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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09화 (1,209/1,329)

15화

세상일 뜻대로만 되지 않는 법이다.

바쁜 와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학회 설립 준비에 최선을 다했지만 곳곳에서 암초를 만났다. 사실 핵심이 될 외과 구성원을 제외한 다른 분야가 적극적으로 나설 유인이 적긴 했다.

단적으로 내과만 해도 간 이식을 전담하는 의사 유무에 따라 입장이 갈렸다. 소화기 내과 소속으로 다른 환자를 보다 수술이 있을 때만 관여하는 의사 입장에서는 학회의 필요성을 적극 공감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방사선과나 행정 지원 파트 역시 역할이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은 병원이 많아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밝힌 병원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나마 간호과가 의외로 큰 호응을 보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간 이식 수술이 많은 병원일수록 전담 간호사의 인원이 많았고, 각 병원 간의 연계도 좋은 덕이었다.

물론 고경아의 힘이 컸다.

회의석상에서 거론할 만큼 걱정도 많았다.

“부원장님, 간호과는 대상 병원의 80퍼센트 정도가 참여하겠다는 의향을 밝힌 상태로 곧 대표자를 선출할 예정입니다. 내과를 포함해 다른 분야 모두 쉽지 않아 보이는데 무난히 진행될까요?”

“윤석진 선생님, 어떻습니까?”

“초반에 호응도는 높았는데 현실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전담 의사가 없는 병원은 누가 대표로 나서야 할지도 정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어렵사리 통과된 제안이었다.

기대 이하의 참여를 보인다면 경기복 과장은 분명 이의를 제기할 테고, 최악의 경우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 수도 있었다.

분위기 가라앉았다.

김지훈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사전에 말은 안 했지만 예측했던 문제입니다. 기존 학회도 회원 전체 참여가 어렵지 않습니까? 모든 병원이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인정하고, 우리는 우리 할 일만 충실히 하면 됩니다.”

“고생만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단 몇 개 병원이라도 참여한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학회 설립이 걸린 문제인 이상 최소한의 목표는 반드시 이뤄야 합니다.”

기준이 어디일까?

“앞으로 서울 지역 대표 병원 네 곳 및 지방 거점 병원 네 곳과 중점적으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산 병원과 H 병원은 이미 각 분야에 전담 팀이 있으니까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나머지 병원에 주력하면 됩니다.”

“다른 병원은 포기하는 겁니까?”

“촉박한 일정도 문제고, 기본적으로 간 이식 수술이 적으면 당장 참여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지금 우리에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손일석이 웃었다.

‘선택과 집중이란 말이 여기서도 어울리네.’

“맞습니다. 설립 후 부러울 정도로 잘 돌아가면 오지 말라고 해도 올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설립에 집중한 후 학회장 잘 뽑아 정말 잘 굴러갈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동의합니다. 힘이 넘치면 몰라도 시간까지 없는 이상 각 지역 대표 병원에 집중하는 것이 맞습니다.”

진충기 교수도 십분 동의했다.

김지훈이 마무리 지었다.

“다음 회의 때까지 반드시 자신의 분야를 대표하는 분을 선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지 학회 설립만이 아니라 우리 병원과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인 만큼 조금만 더 고생해 주셨으면 합니다.”

막 끝내려는 순간 윤석진이 발언을 청했다.

“다소 갑갑한 말인데 H 병원에서 강력하게 대표 자리를 원하고 있습니다. 투표 없이 동의해 달라는 눈치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투표 없이요?”

“지금까지 미적거리고 있는 다른 병원들 참여를 끌어내겠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단지 내과만의 욕심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고경아도 같은 걱정을 했었다.

상황을 보건대 학회장 자리를 노리는 경기복 과장의 요구나 다름없었다. 외과 이외 임원들의 지지까지 얻으면 한결 수월해질 테니 말이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어떤 식으로든 자리를 두고 대가가 오고 가면 혼탁해지기 마련이었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이유가 없지.’

“정당한 절차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야 누가 되든 잡음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자격을 인정받는다면 후보로 나서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간 이식을 가장 많이 하는 전문 병원의 주력입니다.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김지훈이 단호하게 말했다.

학회장 자리를 둔 싸움이 확대되고 있었다. 단, 절대 개인적인 욕심을 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가 척 엄지를 치켜들며 눈을 마주쳤다. 부원장이 된 이후 상당히 변한 모습을 보이는 김지훈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진상건 사건이 해결된 이후라고 할 수 있었다.

의료 외적인 부분까지 매사 적극적이었고,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대다수가 옳다고 말하는 일인 경우 오히려 공격적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리더가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못 잡으면 흔들리기 마련인데 바람직하네.’

이미 합의한 바를 실행할 때가 됐다.

다들 시간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회의를 자주 여는 것도 무리가 따랐다. 기왕 모였을 때 한 가지라도 확실하게 해결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일을 말이다.

손일석이 발언을 청했다.

“한 가지 더 결정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상의하기로 한 중간 점검은 다 끝났고, 시간이 꽤 늦었는데 중요한 일이 아니면 다음 회의 때 말씀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금방 끝납니다.”

“말씀하시죠.”

“학회장 후보를 선출했으면 합니다.”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이 자리에서요?”

“오래 걸릴 일 아닙니다. 번거롭게 후보들 나와서 일일이 말 듣고 투표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즉시 추대하고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면 됩니다.”

“공식 절차를 밟아…….”

“손일석 선생님 제안에 동의합니다.”

말도 끝나기 전에 진충기 교수를 비롯해 거의 모든 참석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내심 어떤 의도인지 알고 있는 김지훈에겐 제 머리 제가 깎는 꼴이었다.

윤석진이 수고를 자청했다.

“외과에서 학회장이 나와야 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고, 이왕이면 우리 병원에서 선출됐으면 합니다. 적임자는 많지만 당위성까지 갖춘 준비 위원장님을 추천합니다.”

“재청합니다.”

“준비 위원장님에겐 당황스러운 일일 수 있겠습니다만, 이미 모든 분들과 미리 상의한 결과입니다. 후보로 거론하셨던 손일석 선생님과 진충기 선생님께서 먼저 제안해 이뤄진 일이니까 수용하셨으면 합니다.”

김지훈이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추천이 아닌 추대였다.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해 왔고 그럴 수밖에 없는데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니, 가슴이 먹먹하면서도 전에 없는 책임감을 느꼈다.

사족을 붙일 자리가 아니었다.

양보나 절차를 거론하며 시간을 소모할 일도 아니었다. 대단한 권력이나 이득이 따르는 일이 아니기에 무엇보다 당당하게 임해야 했다.

“부족한 저를 믿고 학회장 후보로 추천해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수락하신 것으로 알고 바로 투표에 들어가겠습니다. 아! 단독 후보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군요. 반대하시는 분은 이 자리에서 말씀하시고, 아니라면 큰 박수로 동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짝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공산당도 아니고 절차 자체에 시비를 걸 수 있었지만 전문 병원 전체의 뜻과 다를 바 없었다.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도 기분 좋게 웃으며 한없는 성원을 보냈다.

김지훈이 머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최선을 다해 학회 설립에 매진한 후 학회장에 도전하는 것만이 보답하는 길이었다. 결과를 떠나 기대에 부응하는 과정을 밟아 가야 마땅했다. 다소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어진 일에 충실하게 대처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이혁원과 강은미가 있지만 기존 환자만이 아니라 우측 간을 모조리 절제한 세 살 아이, 문정빈의 상태를 예의주시했다.

아이의 강한 생명력은 일종의 축복이었다.

사흘 만에 중환자실을 벗어나 각종 모니터링 기계를 설치한 일인실로 옮겨졌다. 배고픔과 통증에 칭얼거렸지만 예상보다 빠른 회복이 분명했다. 미세하게 지속되던 출혈까지 완전히 멈춰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혁원 선생, 조직 검사 결과는?”

“간모세포암으로 나왔고, 절단면도 깨끗합니다. 회복에만 집중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자신 있는 대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문득 간 이식이 아니라 소아 외과에 전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후배의 선택을 밀어주는 것이 바로 선배의 역할이었다.

‘많이 아쉽겠지만 종합 병원으로 승격되면 반드시 필요한 파트기도 하고, 각자의 길이 있겠지. 설마 진우도 소아 외과 한다는 소리를 하진 않겠지?’

선배로서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경험을 전하며 가르친 후배들이 여러 분야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는 것만큼 멋진 일도 없을 것이다.

결전의 날이 점점 가까워졌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각 분야에서 하나둘 대표가 선출됐다. 고경아가 유일하게 간호과 대표로 선임됐다. 내심 전문 병원 출신이 대거 뽑히길 바라 아쉽긴 해도 무척 기쁜 일이었다.

‘경아 씨 능력이 점점 빛을 발휘하네.’

이제 정관 작성부터 조직 체계까지 설립에 필수적인 요건을 확정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김지훈이 준비 위원장으로서 이들을 임시 대의원으로 위촉하는 한편, 첫 전체 회의에서 논의할 안건과 내용을 제시했다.

전화와 메일을 통해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덕분에 서울 병원과 전문 병원에 한정됐다고 해도 무방했던 인간관계가 엄청나게 넓어졌다.

‘같은 일을 두고도 정말 다양한 생각이 존재하는구나. 모든 의견을 취합해 결정해 나간다면 무리한 일은 없을 것 같다. 인맥이 필요한 이유가 이런 걸까?’

금전 문제가 아니라면 결코 손해 될 일이 아니기에 성심성의를 다해 상의해 나갔다. 일부 무리한 제안도 진심을 다해 설득할 수 있었다.

‘서로의 의견이 충돌한다고 해도 결국 같은 학회 소속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아. H 병원 의견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볼 이유가 없다.’

바쁜 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일주일 앞으로 전체 회의가 다가왔다.

부담이 느껴질 만한 시기였지만 전날 방영된 특집 방송으로 무척 고무된 하루였다. 특히 이혁원, 송진우, 강은미 등 미래의 주역이 될 의사들만이 아니라 간호과를 포함해 얼마나 많은 의료진이 필요한지 역설해 무척 뜻깊었다.

‘역시 훈철이 형이야. 전문화될수록 오히려 어느 한 과가 아닌 모든 과가 하나가 돼 유기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확실하게 짚어 주셨네.’

덤으로 방송 얘기가 나올 때마다 입가를 씰룩이는 스승을 볼 수 있었다. 화제의 중심에 언제나 이혁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자랑스러울 것이다.

“혁원이 인터뷰 보셨죠? 전 엄청 떨렸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네요.”

“그랬나?”

아들이라 해서 더 신경 쓰거나 특혜를 주지 않기에 아무도 불만을 갖지 않았다. 공평무사한 자세는 어느 사회에서나 철저히 지켜야 할 원칙이라는 점을 새삼 느꼈다.

그런 점에서 무척 기쁜 소식이 하나 더 있었다.

진상건이 드디어 검찰 구형을 받았다.

법률적인 문제는 문외한이기에 오로지 형량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고, 서정호는 피의자의 사회적 위치, 재력이나 영향력에 휘둘리지 않았다.

징역 십오 년!

벌금 및 추징금 이백오십억!

가진 돈을 다 토해 내는 수준은 아니어도, 십오 년 후면 진상건은 백발이 돼서야 사회에 복귀할 것이다. 물론 대법원까지 거쳐야 확정되겠지만 이번만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혼자 히죽거리며 사필귀정을 외치던 김지훈이 노크 소리에 힐끗 시계를 보았다.

‘정확하네.’

민정호였다.

초안을 작성한 후 수정과 검토를 거쳐 최종안이 거의 다 완성됐다. 이 주 후면 종합 병원 건립이라는 또 하나의 산을 넘어야 하기에 거의 매일 만나 상의해야 했다.

“소식 들으셨죠?”

“진상건이요?”

“십오 년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검찰이 때릴 수 있는 최고형이라 만족할 수밖에 없네요. 추징금도 예상외로 적었습니다.”

“서정호 형님 판단인데 문제라도 있습니까?”

“조금 더 깊게 발이 빠졌을 때 잡았으면 알거지를 만들었을 수도 있었단 생각에 아쉬워서 그럽니다. 형 마치고 나와 떵떵거리면서 사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요.”

사기죄에 유난히 관대한 나라였다.

종종 수많은 서민들의 등골을 파먹은 놈도 사면이라는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풀려나는 세상이니, 화가 나다 못해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어쨌든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할 일에만 집중합시다.”

“그러죠. 학회장 도전하신다고요?”

“최종안에만 집중하자니까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동일한 일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두 연관된 일일 수도 있었지만 김지훈으로서는 분리해 생각하고 싶었다. 머리만 아플뿐더러 학회장 자리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다.

그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경기복 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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