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전문 병원이 새로운 책임감에 휩싸였다.
덕분에 더욱 치열한 일상이 시작됐다.
한 달은 촉박한 시간이 분명했다.
김지훈을 필두로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는 물론 내과, 방사선과, 간호과, 간 이식 지원 행정 부서까지 전화기를 붙들고 살았다. 직접 만나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시간과 거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나서도 김지훈은 좀처럼 여유를 갖지 못했다. 한 조직의 수장을 맡은 사람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새삼 깨달았다.
수많은 의견을 조율하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더구나 의사 본연의 업무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기에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할 판이었다.
위안될 일이 없었으면 진작 퍼졌을 것이다.
조경태 환자가 무난히 회복됐다.
위를 고스란히 남긴 덕에 식사 후 야기되는 불편이 거의 없었고, 덩달아 체력도 빠르게 좋아졌다. 확실히 기존 방식의 휘플보다 유리한 점이 많았다.
“다음 주에 퇴원하셔도 되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예. 경과가 아주 좋습니다. 내과와 상의하셔서 항암 치료 일정을 잡으시면 됩니다.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니까 몸 관리에 특별히 유념하셔야 합니다.”
기뻐하는 환자를 뒤로한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외과적 치료가 필요 없고, 회복이 빠르다고 해도 많이 말랐다.
진행된 암 수술을 받은 환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지만 더 힘든 항암 치료가 남았다. 솔직히 오 년이 지난 후에도 완치 판정을 내리기 힘든 환자였다. 그런 환자를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후우! 평생 면역 억제제를 먹어야 하는 간 이식 환자부터 췌장과 담도의 악성 질환까지 마음 편히 넘어갈 수 있는 환자가 없네. 상대적으로 간단하고 편한 분야를 놔두고 왜 이쪽 파트를 했을까?’
간혹 드는 회의감이었다.
그때 음료수 한 박스를 간호사에게 건네며 활짝 웃는 조경태 환자가 보였다. 퇴원을 앞뒀기 때문인지 웃음소리가 유난히 크고 밝게 들렸다. 강인한 의지와 긍정적인 생각이자 수술을 확실하게 해낸 덕이었다.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우리가 버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저런 모습 때문이겠지. 힘내자. 누군가의 삶을 단 하루라도 더 지켜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함께 있던 서도훈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조경태 환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참 강한 사람이네요.”
“서도훈 선생이 잘 치료한 덕이겠지.”
“다음 주에 휘플 하나 잡았습니다. 변형 휘플 설명했고 동의받았는데, 시간 되시면 퍼스트 서 주시겠습니까?”
“시간만 맞으면 기꺼이 들어가야지. 몇 케이스만 더 해 보고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면 라파로로 시도해 보자.”
서도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드디어 최종 목표인 복강경을 이용한 휘플이 가시권 내로 들어왔다. 의사들 사이에서 장단점을 두고 상당한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지만 지금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철저한 준비만이 남았다.
‘첫 시도는 김지훈 선생님이 해야 가장 안전하겠지만, 그다음은 내가 시도해야 한다. 라파로 경험이 더 필요해. 이경석 선생님 수술을 되도록 많이 들어가야 한다.’
경쟁자가 나종진 한 명이라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교수와 펠로우라는 직위 차이가 아니라 최소 양해를 구하면 이해해 줄 써전이기 때문이었다.
회진을 끝낸 후 잠시 스테이션에 머물던 김지훈이 시계를 보고는 부리나케 사라졌다.
전문 병원에서 제일 바쁜 의사였다.
부원장에 학회 설립 준비 위원장 업무만으로도 힘들 텐데 수술과 진료에 투자하는 시간까지 가장 길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열정도 불가사의했지만 짜증 한 번 내지 않아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떤 의사일까?’
까닭 모를 한숨을 터트린 서도훈이 곧장 연구실로 향했다. 대가의 경지에 근접한 선배에게 배우며 췌장 파트 하나만을 파고드는데 최고의 써전이 되지 못한다면 스스로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애초 따로 만나기로 했던 민정호도 모자라 이혁원과 강은미까지 앉아 있었다. 왠지 무거운 분위기가 흘러 순간 엉뚱한 생각까지 했다.
‘둘이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아니지. 민 부원장이 옆에 있는데 그런 말이 나올 리가 없잖아. 날짜는 잡았나? 혁원이가 빠지면 사람 없어서 난리 나겠네.’
다음 펠로우를 뽑을 때까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자신의 몫을 하고도 남는 이혁원과 나종진을 교수로 임용시키지 못한다면 펠로우 몇이 들어온들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선생님, 무슨 일 있습니까?”
“환자 때문에.”
이혁원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다.
“이번 달에 수술할 소아 환자 문제로 이준영 선생님과 상의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응? 지금까지 잘해 왔고, 알아서 하기로 했잖아. 어떤 환잔데 선생님께 상의를 드려?”
“간암입니다.”
“간암?”
김지훈이 눈가를 비비고 말았다.
어린아이도 갖가지 암에 시달린다. 많은 수가 혈액암인 탓에 외과 영역이 아니었지만 생각만으로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래서?”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맞긴 하지만 이번에 준비 위원장까지 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기존 수술이 적은 것도 아니라 시간이 없으실 것 같아서요.”
“선생님께 수술을 부탁한다는 말이야?”
“저 혼자 감당하기 힘든…….”
돌연 김지훈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이 자식 봐라. 지금 하는 수술만으로도 스승님이 얼마나 힘드신지 알고 말하는 거야? 만석이까지 가르쳐야 하는데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무리 체격이 좋아도 제자보다 체력 강한 스승이 있을 리 없었다. 더구나 요즘 들어 종종 피로감을 보이는 이준영 교수였다. 결혼을 약속한 강은미가 없었으면 한 소리 쏘아붙였을 것이다.
김지훈이 꾹 눌러 참았다.
구구절절 설명할 일이 아니었다.
“이혁원 선생, 수술을 맡겼어도 첫 진료부터 함께 환자를 본 이유가 뭔지 몰라? 소아 수술은 원칙적으로 내 소관이야. 내일 수술 끝나고 강은미 선생과 함께 보자. 선생님,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이 되겠어?”
“저 써전입니다. 시간이 없으면 만들어야죠. 이혁원 선생, 안 가고 뭐 해? 할 얘기 더 있어?”
이혁원이 콧등을 찡그렸다.
누구보다 수술 욕심이 많지만 이준영 교수 앞에서 절대 무리한 욕심을 부릴 김지훈이 아니었다. 눈을 부라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다른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기에 이준영 교수도 별말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들어 수술을 끝낸 후 쉬는 시간이 부쩍 길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부탁을 드리러 오다니, 내 생각이 짧았다. 짧은 수술도 아니고, 된통 혼나도 싸다.’
“죄송합니다. 가 보겠습니다.”
“알면 됐어. 빨리 가 봐.”
이혁원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강은미에게 눈짓을 하며 급히 나갔다. 건강만 유지해도 좋을 나이가 된 아버지 생각에 더욱 가슴이 무거워졌다.
이준영 교수가 입을 열지 않았다.
왜 목소리를 높였는지 모를 수 없었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가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 씁쓸할지도 몰랐다.
김지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
‘적당히 둘러대고 보내면 될 일인데 성급했나? 어찌 됐든 현수 수술까지 일정 부분 맡게 되셨는데 더 이상 수술을 하시는 것은 무리야.’
마음까지 아픈 참이었다.
때문에 용건을 빨리 끝내야 했다.
“선생님, 간 이식 학회 문제로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소속을 간담췌 학회 산하로 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민할 일 아니다. 규모나 구성 인원의 차이가 확연해. 외과 학회 산하로 하는 것이 맞다.”
형식이나 명예 혹은 권위에 무관심한 이준영 교수기에 당연히 들을 수밖에 없는 답이었지만 여러 면에서 미묘한 문제였다.
애초 간 이식을 간담췌 전공 의사들이 시작했고, 현 소속도 간담췌 학회였다. 간 이식 학회로 독립해 외과 산하가 된다면 음으로 양으로 많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어느 조직이든 규모가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간담췌 학회장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준영 교수였다.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학회 임원들이 반대하거나 불만을 터트릴지도 모르는데 스승님 입장이 곤란해지시지는 않을까?’
“그렇게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학회는 절대 개인적 이익을 위해 자리싸움을 해서는 안 되는 곳이야. 말이 나올 수 있지만 원칙을 지키면 된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가슴이 뜨끔했다.
사적인 이익이란 단서를 달았고, 종합 병원 건립이라는 훌륭한 핑계가 있긴 했지만 엄밀하게 말해 학회장 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예. 절대 제 자신이나 우리 병원만의 이득을 위해 일하지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외과 산하로 신청하겠습니다. 그런데 민 부원장님은 무슨 일로 온 겁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만 있던 민정호가 마치 지금까지 함께 대화를 나눴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욕심을 부려야 할 때는 부려야 하는데, 그 스승에 그 제자라더니 참 힘든 분들이네. 오늘도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긴 글렀네.’
“공여자 문제로 간 이식 수술 하나가 취소됐다고 들었습니다. 병원 내부적으로 대비도 할 겸 수술 환자 선정 때문에 찾아뵀습니다.”
“선정 문제를 왜 민 부원장님이 관여하죠?”
역시 빡빡했다.
종합 병원 병실이 부족해 입원 대기까지 발생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때 의사보다 행정 직원을 통해야 빠르게 해결된다는 소리까지 나오는 마당인데 전문 병원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간 이식 지원 팀에게 부탁을 받았습니다. 선정 시일이 촉박한 데다 학회 설립 문제 때문에 일이 급격하게 늘어나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이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고 합니다.”
환자 정보가 담긴 서류 세 장을 내밀었다.
예약 순서대로 앞당기면 간단하지만 실상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몇 개월 이상 밀린 대기 환자의 서류 작업을 일일이 다시 하는 것만으로도 큰일이었다.
꼼꼼하게 살핀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첫 번째 환자를 선정해 달라는 건가? 돈에 관해서는 참 집요하지만 민 부원장도 점점 허점이 보이네. 핑계라도 그럴듯하게 대지. 스승님 판단도 똑같을 겁니다.’
“선생님, 두 번째 환자가 수술을 먼저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운이 좋네요.”
“동의한다.”
민정호가 입맛을 다셨다.
행정과 재정 측면에서 보면 분명 득이 되는 환자가 있었다. 마침 그런 환자가 있어 눈에 잘 보이도록 맨 앞에 놓았건만 여지없이 원칙을 따라 결정했다.
합당한 이유가 없는 한 의견을 제시해야 이빨도 안 들어갈 사람들이었다. 은근슬쩍 주장을 내세웠다간 오히려 타박만 받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깔끔하게 포기했건만 김지훈 눈길이 좋지 않았다.
“민 부원장님, 앞으로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지원 파트에게 원칙대로, 항상 해 오던 대로 수술 후보군을 선정해야 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번거로운 일은 피합시다.”
“알겠습니다.”
“초안은 작성했죠? 제 방으로 가서 검토하죠. 선생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부원장실로 향하던 민정호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때 일방적이라 할 만큼 확실하게 쥐었던 주도권을 점점 김지훈에게 빼앗기고 있었다. 병원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도 기분이 좋지 않아야 하는데 왠지 마음이 가벼웠다.
‘환자에 관한 한 절대 흔들리지 않는 원칙 때문이겠지. 하지만 저도 제 갈 길을 가야겠습니다. 종합 병원은 만들고 가야죠.’
함께 초안을 검토했다.
복잡한 숫자라면 질색하던 김지훈이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 때론 민정호도 최선이라고 생각한 구상조차 보완할 점을 지적하는 예리함까지 보였다.
“장기적인 내원 환자 수 예측을 감안할 때 오백 병상으로는 부족합니다. 진료 도중에 증축 공사를 하는 일만은 피하고 싶은데, 칠백 병상 정도 확보한다면 재정이 얼마나 더 들까요?”
“다시 계산해 보겠습니다.”
“장례식장, 주차장, 편의점 등을 포함한 구내 시설 운영을 특성에 맞게 직영과 외주로 분리해 맡긴다고요? 전체를 모두 외주로 주었을 때와 최대한 직영을 했을 때 수익 구조 비교가 정확한 겁니까?”
민정호가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이런 일에 있어서는 항상 한 발 떨어져 있던 김지훈이 전에 없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같은 목적 아래 하나가 돼 일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었다.
상의를 하는 내내 희열까지 느꼈다.
‘학회 설립을 준비하며 느낀 점이 많은 모양이다. 이제야 제대로 일하는 맛이 나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때 알람이 울렸다.
김지훈이 망설이지 않고 자리를 정리했다.
“아홉 시네요. 오늘 못다 한 얘기는 내일 다시 하기로 하고 퇴근합시다. 아! 소아 환자 상의 끝난 후에 봐야 합니다. 그럼 이만!”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불까지 껐다.
민정호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전매특허인 ‘그럼 이만!’ 소리에 거꾸로 당했다.
김지훈이 기분 좋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