 있었던 김지훈이 입맛만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