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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08화 (1,208/1,329)

14화

스멀스멀 쉬지 않고 새어 나오는 피가 한 장의 거즈를 적시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 살,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출혈이었다.

이혁원이 당황했다.

적절하게 대처해야 했지만 머릿속이 엉켜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책임의 무게가 그런 것이었고, 어쩌면 김지훈이 있어 도움을 요청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집도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하려던 김지훈이 힐끗 눈길만 주고는 조심스럽게 다시 압박을 시작했다. 문득 아주 오래전이지만 이준영 교수와 함께 수술했을 때가 떠올랐다.

‘내게도 분명히 이런 상황이 있었을 텐데 스승님은 날 믿고 항상 기다려 주셨다.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힘이자 응원이었다. 혁원아, 환자가 아이일 뿐 대처 방식은 성인과 다르지 않아. 당황하지 말고 지금까지 배워 온 대로 진행하면 돼.’

신중하게 대응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이혁원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중대 기로이기도 했다. 단순히 한 명의 써전이 아닌 후배를 가르치고, 제자를 길러 내야 할 의무가 있는 교수로서의 자질과 역량의 시험대라 할 수 있었다.

반드시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김지훈은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의미를 내포한 침묵이 흘렀다.

이혁원이 후욱! 숨을 내쉬었다.

‘김지훈 선생님은 날 믿고 있다. 집도의로서 책임을 다하라고 말하고 있다. 세 살 아이라고 두려움을 갖는다면 결국 어려운 수술을 할 때마다 회피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감을 갖자. 나 혼자 하는 수술이 아니다.’

김지훈이 아니더라도 송진우가 있었다. 전문의가 될 때까지 가르쳐야 할 고경철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았다.

현재 가진 능력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을 믿고 수술을 준 김지훈에게 한 명의 당당한 써전으로서 능력을 보일 때였다.

이혁원이 눈가를 굳혔다.

“가장 작은 간 봉합용 바늘 주세요.”

당혹스럽기만 했던 두려움이 멀리 사라졌다. 어떻게 출혈을 잡아야 하는지 침착하게 고민하며 내민 손에 사라졌던 자신감이 다시 실렸다.

“수처합니다.”

김지훈이 거즈를 제거했다.

매서운 눈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부분을 보던 이혁원이 과감하게 간 조직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사각지대임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동작은 없었다.

“타이! 컷!”

첫 번째 타이가 끝났다.

신중하게 출혈 부위를 닦아 내던 김지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출혈량이 현저하게 줄었지만 안전하다고 확신하기엔 어딘지 모르게 애매모호했다.

다시 한번 수처를 해야 할지, 이대로 지켜봐도 될지 정확한 판단이 필요했다. 추가 수처로 확실하게 지혈시킬 수 있겠지만 위험성이 훨씬 높았다. 같은 부분을 반복적으로 수처할 경우 노련한 써전도 간 조직 손상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이대로 끝낸다면 더 이상 간을 손상시킬 이유가 없었다. 자연적인 지혈을 유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했고, 종종 이해득실에 따라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운이 나쁜 경우 수술 후에도 출혈이 지속될 수 있었다.

문제는 환자의 나이였다.

성인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 소량이라고 해도 혈액량 자체가 적은 아이에게는 상당한 부담을 가할지도 몰랐다.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장단점이 있었다.

아직도 거즈에 피가 묻어났다.

모든 집도의가 고심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고, 퍼스트로서 먼저 조언을 하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김지훈은 입을 열지 않았다.

‘집도의마다 생각과 판단이 다르겠지만 이런 경우 결정 과정이 의외로 중요해. 먼저 수술 팀에게 의견을 묻고, 결정을 내려.’

아무리 경험 많고, 실력 있는 써전이라도 독단적 판단은 가급적 지양하는 것이 좋았다. 스승에게 그렇게 배웠고, 똑같이 가르쳤다.

“김지훈 선생님,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압박과 지혈대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지만 정확하게 할 자신이 있다면 추가 수처도 괜찮아. 오히려 훨씬 더 안전할 수도 있어.’

“송진우 선생은?”

“전 한 번 더 수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 체격을 생각할 때 저절로 멈추길 기다리기에는 양이 제법 있어 보입니다. 간 손상 위험성이 높긴 하지만 수술 후 내내 불안한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김지훈이 슬쩍 눈길을 주었다.

‘진우야, 잘하고 있어. 내 눈치 하나도 안 보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다.’

올바른 과정을 거쳤지만 상반된 의견이 나와 오히려 집도의의 부담이 가중됐다. 그러나 항상 의견이 통일될 수는 없었다.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이혁원이 출혈 부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두 가지 방법이 갖는 위험성을 꼼꼼하게 따졌다. 모두 합리적인 판단 근거가 있기에 무엇보다 자신의 능력과 경험이 어느 수준인지를 두고 고심을 거듭했다.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김지훈 선생님, 한 번 더 봉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됩니다.”

“최종 결정은 집도의 몫입니다.”

“알겠습니다. 수처!”

송진우의 의견을 수용하면서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모든 판단을 집도의에게 맡긴 김지훈이 재빨리 수처가 가능하도록 시야를 확보했다.

동의한다는 말이었다.

이혁원이 침착하게 간 조직을 떴다.

김지훈이 매의 눈으로 살폈다.

‘머뭇거리면 도리어 손상을 준다. 혈관이나 담도는 간 조직과 분명 느낌이 달라.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과 경험을 믿으면 돼.’

신중함 속에 과감함이 보였다.

‘훌륭해. 이제 간 절제도 혁원이 네 손안에 있는 수술이 된 것 같다.’

“타이!”

두 번째 타이가 끝났다.

수처 과정에 어떤 문제도 없었지만 결과로 증명해야 했다. 출혈량이 비슷하다면 같은 문제를 두고 정말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확인 역시 집도의의 몫이었다.

이혁원이 조용히 수처 부위를 압박했다.

째깍! 째깍!

오 분이란 시간이 하염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거즈를 제거했다.

수술 팀의 눈이 일제히 한곳에 집중됐다.

이혁원이 훅 숨을 몰아쉬었다.

송진우와 고경철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

피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출혈 부분을 확실하게 잡은 동시에 간 조직 손상을 피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동시에 마지막 부분을 절개해 우측 간을 모두 절제해 냈다. 마침내 세 살 아이 몸속에 기생하며 생을 재촉한 암 덩어리가 제거된 것이다.

두근두근!

마치 자신의 성취인 것처럼 왜 김지훈의 심장이 뛰는지 모를 일이었다. 가장 아끼는 후배가 드디어 그렇게 원하고 바라던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김지훈의 마스크가 불룩해졌다.

‘같은 간 절제라도 성인과 소아는 정말 많이 다른데 잘했다. 이제 어떤 수술도 벽이 되지 못할 거야. 후우! 스승님도 이런 기분이셨을까?’

수술 아직 안 끝났다.

흥분과 벅참을 뒤로할 때였다.

이혁원이 의외로 침착했다.

“조직 검사는 계획대로 수술 후 확인하겠습니다. 암 세포가 남아 있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암이 남아 있다고 해도 더 이상 간을 절제할 수가 없었다. 마취 시간이 길어져 유리할 일이 없었고, 수술실에서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향후 아이의 삶을 좌우할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잘린 간이야 다시 자라겠지만 재발한다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강은미와 함께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간세포암과 예후가 다르다지만 재발 시에는 다를 바가 없었다. 너무 큰 고통이 따르기에 단 하나의 암 세포도 남아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무리가 시작됐다.

절제된 간이 있던 자리가 텅 비었다.

여린 몸에 드레인이 세 개나 박혔다.

조그만 배에 커다란 상처가 생겼다.

수술 중 출혈도 적지 않았다.

마취 시간만 다섯 시간이 넘었다.

그러나 아이는 강했다.

마취과 의사가 가한 가벼운 자극에 손발을 꿈틀거렸고, 자발 호흡까지 빠르게 돌아와 목구멍을 막은 튜브와 싸우기 시작했다.

아직 긴장을 늦출 때가 아니었다.

“중환자실로 옮깁시다.”

드르르륵!

즉시 중환자실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아이 부모가 눈가를 붉힌 채 허둥지둥 달려왔다. 예상보다 약간 늦어진 시간에 별의별 생각을 다 했을 것이다.

“정빈아! 선생님, 수술 잘됐나요?”

엄마의 마음을 잘 알고 있지만 아이를 확실하게 깨우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김지훈의 눈짓에 이혁원이 보호자에게 간단히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수술은 잘됐습니다.”

이혁원의 침착한 목소리가 무척 듬직했다.

연락을 받고 대기 중이던 강은미가 송진우와 함께 환자를 보았다. 소아과 의사답게 아이에게 필요한 조치를 빠르게 시행했다.

“으아아앙!”

기관 내 튜브를 제거하자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다른 병원보다 훨씬 빠른 협진과 적극적인 자세가 아이를 건강하게 퇴원시킬 것이다.

이후 모든 치료를 맡겨도 좋았다.

땀에 젖은 수술복을 새로 갈아입고 다음 수술을 기다리던 김지훈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실력, 판단, 자세 어느 하나 나무랄 데가 없네. 스승님께서 수술 잘했냐고 물어보시면 뭐라고 대답하지? 너무 밋밋해도, 과해도 안 되는데…….’

이준영 교수의 반응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제자에겐 내색조차 안 했지만 아들의 능력을 확인한 날까지 무뚝뚝한 한마디 말로 넘길지 자못 궁금했다.

그때 이경석이 들어왔다.

절로 나종진이 생각났다.

‘라파로 쪽에 전념한다고 한 이후 통 수술을 볼 틈이 없었네. 잘하고 있겠지?’

“경석이 형, 종진이는 어때요?”

“그동안 신경도 안 쓰더니, 혁원이가 수술을 굉장히 잘했나 보네. 표정 관리 좀 해라.”

“신경을 안 쓰다니요? 형을 믿는 거죠.”

“날 믿으면 뭐 해? 내년이 걱정된다. 교수로서 흠잡을 데가 없는데 혹시 문제라도 생길까 봐 어떤 때는 잠이 안 와. 설마 티오가 안 나오는 건 아니겠지?”

모든 면에서 차고 넘치는 후배들은 분명 복이었지만 교수 자리가 무조건 원하는 만큼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재단 산하 병원 전체에서 몇 명을 뽑아야 할지 논의조차 없어 더욱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과장 자리하고 부원장 자리 걸죠.”

“자리야 다른 사람이 대신하면 돼.”

“그럼 현수 멱살을 잡아야죠.”

“교수 자리 없다는 말 나오면 바로 이사장이고 뭐고 패대기를 쳐야겠지? 한 해에 두 명도 임용하지 못하면 펠로우 지원 자체가 없을 거 아니야?”

“당연하죠. 종합 병원 건립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것은 참아도, 혁원이하고 종진이 자리 없다는 소리는 못 참죠. 아! 만석이도 있네요.”

“세 명이구나. 어쨌든 겸사겸사 우리도 좀 편하게 살자. 셋 모두 교수 되고, 펠로우 새로 들어오면 숨통이 트이겠지.”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구한 날 같은 일과를 되풀이하는 일상은 변함없는데 할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한 세대를 책임지고 이끌어 가야 할 주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배, 후배부터 우리 자신까지 모두 함께 가야 해. 그러려면 결국 종합 병원으로 승격이 돼야 술술 일이 풀리겠지? 어깨가 점점 무거워지네.’

김지훈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고수라면 힘 뺄 텐데!

그날 저녁.

회진을 마친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우는 스승의 모습에 더욱 미소가 진해졌다.

“안 물어보십니까?”

“뭘?”

“환자도 없는 중환자실에 들르신 이유가 있지 않으십니까? 수술 방에 들어오셨다는 소문까지 들리던데요.”

“허엄! 어땠어?”

김지훈이 코를 씰룩이며 입가를 문지르자 이준영 교수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변했다. 외과 후배를 떠나 아들의 일이기에 신경이 꽤 쓰이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소아 외과는 다 맡겨도 될 것 같습니다. 송진우 선생도 써포트를 무척 잘해 줘서 마음이 놓입니다.”

“다행이네.”

“아! 방송국에서 촬영한 것도 아시죠?”

“방송국?”

“벌써 두 번째 방송을 준비한답니다. 혁원이 얼굴이 꽤 많이 나올 겁니다. 난 떨려 죽겠던데 인터뷰 때 얼굴 하나 안 빨개지네요. 철판을 깔았을까요?”

“나 없이도 혼자 잘 큰 놈이야.”

‘에휴! 아들 자랑이나 하시지, 옛날 얘기는 왜 하시나? 말 길어져야 본전도 못 뽑겠네.’

스승을 놀리기엔 공력이 달리는 제자였다.

속으로 투덜거리던 김지훈이 돌연 눈을 반짝였다. 생각해 보니 학회 설립을 위한 두 번째 회의 직전에 방송을 탄다. 소아 희귀 암의 간 절제 수술이니 각 병원 이식 수술 팀에게도 어느 정도 관심을 끌 것이다.

‘우리 병원의 능력을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한다면 상당히 유리해질 수도 있겠네. 내가 할 걸 그랬나?’

결코 해가 될 일이 아니었지만 세상일을 누가 알까? 혹 부정 탈지도 모르는 생각 접어 두고, 아이를 무사히 퇴원시키는 일이 급선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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