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03화 (1,203/1,329)

9화

여덟 개 병원 대표가 모두 모였다.

병원마다 두세 명 이상 참석해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었다. 그만큼 초미의 관심사이자 뜨거운 열기를 가졌다는 말이었다.

서울까지 몇 시간씩 걸리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이들에게 부끄러운 상황이 연출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제법 피곤할 텐데 아는 얼굴을 볼 때마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활기를 잃지 않았다.

특히 전문 병원이 많은 인사를 받았다.

“김지훈 선생님? 목소리만 듣다가 직접 보니 생각보다 훨씬 젊으시네요. 아! 손일석 선생님과 진충기 선생님이시죠? 반갑습니다.”

다들 다소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직접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주말에도 모이기 힘든 상황인데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라도 얼굴을 보니 좋습니다.”

전원 일반외과 전문의였다.

의외로 아는 얼굴이 많지 않았다.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인 외과 학회 때 본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참가 인원만 수백 명이 넘는 데다 근무 지역이 달라 평소 교류하기 쉽지 않은 탓이었다.

당시 관심 분야까지 달랐다면 초면이라 해도 무방했다. 물론 젊은 시절부터 두각을 보인 김지훈이나 진충기 교수를 아는 사람이 적지 않을 가능성이 높긴 했다.

더욱이 대부분 선배들이었다.

목적을 떠나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를 상당히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같은 생각인지 이미 안면이 있는 나이 지긋한 선배들까지 예의를 잃지 않았다.

공식적인 자리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간 이식 수술 케이스가 무척 많다고 들었습니다. 지역이나 병원에 따른 차이도 있겠지만 비법이라도 있습니까? 노하우가 있으면 서로 공유합시다.”

“신설 병원이 그렇게 많은 수술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교수님들 열정과 실력이 대단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허허! 열정을 뛰어넘은 실력이 있기 때문이겠죠. 이준영 선생님이 병원을 옮기실 때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전문 병원을 진심으로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가슴을 폈다.

환자들에게 듣는 소리 이상으로 뿌듯한 말이었다. 규모가 큰 병원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의사들까지 인정한다면 간 이식에 관한 한 국내 굴지의 병원이 됐다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선생님들에게 직접 들으니까 기분이 묘하네.’

손일석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규모로 볼 때 누가 보아도 비교가 되지 않는 H 병원에서 전문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그 이상의 성과를 낸 진충기 교수의 마음은 남다를 것이다.

물론 부산 병원과 H 병원도 주목을 받았다.

굳이 순위를 따지자면 전문 병원, 부산 병원, H 병원 순이었다. 수술 시행 건수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역시 써전은 수술로 말하는 법이었다.

긍정적 요인이건만 김지훈이 얼굴을 굳혔다.

서울과 지방 병원 간의 묘한 알력 같은 것이 느껴졌다. 소속감 혹은 연대감일 수도 있지만 끼리끼리 만나는 모습 자체가 바람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외과 학회 때도 은연중 느낀 문제인데 피해 가기 어려운 일인가? 서울 지역에 쟁쟁한 병원이 워낙 많으니까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현실로 인정해야 할 일이었다. 원칙과 기준에 따라 행동한다면 행여 있을지 모를 지역 간의 갈등도 원만하게 해결될 것이다.

회의가 시작됐다.

‘우리 병원이 인정받는 것과 오늘 회의는 별개 문제다. 어떤 학회도 택하지 않는 구성 원칙을 주장하는 만큼 감정에 휩쓸리면 안 된다.’

경기복 과장의 속내가 어떻든 옳고 그름을 논할 일이 아니었다. 각자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있는 이상 사적 욕심이 개입됐다고 해도 상관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세상 어느 누구도 이득이 전혀 없는 일에 발 벗고 나서지 않을 것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김지훈과 전문 병원도 다를 바가 없었다. 타인의 눈에 종합 병원 건립과 개인적인 부원장 도전이 얼마나 큰 차이가 날지 모를 일이었다.

생각을 바꾼 덕에 마음이 편해졌다.

은근한 긴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스트레스로 작용하지도 않았다. 다만 경기복 과장을 보는 진충기 교수의 눈빛이 좋지는 않았다.

경기복 과장이 주재를 시작했다.

“논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우리 병원 입장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존의 다른 학회와 똑같은 구성과 운영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이런 자리를 한 번 만들기도 힘든데 상시적으로 운영해야 할 학회에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은 분야가 개입된다면 누가 핵심이 되겠습니까? 외과 학회는 외과가 운영하는 것이 맞고, 무엇보다 순수 학술 단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공의 시절부터 익숙해진 학회 구조를 바꾼다는 일이 탐탁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수술 방식 하나의 변화에도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는 외과 의사의 성향상 무리가 아니었다.

전문 병원의 시간이 왔다.

김지훈이 대표로 주장을 펼쳤다.

“간 이식은 다른 수술과 달리 관련된 모든 분야가 유기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시행하기 어려운 수술입니다. 아마 많은 선생님들께서 간호과와 코디네이터와 같은 행정 분야의 참여를 우려하실 겁니다. 이들의 역할이 과연 우리 의사들만 못할까요?”

열정적으로 의견을 피력했다.

전문 간호사 육성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반드시 공감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동시에 이를 뒷받침해야 하는 일반외과 의사의 위치와 역할 역시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불과 며칠 전 경험한 불법 장기 매매가 우려되는 상황을 사전에 방지한 일을 언급했다. 만일 막지 못했다면 야기됐을 각종 문제들을 거론하며 중요하지 않은 분야가 없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머릿속 상상이 아니라 현장에서 생생하게 경험하고 느낀 결과물이었다. 문제를 접할 때마다 고민해 온 매 순간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두 개의 의견이 모두 개진됐다.

활발한 논의가 이뤄졌다.

김지훈 못지않은 인지도를 가진 진충기 교수가 나서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H 병원의 의견을, 누군가는 전문 병원의 의견을 옹호하며 지지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김지훈의 얼굴이 나쁘지 않았다.

“김 교수, 안 불안해?”

“난 오히려 의견이 분분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변화보다 안정적인 면을 더 선호하는 사람들이 우리 의사잖아. 사실 처음에는 조금 불안했는데 지금은 점점 더 편해진다.”

“이 상황에서도 여유를 부려? 경기복 과장이 말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는 양반들이 안 보이시나? 부원장 되더니 김지훈 정말 많이 변했네.”

“변하긴. 진상건은 반드시 쫓아내야 할 적이었지만 경기복 과장님은 함께 가야 할 사람이야. 솔직히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람이 학회장이 된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대?”

“종합 병원이 무너지겠지.”

김지훈이 슬쩍 째려보았다.

“안 될 일이면 학회장이 돼도 안 돼.”

“그걸 누가 알겠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비관적이야? 손일석이야말로 변한 거 아니야?”

“변할 때가 되면 변해야지.”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일석도 논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부산 병원 대표들까지 지지 의사를 표했지만 팽팽한 대립은 끝나지 않았다.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투표로 결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각 병원 대표만 따로 모였다.

모두 여덟 명이었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긍정적인 생각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탓인지 치열하게 이어진 논의 중에도 편안했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중요한 투표 현장에 있었지만 직접 표를 행사하는 일이 처음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투표 시작하겠습니다. H 병원 제안이 일 안이고, 전문 병원 제안이 이 안입니다. 착오 없도록 확실하게 확인한 후 표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번이라는 것도 신경 쓰이네. 그래서 선거 때마다 기호 몇 번이냐를 두고 싸우겠지.’

투표가 시작됐다.

부산 병원 대표가 힐끗 눈길을 주며 웃었다.

실상 H 병원을 넘어선 가장 강력한 라이벌 병원이었다. 전화는 자주 했지만 처음 본 데다 견제를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무척 호의적이라는 사실에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하나둘 투표를 끝냈다.

결과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김지훈이 마른침을 삼켰다.

경기복 과장이 한 장 한 장 결과를 발표하며 용지를 펴 보였다. 단지 여덟 장의 용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이렇게 길 줄은 몰랐다.

“H 병원 한 표.”

“전문 병원 한 표.”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팽팽했다.

학회장은 누가 돼도 상관없지만 구성 원칙만은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가장 이상적인 제안이라 믿고 있는 탓인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과연 김지훈의 진심일까?

사실 선거의 본질은 이기고 지는 것이다.

단 한 표로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냉혹한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회장 선거도 최선을 다하는 판인데 막상 선거에 들어가면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긴 했다.

‘어후! 생각 이상으로 떨리네. 이런 상황에서 엉뚱한 생각을 하면 안 돼. 학회장 선거는 다음 일이다.’

마지막 두 장이 남았다.

현재까지 결과는 동수였다.

어느 쪽이든 나머지 두 표를 모두 얻어야 제안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김지훈과 경기복 과장 모두 남은 용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부산 병원 표는 이미 개봉됐나? 한 표씩 가져가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제길! 반드시 이겨야 해. 오늘 지면 학회장 선거에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어. 오히려 불리해진다.’

제안이 채택된 병원이 학회 설립의 실무를 맡게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학회장이 될 만한 사람이 있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복 과장이 불안을 감추고 또 다른 경우의 수를 고민했다. 서울 대표 네 명과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지역 대표 한 명을 믿었지만 이탈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수로 끝나면 같은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하는데 누구를 공략해야 하지? 설마 서울 지역에서 내 제안을 반대하는 표가 나오지는 않았겠지?’

전문 병원을 제치고 주도권을 완벽하게 가져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뼈아팠다. 어쩌면 진충기 교수의 존재 때문에 김지훈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 이런 상황을 불러온지도 몰랐다.

어쨌든 때늦은 고민이었다.

결과 역시 아직 나오지 않았다.

“개표 진행하겠습니다.”

남은 두 표의 결정이 확인됐다.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가 초조한 눈으로 투표 결과를 기다리면서도 다른 병원 관계자들과의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웃음소리가 묘한 이질감을 불러왔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운명을 건 투표가 아니었다.

솔직히 초조한 사람은 학회장까지 노리고 있는 전문 병원과 H 병원 의사들뿐이었다. 남다른 의미가 담겨 있지만 다른 병원 소속 의사들에게는 단지 학회 형식과 운영 문제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주된 화제가 이를 말해 주고 있었다.

“저도 같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혈관 기형 잘못 만나면 결과를 예측하기 정말 힘들더군요.”

“일단 합병증이 발생하면 정말 대처하기 힘든 수술이에요. 의사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장난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은지 충분한 논의가 필요할 일입니다.”

손일석이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려 했다.

“진충기 선생님 경험과 다르긴 하지만 행정 분야를 강조하는 이유 중 하나가 어쩌면 브로커들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끼어들 여지를 만들면 책임은 고스란히 의사가 지어야 하는데 애초에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브로커가 문제이긴 합니다만 하루 이틀 일인가요? 그보다 수술 건수가 많아질수록 합병증 발생이 늘어날 텐데 예방과 방지에 주력해야지요.”

전문 병원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병원들조차 주된 관심은 수술과 의사였다. 당연한 일인 반면 오늘의 주제에서 다소 비껴난 것도 사실이었다.

‘확실히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진 않네. 이렇게 된 이상 분위기를 끌고 나가는 편이 학회장 선거에서 유리하겠어.’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가 풍부한 경험을 공유했다. 부산 병원은 물론 투표를 두고 경쟁하는 H 병원 역시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어느새 시간이 꽤 지났다.

‘근데 왜 안 나오지? 투표 용지를 하나하나 씹어 먹기라도 하는 거야?’

그때 투표장 문이 열렸다.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경기복 과장이 보였다.

김지훈이 뒤따라 나왔다.

둘 다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아 얼굴만 보아서는 결과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제안이 채택됐다고 해서 상대 앞에서 환호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손일석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김 교수, 어떻게 됐어?”

김지훈이 손일석의 어깨를 잡았다.

의미를 알기 힘든 미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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