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07화 (1,207/1,329)

13화

기대했던 말이 아니었다.

“민 부원장님, 현실과 미래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요? 물론 둘 다 중요하겠지만 장기적인 목표와 가치관을 확고하게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문제가 생길 때마다 땜질하는 식으로 대처하는 병원에서 근무하고 싶지 않습니다. 칠백 병상 규모는 돼야 질적 양적으로 경인 지역을 대표하는 병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그런 미래를 제시하고 관철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그동안 제안한 안을 모두 포함시키겠단 말씀입니까? 송재덕 원장님께서 재정 부분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전화를 왜 하셨겠습니까?”

“걱정이자 애정이겠죠. 하지만 병원 상황이 완전히 안정된 것도 아닌데 사업을 추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규모를 키워 돈을 더 벌기 위해서일까요? 신 이사장과 난 같은 미래를 꿈꿔 왔습니다. 환자, 의사, 직원들 모두 만족하는 최고의 병원, 그 속에서 우리는 최고의 써전이 될 겁니다.”

민정호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부원장 자리를 두고 고민했던 사람 맞나? 어쩌면 난 현실과 타협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종합 병원 건립이 무산될 수도 있습니다.”

“세 번의 기회가 있습니다. 확고한 목표 아래 움직인다면 원장단과 이사회를 설득할 수 있을 겁니다. 결정적으로 발전 가능성은 우리가 가장 큽니다. 미래가 가장 밝다는 말이죠. 더구나 우리에겐 이미 부지가 있잖아요.”

민정호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서울이나 천안 병원과 환자 수, 수입, 주변 입지 등을 비교할 때 모든 면에서 불리했지만 부지 확보만큼은 상당히 유리한 점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에 들어온 말은 결국 미래였다.

‘밝은 미래?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뜬구름 같은 말에 휩쓸리다니 어이가 없네! 하지만 최고의 병원은 정작 내가 원하던 목표 아니었나?’

“알겠습니다.”

“민 부원장님, 해 봅시다.”

“대신 부원장님도 최선을 다해 주셔야 합니다.”

“내가 꼭 필요한 부분은 그렇게 하죠. 하지만 학회 설립도 있고, 환자를 등한시하면 미래 자체가 없다는 사실 잘 아시죠? 무엇보다 부원장님과 아무 이유 없이 계약한 것이 아닙니다. 진 과장님을 채용할 때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민정호의 표정이 티가 날 정도로 변했다.

밀리는 횟수가 잦아졌다.

반박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준영 교수가 부원장이었을 때가 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자! 아홉 시 알람 울리기 전에 오늘 일을 마무리합시다. 무척 중요한 소아 환자 한 명이 있어서 시간 내기 만만치 않아요.”

환자를 거론하는 순간 김지훈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엄청나게 중요한 일을 두 가지나 앞두고도 환자를 가장 우선시하는 모습에 민정호가 옷깃을 추슬렀다.

째깍! 째깍!

알람이 울렸다.

김지훈이 빠르게 하던 말을 마치고 일어섰다.

“퇴근합시다. 그럼 이만!”

발걸음 가볍게 사라졌다.

민정호가 웃었다.

‘애도 아니고.’

함께 일하는 것이 점점 즐거워지고 있었다.

금요일, 이른 아침.

회진을 앞둔 김지훈이 뚫어지게 차트를 보았다.

이혁원, 송진우, 고경철, 강은미와 함께였다.

3세 남, 문정빈의 수술 날이었다.

웬만큼 산다는 집도 희귀 질환 치료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데, 암 덩어리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빈한한 집에 빈발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긴 가난한 집뿐일까?’

수술에 필요한 마지막 검사를 확인했다.

문제없었다.

“회진 돌자.”

아이가 울었다.

우리나라 나이로 네 살이 넘은 탓에 병원이라면 한창 무서움을 탈 나이였다. 툭하면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날카로운 바늘로 찌르고, 어두컴컴한 곳으로 데려가 검사를 해 대니 겁을 먹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뒤로 물러났다.

이혁원이 편안한 미소를 머금으며 집도의이자 주치의로서 보호자에게 수술 전 설명을 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수술 방으로 내려가 재운 후 코 줄을 포함해 수술 전 처치를 할 예정입니다. 예상 시간은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정도 잡고 있는데, 예기치 못한 출혈이 발생할 경우 더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부탁드려요.”

“수술이 끝나는 즉시 중환자실로 옮기니까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면회는 아이 상태에 따라 허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벌써부터 눈물이었다.

언제 보아도 적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용히 아이 상태를 눈으로 확인한 김지훈이 고경철에게 눈짓하고는 자신의 회진을 돌았다. 성인이라고 덜 아플 리 없지만 표현조차 제대로 못하는 소아 환자가 없다는 사실이 왠지 다행처럼 느껴졌다.

‘어디가 아프다고 정확하게 표현이라도 하면 마음이 덜 아플까? 눈물만 흘리는 엄마를 보는 일도 쉽지 않네. 후우!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해야 한다는 사실만 기억하자.’

회진을 마친 김지훈이 부리나케 수술 방으로 달려갔다. 아이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이혁원을 보자마자 수술실로 들여보냈다.

“집도의가 할 일이 아니다. 송진우 선생과 경철이에게 맡기고 수술에만 집중해. 강은미 선생도 있잖아.”

후우! 후우!

이혁원의 숨을 따라 긴장이 퍼졌다.

잠에 빠진 아이에게 수술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깨어 있을 때보다 훨씬 수월하게 모든 준비를 마쳤다.

조그만 아이를 수술대 위에 눕혔다.

가느다란 튜브를 기관지에 삽입한 후 마취과 의사가 직접 작은 공기 주머니를 이용해 호흡을 유지시켰다. 자발 호흡이 돌아올 때까지 적당한 공기 양과 규칙적인 간격을 유지해야 해 수술 팀 못지않은 긴장이 요구됐다.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이혁원이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작은 배가 열렸다.

여리기만 한 장기들이 드러났고, 검사 결과대로 원격 전이 소견은 없었다. 이제 간을 절제하기만 하면 된다. 60퍼센트 이상 제거해야 하지만 어린아이가 가진 간의 힘을 믿었다.

“모스키토!”

사각! 사각!

절단면의 크기는 성인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간 내에 존재하는 혈관, 담도를 비롯해 모든 구조물이 작아 조그만 방심이 큰 위험을 초래하고도 남았다.

성인과 똑같이 진행할 수 없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잘랐다.

“보비!”

삐이이이이!

“수처! 타이! 컷!”

간 조직의 강도가 약한 데다 무척 가느다란 실을 사용해 수처와 타이 하나하나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켜야 했다. 그럼에도 출혈은 피하지 못할 일이었다.

붉게 물든 거즈가 쌓였다.

이혁원이 빠르게 출혈량을 가늠했다.

‘전기 소작은 수처만큼 확실하게 지혈이 안 된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혈관 부위 처리 전까지 최대한 출혈을 억제해야 한다.’

“예상외로 출혈이 많습니다. 보비 최대한 적게 사용하겠습니다.”

김지훈이 곧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송진우 선생, 수처와 타이할 때 확실하게 시야 확보해 줘. 고경철 선생, 아이 배라고 무시하지 마라. 기구 잡은 손에 힘 빼면 곧바로 닫히니까 잘 잡아.”

간을 절개해 나갈수록 애초 좁았던 시야가 더욱 좁아졌다. 작은 기구도 조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손을 사용하는 일이 결코 쉬울 리 없었다.

긴장이 고조됐다.

출혈마저 제어하기 힘들었다.

한 장의 거즈가 피에 물들 때마다 성인과 비교하기 힘든 부담이 아이에게 가해졌다. 결국 수액과 함께 수혈이 시작됐다. 수술 전 이미 예상한 일이었지만 수술 팀에게는 대단한 압박이었다.

집도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혁원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숨 돌릴 틈이 필요했다.

“간 절제 잠시 멈추고, 담낭부터 제거하겠습니다. 기구 바꿔 주세요.”

김지훈이 재빨리 절개면 사이를 거즈로 덮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도를 했든, 퍼스트를 섰든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또 하나의 증거였다.

‘긴장이 너무 과도하게 느껴졌는데 좋은 선택이야. 누가 수술해도 출혈을 피할 수 없지만 부담이 크게 느껴질 때는 쉬운 부분부터 침착하게 하면 돼.’

성인의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더 큰 담낭을 박리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툭! 끊어질 것 같은 담낭 동맥을 묶는 김지훈의 손이 무척 노련했다.

“컷!”

담낭이 제거됐다.

잠깐의 휴식 아닌 휴식에 수술 팀의 긴장이 누그러지며 안정을 되찾았다. 새로운 힘을 얻은 이혁원이 신중하면서도 부드러운 손길로 간 절제를 다시 시작했다.

깊숙한 부분에 접근했다.

손이 들어가기도 힘들 정도로 수술 부위가 좁아졌다. 주요 혈관이 주행하는 부위에 점점 가까워져 위험하지 않은 과정이 없었다.

점차 가중되는 부담에 긴장이 고조됐다.

김지훈은 퍼스트이자 수술을 준 슈퍼바이저의 역할을 잊지 않았다. 침착하게 보조를 하며 송진우와 고경철의 집중력을 유지시켜 이혁원이 오직 수술에만 집중하도록 했다.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속도 조절하자. 잘하고 있어. 그동안 쌓은 경험과 네 손을 믿으면 돼.’

좌우 간 동맥, 문맥과 함께 간 내 담도가 모인 담관 그 어느 하나 손상을 주면 안 된다. 결코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에 이제는 긴장이 극도에 달해도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막 타이를 끝낸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암이 있는 부분에 도달했다.

최대한 간격을 두고 절제해야 한다.

혈관에 바짝 붙여 자르는 수밖에 없어 언제 손상을 줄지 몰랐다. 단 한순간에 지금까지 발생한 출혈보다 훨씬 더 많은 피가 솟구칠 것이다. 이제 세 살이 된 아이가 치명적인 상황에 빠질 것이다.

‘이 이상 육안으로 진행하면 위험성이 더 커진다. 혁원아, 집도의는 수술 내내 계속 생각하며 상황에 따라 적절한 선택을 해야 돼. 지금이 바로 그때야.’

그때 이혁원이 손을 내밀었다.

“루뻬 주세요.”

김지훈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루뻬를 사용하면 시야가 더욱 좁아져 절제 속도가 느려지겠지만 대신 정밀한 조작이 가능했다. 해결할 수 없는 출혈을 방지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물론 타이를 해야 하는 김지훈의 어려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모스키토! 타이! 컷!”

사각! 사각!

답답할 정도로 느린 속도였지만 절개해야 하는 선을 정확하게 지키며 절제를 진행했다. 마침내 벌떡벌떡 뛰는 간 동맥 일부분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혁원이 곧바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암과 혈관 사이가 너무 좁기 때문에 혈관에 바짝 붙여 절제합니다. 마취과, 돌발적인 출혈에 대비해 주세요. 모스키토!”

눈에 보이지 않는 전이에 대비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자 암 수술의 원칙을 스스로 상기했다.

사각! 따르륵!

“타이! 컷!”

경험이 아무리 풍부하고 실력이 좋아도 절대 쉽게 진행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더구나 성인이 아닌 아이였다. 결국 자연스럽다 못해 과감하게 보일 정도로 손을 놀리던 김지훈의 수술복도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런 느낌 오래간만이네.’

집도의의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을 알 수 없는 탓인지 이혁원이 간 조직을 헤치고 잡을 때마다 섬뜩했다. 수없이 반복한 일이건만 가느다란 실을 잡고 타이를 할 때는 약한 조직이 끊어질지도 몰라 심장이 벌렁거렸다.

물론 수술 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고도 편안한 손에 안도감을 느꼈고, 이혁원에겐 더욱 강한 자신감을 전했다.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어야 하는 명백한 이유 중 하나였다.

동맥에 이어 문맥과 담도 일부까지 드러났다.

이제 혈관을 따라 마지막 남은 부분만 박리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기구 조작 자체가 어려운 사각지대가 있었고, 수술 시야는 극도로 좁아진 상태였다. 앞으로 불과 일이 센티미터만 더 자르면 되지만 가장 위험한 과정이 분명했다.

“모스키토!”

이혁원이 최대한 신중하게 손을 움직였다.

사각! 따르륵!

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이혁원이 움찔거렸다.

순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집도의에 앞서 손을 놀리지 않았던 김지훈이 곧바로 움직였다. 거즈 몇 장을 집어넣고 압박을 가했다. 예상외로 양이 많아 집도의와 퍼스트를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혈관을 건드린 걸까? 잡을 수 있을까?’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온갖 생각에 빠진 이혁원을 본 김지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혁원 선생, 조금만 기다려 보자.”

“혈관일까요?”

“뭐가 있든 메인 혈관이 아니잖아.”

‘침착하게 대처하면 돼. 집도의가 수술 팀의 분위기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

성급하게 압박을 중단하면 자연스럽게 멈출 피도 멈추지 않는다. 김지훈이 수술 팀의 초조함을 뒤로한 채 상당 시간 압박을 가했다.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에서 무려 오 분여가 지난 후에야 거즈를 제거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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