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06화 (1,206/1,329)

12화

다음 날.

김지훈이 이혁원과 강은미를 만났다.

꽤 피곤한지 토끼 눈을 한 채 연신 하품을 했다. 그도 잠시, 환자에 대해 설명하라고 한마디 툭 던지고는 특유의 집중력을 보였다.

“3세 남아 환자입니다. 체중 감소, 복통, 구토 등을 주소로 타원 방문 후 간암 진단 받았고, 우리 병원에서도 같은 진단을 내렸습니다. 검사 결과 보시죠.”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엽에 1센티미터 정도 크기의 종물이 보였다.

좌엽과의 경계부에 바짝 붙어 있어 혈관이 밀접한 부위를 피하기 어려웠다. 수술 난이도도 문제였지만 상당 부분 절제해야 할 상태였다.

‘저만한 간을 얼마나 더 잘라야 하는 거야?’

냉정을 유지해야 했다.

“원격 전이는?”

“흉부와 뼈에 전이된 부분은 없습니다.”

“타입(Type)은?”

“복부 CT를 보면 종물 내 골(뼈) 조직이 관찰됩니다. 혈관 비슷한 조직까지 관찰되는 것으로 보아 간세포암이 아닌 간모세포암으로 판단됩니다.”

남아에게 더 많이 발견되며 유전 질환으로 추측되는 간모세포암은 암 덩어리 속에 다른 조직이 뒤섞여 있는 암이었다. 성인에게 주로 발생하는 간세포암의 예후보다 훨씬 좋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실제 최종 60퍼센트를 넘나드는 생존율이 보고되고 있었다.

단, 절대적인 조건이 있었다.

“확실하게 제거할 수 있겠어?”

이혁원이 잠시 머뭇거렸다.

김지훈의 말투가 묘했다.

이준영 교수를 찾아 수술을 부탁하려던 진짜 이유, 즉 자신의 능력을 묻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집도의에 따라 다르다는 말이 나올 뻔했다.

‘김지훈 선생님이나 아버지가 수술한다면 가능하겠지만 내가 수술해도 같은 결과를 만들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할 수가 없네.’

“종양이 혈관과 근접해 있지만 직접적으로 침범한 소견은 보이지 않습니다. 출혈 가능성을 조심하며 신중하게 접근한다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누군가는 가능하고, 누군가는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 마치 환자에게 설명하듯 말하고 말았다.

“이혁원 선생, 우리 써전이다. 가능하다는 거야? 가능하지 않다는 거야? 무엇이 이 아이의 생존율을 좌우하는지 잘 알고 있잖아?”

김지훈의 목소리가 매서워졌다.

완벽하게 제거할 때만 보장되는 생존율이었다. 또한 단 1퍼센트의 확률이라도 높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존재가 의사였다.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과 각오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긴장과 두려움은 결이 다른 문제였다.

긴장은 집중력을 높이는 훌륭한 수단이지만 두려움은 위험을 회피하게 만들 뿐이었다. 완벽한 제거가 가능함에도 자신감을 잃어 결국 실패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혁원이 종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김지훈 선생님이 누누이 강조한 말을 잊었다. 누가 집도한다고 해도 혼자 하는 수술이 아니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최고의 수술 팀과 함께한다면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해.’

“가능합니다.”

김지훈의 눈가가 더욱 매서워졌다.

이혁원의 능력과 열정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동안 충분한 경험을 쌓았고, 자신 대신 소아 수술을 맡길 만큼 신뢰하는 써전이었다. 더구나 이제 곧 교수를 바라보는 시점이었다.

‘펠로우 제도가 없었을 때는 이미 교수를 하고 있을 때다. 무엇보다 모든 써전에게 인정받고도 남을 이혁원이다. 불안할 이유가 없어.’

“좋아. 내가 퍼스트 설 테니까 집도해.”

이혁원이 흠칫 놀랐다.

그동안 소아 수술을 맡아 왔지만 이 정도로 크고 어려운 수술은 없었다. 하기에 이준영 교수를 찾았고, 김지훈까지 안 이상 당연히 집도는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로 놀라운 말이었다.

강은미도 김지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제가 말입니까?”

“왜? 자신 없어?”

간 이식 수혜자 수술은 물론 공여자 수술까지 숱하게 들어갔다. 덕분에 혈관이 밀집된 부분을 눈 감고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머릿속에 확실히 박았다. 간 이식은 단 한 번도 집도를 한 적이 없었지만 띄엄띄엄이나마 주요 과정을 받아 경험을 쌓은 것도 사실이었다.

이혁원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심장이 벌떡벌떡 뛰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인정받았다는 기쁨보다 온몸을 휘감는 긴장이 훨씬 더 강했다.

‘간 절제는 이미 몇 차례 해 봤다. 이 아이에게 필요한 수술은 간 절제뿐이다. 혈관은 수많은 위험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다. 난 할 수 있다.’

“자신 있습니다.”

“그런 말만으로는 안 돼.”

“완벽하게 절제하겠습니다.”

“간모세포암의 예후가 좋다고 하지만 결국 절반 가까운 아이를 잃는 질환이야.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 수술해 아이 살려.”

집도를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함께 아이를 치료해야 할 강은미도 입술을 깨문 채 각오를 다졌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아이 상태는?”

“진료 당시에는 수술에 지장 없는 상태였습니다만, 입원 후 다시 평가하겠습니다.”

“내 스케줄 알지? 가장 빠른 시간에 맞춰 날짜 잡아. 수술 기구까지 모두 달라지니까 간호과에 협조 구하고, 필요하다면 손일석 선생에게도 도움을 청해.”

수술 부위가 무척 작을 수밖에 없었다.

혈관에 너무 근접해 있다면 혈관 수술용 루뻬를 착용하고 절제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때 손일석의 조언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철저히 준비하겠습니다.”

“가 봐.”

집도를 맡은 이상 할 말이 무척 많은 이혁원이었다. 부담을 덜 수 있도록 미리 수술에 대해 상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벌써요?”

“누가 집도의인지 잊지 마. 수술 팀과 논의하기 전에 먼저 철저하게 준비해. 그리고 조금 있다 민 부원장 만나야 돼.”

‘일이 정말 많으시네.’

강은미와 함께 조용히 일어나던 이혁원이 나가려다 말고 뜻밖의 질문을 했다. 최고의 써전이 돼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쉼 없이 달려온 김지훈이었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노력해 왔는데 전문 병원 개원 이후 행정 부분에 너무 많은 시간을 뺏기고 있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만족하십니까?”

서류를 꺼내던 김지훈이 눈길을 주었다.

후배이자 동생이면서 제자일 수도 있는 이혁원이었다. 손일석과 더불어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에 어떤 의미인지 모를 수 없었다.

‘만족하냐고?’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혁원이 네게 마음 놓고 수술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써전이 돼 기쁘다.”

이혁원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부원장실을 나갔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인 김지훈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좋은 소리를 들었는데 얼굴이 왜 그래요? 김지훈 선생님이 아무에게나 칭찬을 하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모르겠어. 그냥 옛날이 그립네.”

“아버님처럼 의사의 길만 걸으시는 분도 필요하지만, 김지훈 선생님처럼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시는 선생님도 꼭 필요해요. 어느 쪽이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혹시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는 것은 아닌지 몰라 가슴이 좀 답답해.”

강은미가 웃었다.

“부원장님에 학회장까지 하실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 않았어요?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는데, 그런 게 희생이라면 난 얼마든지 할 용의가 있어요.”

“김지훈 선생님도 똑같이 생각하실까? 아버지가 유일하게 제자로 인정하는 선생님이시잖아.”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그 스승에 그 제자.

다른 말은 아닐 것이다.

김지훈이 소파에 몸을 묻었다.

어렵다 해도 단지 수술 하나 준 것뿐인데 왜 이리 흥분되고, 가슴이 뛰는지 모를 일이었다. 표현하기 힘든 뿌듯함까지 느껴졌다.

‘혁원이가 어느새 여기까지 올라왔네. 스승님도 이런 감정을 느끼셨을까? 내게 어떤 수술을 주셨을 때일까?’

알 수 없었다.

이혁원도 김지훈이 어떤 상태인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선배들이 스승으로서 후배를 길렀고, 어느 때가 되는 순간 분명 동일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혁원아, 형이 참 고맙다. 이제는 내 앞에 서려고 노력해야 할 때야. 나도 스승님을 넘어서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 우리 함께 가자.’

은근히 쌓였던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똑똑똑!

다시 시작이었다.

이틀 연속 민정호를 만난 김지훈이 초안을 보며 상의하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언제요?”

“한 달 후, 각 병원 발전 계획서를 받아 일차 회의에 들어간다고 연락받았습니다. 세 번에 걸쳐 논의한 후 이사회를 열어 최종 결정을 하겠답니다.”

“최종안을 언제까지 만들어야 하죠?”

“늦어도 이 주 안에 초안 작성을 모두 끝내야 검토하고 수정할 시간이 나올 겁니다. 지금부터 부원장님을 포함해 전담 조직을 최대한 가동해야 합니다.”

신현수가 이사장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진상건 사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돼야 이사회를 정식으로 구성할 수 있어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른 일정이었다.

“어느 병원 안이 채택되든 올해 안에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서울 병원은 확장이라 공사 기간이 짧지만, 천안 병원이나 우리는 신축에 가깝기 때문에 서둘러야 할 겁니다.”

선대 이사장의 숙원 사업이었다.

신현수 입장에서는 가장 먼저 전문 병원을 종합 병원으로 확대 발전시키고 싶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결정돼야 할 일이었지만 학회 설립까지 겹쳐 솔직히 조금은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선대 이사장님의 유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시겠답니다. 신임 이사장으로서 최대한 빨리 확고한 입지를 구축해야 하는데 공정한 업무 처리 이상의 무기는 없겠죠. 당연히 신현수 이사장님만의 색깔도 있을 테고요.”

절로 한숨이 터졌다.

“원점에서 시작하라, 이 말이군요.”

“애초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 아닙니까? 딱히 불리한 상황이 아닙니다.”

‘내 처지가 되면 그런 말 못하죠.’

그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송재덕 교수였다.

“선생님, 웬일이십니까?”

(우리 병원, 천안 병원, 전문 병원이 똑같은 선에서 출발한다고 얘기 들었지? 우리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니까 열심히 준비해라. 열심히.)

서울 병원을 우리 병원이라고 했다.

원장을 맡은 이상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미였다.

“그 일 때문에 전화하셨습니까?”

(하면 안 되니? 서운하다. 서운해. 어쨌든 이사장과 재단은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거야. 진상건 그 썩을 놈 때문에 재정 부분이 특히 중요해졌다. 민 부원장과 잘 상의해서 절대 무리하지 마라. 무리하면 안 된다. 안 돼.)

귀중한 조언이었다.

모든 병원이 재정 소요에 신경을 쓰겠지만 직접 연락했다는 것은 그 이상으로 비중이 커졌다는 말이었다.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은 전문 병원에 있는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너랑 나랑 싸워야 할 얘기는 그만하자. 천천히 살살 하면 된다. 천천히 살살. 준비 위원장 맡았다고?)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그냥 빨리 철저하게 하라고 말씀하시지, 이 상황에서도 반어법을 쓰시네. 여전하시구나.’

“들으셨습니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원장들하고 입씨름하려면 계급도 중요하다. 중요해. 학회장 될 발판인데 잘했다. 잘했어. 준비 잘해서 꼭 돼야 한다. 내 말대로 대장 했으면 벌써 했을 거야. 벌써.)

“선생님이 계신데 어떻게 합니까?”

(허허! 그렇구나. 우리 지훈이가 부원장이 돼서도 겸손하구나. 좋다. 좋아. 그럼 끊자.)

“감사합니다. 들어가십시오.”

이 말 저 말 생각나는 대로 막 하는 것 같지만 송재덕 교수의 배려가 담긴 중요한 말은 다 들었다. 몸이 속한 서울 병원과 마음을 두고 있는 전문 병원 사이에서 고민이 많을지도 몰랐다.

내용을 들은 민정호가 십분 동의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오백 병상으로 계획을 잡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예산 차이가 상당합니다.”

내친김에 김지훈이 지적했던 부분 중 재정 소요가 많아지는 부분을 모조리 꺼냈다. 타당성이 충분한 안이었지만 한 푼이라도 줄여야 종합 병원 건립이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안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무 팀 전체 의견도 다르지 않습니다.”

송재덕 교수 전화까지 받은 터였다.

당연히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김지훈이 얼굴을 감싼 채 답을 하지 않았다.

민정호의 시선이 고정됐다.

종합 병원 건립은 사회사업이 아닌 수익 사업이었다. 투자 효율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기에 빤히 보이는 일을 두고 왜 고민하는지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달리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김지훈이 이제야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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