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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04화 (1,204/1,329)

10화

진충기 교수가 무척 궁금한지 대답을 재촉했다. 사적 감정을 배제하길 바랐지만 인간인 이상 경기복 과장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설마 경기복 과장의 제안이 통과된 것은 아니겠죠?”

“어느 쪽이든 잘 진행되는 것이 중요하겠죠.”

담담히 입을 연 김지훈이 더욱 진한 미소를 머금으며 조용히 엄지를 치켜들었다. 드러내 놓고 티를 내지 말자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강하게 흔들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구체적인 실무만 남았군요.”

이제 구성 원칙만 정해졌을 뿐이었지만 어느 병원이 준비를 맡아 진행해야 하는지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준비 위원장을 뽑는 절차도 형식에 불과했다.

경기복 과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회의 주재를 시작했다. 첫발부터 엉클어졌단 사실에 무척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준비 위원장을 맡을 수밖에 없는 김지훈과 진충기가 마음에 걸리지만, 현 상황을 최대한 이용해 학회장 선거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미 통과된 안을 두고 시비를 걸어 봤자 이미지만 망칠 뿐이었다. 최대한 미소를 머금으며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도록 상황을 수습했다.

“대표자 투표 결과 전문 병원의 제안이 통과됐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뜻을 충분히 안 만큼 설립 과정에 있어서 물의가 없도록 진행하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실무를 담당할 준비 위원장 선출에 들어가겠습니다.”

제안을 한 병원 이상으로 적격인 병원이 있을 수 없었다.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가 분위기를 보며 발언을 하려는 순간 부산 병원 대표가 먼저 제의했다.

“누구보다 고민을 많이 했을 김지훈 선생님이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수고스럽더라도 실무 역시 전문 병원에서 맡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 추천이 없었다.

내심 이름이라도 거론되길 바랐던 경기복 과장이 쓴 입맛을 다셨다. 결국 만장일치로 김지훈이 준비 위원장에 추대됐고, 진충기 교수와 손일석은 실무 위원으로 위촉됐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단 하나의 병원에서 전국에 산재한 병원을 감당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현재와 마찬가지로 해당 지역의 의견을 취합하고 결정할 대표가 필요했다. 내과 등을 비롯해 다른 분야와도 협의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책임이 더욱 막중했다.

“지금부터 준비 위원장님께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그럼 각 지역 준비 위원 결정을 부탁드립니다.”

경기복 과장이 마지막 발언을 끝으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깍지를 낀 채 김지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파고들어 발언권을 약화시킬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간 이식 대표 병원의 역할을 강조한 이상 서울 지역 대표로 다른 병원을 지명한다면 네 발등을 찍는 꼴이 될 거야. 날 빼든 합류시키든 불리할 것이 없어.’

김지훈이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 병원의 제안을 택하신 것도 모자라 준비 위원장까지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흡하지만 최선을 다해 학회 설립을 추진하겠습니다.”

짝짝짝짝짝!

환영의 박수가 터졌다.

참석자 중 상당히 젊은 축에 속했지만 간 이식 수술을 가장 많이 하며 선도해 나가는 의사를 십분 인정하고 있었다. 안면이 있고 없음을 떠나 전공의 시절부터 쌓아 온 인지도도 큰 몫을 했다.

김지훈이 정중히 인사를 한 후 곧바로 준비 위원 인선에 들어갔다. 학회의 중추가 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준비 위원을 일일이 선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다고 봅니다. 동의하신다면 준비 위원장으로서 제가 지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객관적인 태도만 담보된다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김지훈과 경기복 과장만 학회장을 노릴 턱이 없었고, 병원 위신까지 걸려 있는 마당이었다.

‘각 병원 추대가 아니라 지명을 하겠다고? 부원장을 맡았는데 설마 경험이 없어서 무리수를 두는 건가?’

경기복 과장이 시작부터 건수를 잡았다는 듯 손을 들어 이의를 제기하려는 찰나, 김지훈이 곧바로 의견을 이어 나갔다.

“죄송하지만 지금 대표로 참석하신 선생님들께서 그대로 준비 위원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대표가 네 명인 서울 지역은 경기복 과장님을 중심으로 진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합당한 제안이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지만 경기복 과장은 도리어 눈가를 찌푸렸다. 초대 학회장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빤히 알 텐데 서울 지역 대표로 인정한 이유를 알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뭐지? 흐음!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지. 학회장이 되기 위해 나를 이용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해. 호락호락하게 보았다간 더 큰일을 당하겠군.’

이내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준비 위원장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개인적으로 새로 뽑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분들도 이의 없으시죠?”

모두들 박수로 화답했다.

흔쾌히 모든 결과를 수용하는 모습에 혹시 분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우려까지 사라졌다. 진충기 교수와 부산 병원 대표만이 눈가를 좁히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대로 수긍할 사람이 아닌데.’

걱정대로 발목을 잡고자 했다.

“이왕 발언권을 얻은 김에 한마디 더 드리겠습니다. 학회 설립이 시급한 관계로 촉박하지만 한 달 후에 전체 회의를 열어 최종 결정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충기 교수의 눈이 번쩍였다.

“각 병원 내부적으로도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더구나 다른 분야까지 준비를 마쳐야 한다면 한 달이란 시간은 너무 짧습니다.”

“의지 문제 아닐까요? 다른 분야 역시 우리 과가 일일이 관여해야 한다면 애초 자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학회 초반 운영에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참여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함께 갈 이유가 없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과 다른 분야까지 참여하는 이상 도리어 출범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김지훈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모든 책임은 준비 위원장인 자신과 실무를 맡은 전문 병원이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러 경우를 따져 보아도 한 달이란 기한은 분명한 의도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불리한 일만은 아니었다.

‘한 달 내에 서울 지역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오히려 우리가 준비하지 못한다면 책임을 들고 나오겠지. 결국 관건은 우리와 경기복 과장의 능력이다.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런 제안을 할 리도 없고, 부원장 자리는 쳐다볼 수도 없다.’

나쁘게 말하면 방해이자 시험이었지만, 좋게 생각하면 오히려 학회 설립을 크게 앞당길 수 있는 기회였다. 시간이 주는 문제를 따져 보는 순간 종합 병원 건립이 뇌리에 스쳤지만 민정호가 뒤를 받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손일석, 진충기 교수를 비롯해 함께 학회 설립을 추진해 나갈 전문 병원 동료들의 열정과 능력을 믿었다.

‘H 병원이 한 달 내에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다면 우리 병원 역시 마찬가지다. 가자! 도리어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더 빠르게 얻을 수 있다.’

결정은 준비 위원장 몫이었다.

김지훈이 마무리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한 달 후 다른 분야를 포함한 전체 회의를 열겠습니다. 모든 분들이 바쁘시겠지만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경기복 과장의 입가가 말렸다.

‘서울과 지방은 달라. 단 하나의 문제라도 제기되면 준비 위원들의 동의를 일일이 구해야 할 텐데 시간만이 아니라 공간적 제한까지 풀어 나갈 수 있을까? 열정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야.’

더구나 전문 병원 대표 세 명 모두 간 이식 수술의 주력이었다. 최악의 경우, 설립에 시간을 뺏겨 수술에도 지장을 초래할지 몰랐다.

환영할 일이었다.

작은 구멍 하나로 댐이 무너진다고 했다. 수술에 문제가 생긴다면 가장 가깝게 위치한 데다 병원 자체 인지도가 훨씬 큰 H 병원에 환자가 몰릴 수도 있었다.

이런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김지훈은 경기복 과장의 무리한 제안을 덥석 물고서도 담담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구성 원칙에 부합하는 실무에 관한 사항을 빠른 시간 내에 준비해 준비 위원분들께 알려 드리겠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으면 바로 알려 주십시오. 적극 시정하겠습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경기복 과장의 의도가 모두 통한 것은 아니었다.

투표 직전에 잠시 불안한 표정을 지었을 뿐 회의 내내 편안한 표정을 잃지 않은 김지훈이었다. 준비 위원장 자리는 물론 겸손한 태도로 자연스럽게 모든 의견을 수용해 참석자들의 눈길까지 끌었다.

좋은 인상을 남긴 것만은 확실했다.

식사 겸 뒤풀이 자리가 이어졌다.

많은 이들이 참석했고, 학회 설립이 주는 흥분 때문인지 자리 내내 떠들썩했다. 덕분에 여기저기 불려 다닌 김지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손일석이 툭 옆구리를 쳤다.

“여유를 가지는 것은 좋은데 경기복 과장의 제안은 왜 받아들인 거야? 물리적으로 가능하겠어?”

“일석이를 믿었지.”

“농담하지 말고. 가능하겠어?”

“H 병원이 가능한 일이면 우리는 무조건 할 수 있어. 경기복 과장님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무슨 착각?”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일을 해결했고, 종합 병원 건립이란 목표를 앞두고 있어. 진상건부터 시작해 여러 얘기를 들었겠지만 정작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고, 어떤 각오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야.”

어느 틈엔가 진충기 교수가 곁에 앉아 있었다.

“맞습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일이 스스로에게 가장 적극적인 행동을 불러오겠지만 주변 사람들에겐 결국 실망만 안기게 됩니다. 다 함께 가자는 생각이 아니면 이런 일을 제대로 추진할 수 없겠죠.”

손일석이 돌연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다 좋은데 더 열심히 일하라는 말이잖아요? 우리 김 부원장 옆에 있으면 편할 날이 없다니까요. 응급실 일복과 행정 쪽 일복 중 하나만 가지면 안 될까?”

“나도 그러고 싶어.”

“말로만 그러지 말고 강한 의지를 가져 봐. 만석이 오자마자 얼굴 죽어 가는 거 보면서 느낀 게 없어? 애초에 친구 먹은 죄를 범한 나는 그렇다고 쳐도, 처형은 어쩔 거야?”

김지훈이 눈을 크게 떴다.

경인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에 산재한 간호과를 담당해야 한다. 간 이식 수술을 담당하면서 강의도 준비해야 하고, 엄마로서 희연이를 반드시 챙겨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정말 엄청난 짐을 안겼다.

술이 번쩍 깰 지경이었다.

‘어후! 다른 건 못 도와줘도 집안일만은 덜어 주어야 하는데 큰일 났네.’

자리가 끝날 때까지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부가 힘을 합쳐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말은 그럴듯한데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해야 슬기로운 것일까?

오리무중이었다.

문득 이준영 교수까지 생각났다.

‘우리는 어디에 속해야 하지?’

반드시 상의해 결정할 일이 있었지만 어느 쪽이 순리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스승이 간담췌 최고의 대가인 탓인지도 몰랐다.

‘고민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네.’

토요일 어둠이 짙어지도록 김지훈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산 하나를 넘었는데 어떤 면에서는 더 높고 험한 산에 가로막힌 형국이었다.

그날 밤.

김지훈이 회의 결과를 알리며 고경아와 진지하게 상의했다. 심각한 얘기에도 불구하고 준비 위원장이 됐다는 소리에 학회장은 따 놓은 당상이라며 기뻐했다.

“마냥 좋아할 때가 아니에요.”

“기쁜 일은 그냥 기쁜 일로 받아들이면 돼요. 희연이가 걱정이긴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퇴근해서도 가능한데 뭐가 문제예요? 지금까지 해 온 대로 하면 돼요.”

결혼한 지 꽤 오래됐건만 장가 잘 갔다는 생각만 들었다. 고경아가 엄청난 힘이 되듯 김지훈도 그런 남편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도 최선을 다할게요.”

고경아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지훈 씨는 걱정이 많지만 경기복 과장님이 우리를 도와준 꼴이네요. 고작 한 달이잖아요. 몇 달 동안 준비해야 했으면 하는 일 없이 바쁘기만 했을 거예요. 희연이도 덩달아 힘들었을 거고요.”

부창부수!

긍정적인 태도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김지훈이건만 고경아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상황이었다. 역시 엄마이자 마님의 힘은 위대했다.

김지훈이 고경아를 꼭 안았다.

늑대의 거친 포효가 울리려는 순간 매직이라는 벽에 턱 가로막혔다. 허구한 날 중 오늘이 웬 말이냐며, 타이밍 못 맞춘다고 실컷 욕만 먹었다.

우워워워워!

자자.

일요일 하루만이라도 희연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힘을 비축하라는 하늘의 뜻이었다. 가물가물 비몽사몽 중에도 아빠로서 강한 의지를 다졌지만, 어린 딸에게 제법 스트레스를 주는 학원 숙제는 다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빠도, 딸도 숙제 못했다.

대신 열심히 청소했다.

밥 한 끼 차리는 일 우습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기에 약속대로 아점은 볶음밥으로 때우고, 저녁은 겸사겸사 손일석 식구와 함께 외식을 했다.

누나라고 갑자기 의젓해진 희연이,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정훈이, 서로에 대한 정을 잃지 않는 식구들 모두 김지훈에겐 큰 힘이었다.

“형부, 부원장님 되시더니 학회장까지 하시네요. 우리 남편은 언제 챙겨 주실 거예요.”

‘준비 위원장인데…….’

“어허! 누가 누굴 챙긴다는 거야? 여보, 양보는 미덕이고, 자리는 세상의 전부가 아니야. 때 되면 다 내 손에 모이게 돼 있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

“우리 남편 믿어요. 형부, 월급도 많아지겠네요. 오늘 저녁은 형부가 사세요.”

손일석이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도 환하게 웃었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학회장은 명예직이고, 부원장이 됐다고 해서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월급이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쓸 돈은 충분했고, 이런 자리에서 돈 아낀다면 세상 살아갈 의미가 없을 것이다.

“처제,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여보! 여기 비싸요.”

“그러니까 더 시켜!”

즐거운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밥 한 끼로 너무 큰 행복을 얻었다.

평범하기에 더욱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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