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수술 취소가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백이면 백 환자에게 불가피한 일이 생긴 경우였지, 이번처럼 보호자도 아닌 사람이 취소를 거론한 적은 없었다. 더구나 공여자까지 결정돼도 상당 기간 기다려야 하는 간 이식 수술이었다.
김지훈이 등을 곧추세웠다.
“이유가 뭡니까?”
“아시다시피 간 이식이 결정된 전후 모두 서류 검증을 하고 있습니다. 미비한 점을 보완해 환자에게 불리한 부분이 없도록 조치하고, 개선할 점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불법적인 부분도 찾아내야 하고요.”
“서류에 문제라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공여자가 친인척 관계가 아닌 사람으로 밝혀졌습니다. 허위 사실을 기재한 것도 문제지만, 조사 도중 장기 매매 의심 정황이 포착돼 일단 수술을 취소하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김지훈이 눈만 멀뚱거렸다.
진충기 교수도 당황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장기 매매가 확실합니까?”
“저희는 장기 브로커가 개입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미 경찰에 의뢰해 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간은 물론 각막, 신장 등 이식을 필요로 하는 환자는 많지만 공여자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장기 매매는 그 자체로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돈으로 장기를 사고파는 행위의 도덕적 결함은 물론, 근절하지 못할 시 벌어질 수 있는 사회적 폐해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었다.
사채를 감당하지 못해 장기 포기 각서까지 써야 하는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횡행할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을 비롯해 사회적 약자들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의사는 장기 매매 여부를 사전에 인지할 방법이나 능력이 없다. 때문에 장기 기증에 정부 조직이 관여해 관리하는 것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수술 전에 알아내서 다행이지, 수술까지 하고 난 후였으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일이다.’
“아니길 바라지만 확실하게 조사해 조치를 취해 주시길 바랍니다. 환자에게 통보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예약된 진료와 수술만 취소해 주시면 됩니다.”
공무와 관련된 행정 업무는 보통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다. 병원 직원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을 빼앗겼을 텐데 다행이었다.
때문인지 의아함이 앞섰다.
‘일반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공문만 보내며 일을 처리하지 않나? 직접 찾아와 설명하는 이유라도 있나? 게다가 토요일이잖아.’
“실례지만 직접 방문하신 이유가 또 있습니까?”
코디네이터가 웃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를 대하는 전문 병원 분위기가 무척 좋고, 의료진도 아닌데 간 이식 학회 구성원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저도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식이라는 것이 일반 수술 진행 과정과 상당히 다르지 않습니까? 코디네이터분들도 꼭 필요한 분들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입니다.”
“많은 병원이 그렇게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사실 서류 작업을 너무 깐깐하게 해 수술이 지연된다고 불만을 가지는 선생님들도 있거든요.”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가 급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어쨌든 이렇게 직접 말씀해 주시니 마음도 편하고, 덕분에 수고도 한결 덜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지만 좋은 분위기로 자리가 끝났다. 잠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김지훈의 눈이 돌연 반짝였다.
“진충기 선생님, 정말 다행이죠?”
“천만다행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수술했다가 일이 벌어졌으면 한동안 꽤나 시끄러웠을 겁니다. 병원 평판 떨어지는 것은 둘째 치고, 모르긴 몰라도 신경 쓰여서 진료에까지 영향을 받았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디까지 학회 구성원이 돼야 하는지 다시금 확신을 갖게 됐고요.”
“그러네요. 코디네이터와 관계가 나쁘거나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면 의사들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겠습니다.”
심각하다면 한없이 심각한 일이었고, 사전에 예방했다는 측면까지 생각하면 좋아하며 끝낼 일이 아니었다.
“진충기 선생님, 오늘 일을 다른 병원과 공유하는 것이 좋겠죠? 같은 경험을 가진 병원이 있을 수도 있고요.”
“나도 막 그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이 일치했다.
바로 손일석에게 연락해 알렸다.
학회 설립과 관련된 병원과 연락할 때 전문 병원의 원칙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사례로 이용한다면 설득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다.
“빨리 퇴근하죠.”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응급실이었다.
진충기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원장 되신 후에 한 달에 두 번 평일 당직만 서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부원장으로 정식 취임한 후 일종의 특혜를 받았다. 이경석이 과장 직권으로 당직 면제를 결정했고, 모든 의국원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인력이 부족한 외과 사정에 김지훈이 평일 당직을 자청해 절충점을 찾은 결과였다.
김지훈이 다소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진충기 교수도 피하지 못한 주말 당직을 면제받았다는 사실에 미안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스케줄이 맞지 않아 마지막 주말 당직까지 하기로 했는데 하필이면 그게 오늘이네요. 저도 틈틈이 연락할 테니 주말에 수고해 주십시오.”
후다닥!
뭐가 그리 급한지 김지훈이 복도로 사라졌다.
진충기 교수가 웃고 말았다.
부원장 정도 되면 응당 받아야 할 대우였다. 대부분의 경우 동료의 스케줄이 어찌 됐든 하루라도 빨리 당직에서 벗어나는데 김지훈은 확실히 달랐다.
‘작은 일이지만 결코 작은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네요. 이런 마음 쭉 유지해 준다면 함께 일하는 어떤 동료도 결코 힘들지 않을 겁니다.’
좋은 동료가 좋은 직장을 만드는 모양이었다.
응급실에 들어선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오만석 선생, 여기 왜 있어?”
“당직 서려고요.”
“월요일부터 근무인데 당직을 왜 서?”
“병원 분위기에 적응도 해야 하고, 당장 공여자 수술을 들어가야 하는데 손을 미리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병원 레벨이 있지 부원장님이 당직을 서는 게 말이 됩니까? 주말은 제게 맡기십시오. 설마 못 믿는 것은 아니시죠?”
열의는 좋지만 당직을 넘기는 일이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왠지 부원장이라고 유세를 떠는 것 같은 기분도 드는 참이었다.
“괜찮아. 월요일부터 쉴 틈도 별로 없을 텐데 주말에 쉬어. 아예 이사 온다며? 집 정리도 해야 하잖아.”
“이미 다 끝냈습니다. 과장님께 허락받았고, 보호자에게도 제가 수술한다고 다 말했는데 이제 와 어떻게 무릅니까?”
덩치 큰 놈이 괄괄한 목소리로 앞을 떡 가로막고 있으면 웬만한 사람은 깨갱 꼬리를 말기 마련이었다. 지금 김지훈이 딱 그 짝이었다.
응급실 간호사까지 오만석을 응원했다.
멈추지 않는 일복에 질릴 대로 질렸을 것이다.
“부원장님, 우리 힘들게 하지 말고 들어가세요. 오만석 선생님, 모찬우 선생님과 응급실 잘 지킬게요.”
“왜들 이래요? 무슨 환자인지 알고는 가자.”
“딱 제 전공입니다. 교통사고로 비장이 파열된 것으로 보이는데 운이 좋은지 바이탈이 괜찮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라파로로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비장 파열은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외상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외상 환자 경험이 많은 오만석의 판단이었고, 모찬우가 보고 있다면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때마침 수술 준비가 모두 끝났다.
환자를 옮기자 보호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오만석을 에워싸고는 연신 잘 부탁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른 문제가 없다면 한두 시간 내에 끝납니다. 대기실에 계시면 수술 마치는 대로 설명드리겠습니다.”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자신감도 여전하네.’
걱정 가득한 보호자를 뒤로하고 수술 방으로 들어가는 오만석의 뒤를 슬며시 따라 들어가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술하시려고요?”
“참관만 할게.”
“설마?”
“원칙적으로 내가 당직이잖아.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책임감 뭐 그런 것 때문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수술에 집중해.”
곧 수술이 시작됐다.
오만석의 커다란 손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비장이 절제되고, 어느새 배를 닫기 시작했다.
목을 길게 빼 들고 수술을 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기울인 오만석의 노력과 이혁민 교수의 정성이 눈에 들어왔다.
‘난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지 모르겠네. 이런 써전을 단기간에 길러 내는 능력을 빨리 습득해야 하는데 언제나 가능할까?’
확실히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았다.
그때 마취과 간호사가 소리 죽여 달려왔다.
“오만석 선생님, 응급실에 환자 있대요.”
전문 병원에서 시행하는 첫 수술이었다. 처음부터 마무리까지 하고 보호자에게 설명의 의무를 다하는 것까지 집도의가 할 일이었다.
김지훈이 눈짓을 하고는 응급실로 향했다.
부원장이 되기 전부터 당직이 줄어들며 쌓이다 못해 응축된 일복이 찬란하게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간호사들의 눈매가 점점 매서워졌다.
오만석과 모찬우가 응급실과 수술실을 시계추인 양 오갔다. 김지훈의 배려하에 초기 처치는 면했지만 할 일이 아주 조금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헉헉헉!
결국 오만석이 김지훈의 등을 떠밀었다.
“선생님, 응급실에 들어올 때부터 우리가 바로 볼 테니까 이만 퇴근하시죠.”
“집에 다 얘기했는데.”
“왜 이러십니까? 당직 제가 선다고 하잖아요. 그냥 신경 끊으시고 들어가세요. 이러다 모찬우 쓰러지겠습니다.”
남 말 할 때가 아니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온몸이 땀인 데다 수술실에서 환자 복부를 씻어 낸 물까지 튀어 흠뻑 젖어 있었다. 입에서 단내도 나는 것 같았다.
김지훈이 마지못해 퇴근했다.
“자식, 감히 부원장인 날 힘으로 밀어붙여? 전공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많이 컸네.”
투덜투덜 집으로 향했다.
거짓말처럼 환자가 사라졌다.
그날 밤, 푹 잔 오만석과 모찬우가 다음 날 아침 소스라치게 놀랐다. 김지훈이 변형 휘플 환자를 보러 온 김에 응급실에 들른 것이다.
왜애애애앵!
아침부터 환자가 밀어닥쳤다.
손이 부족해 김지훈이 돌아갈 상황이 아니었다.
간담췌 분야 고수 한 명을 포함한 전문의 세 명이 치료를 담당해 환자들에게는 더없이 유리했다. 하지만 의료진에게는 근래 없었던 참사였다.
누구보다 투철한 책임감을 가진 김지훈이었다. 사비를 털어 응급실, 수술 방은 물론 방사선과에도 간식을 푸짐하게 대령했다.
“맛있게 드세요.”
‘수술을 안 해서 그런지 별로 피곤하지 않네. 만석이도, 찬우도 수술 참 잘하네. 다들 수술 못해서 안달인데 다음 당직 때는 누굴 부를까?’
그러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고경아가 당직인데도 일찍 들어왔다고 무척 좋아했다. 월요일에 출근하면 적나라하게 드러날 주말 당직의 진실을 알고 난 후에도 웃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김지훈의 일복에 자신의 일복을 더해 위력적인 폭탄을 제대로 맞은 오만석의 까매진 눈가와 함께 한 주가 시작됐다.
누구도 김지훈을 원망하고 항의할 틈이 없었다.
월요일 내내 간 이식 수술을 했다.
화요일은 진료 틈틈이 학회 설립 건으로 전화를 붙들고 살아 웬만한 일로는 말을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수요일 역시 수술 방에서 살았다.
목요일은 더 시간이 없었다.
화요일의 재판인 날인 데다 초미의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조경태 환자에게 무척 중요한 날이었다. 수술 후 일주일이 지났고, 가스가 방출된 지 이틀째였다.
“서도훈 선생, 드레인 깨끗한데 코 줄 빼고, 물 시작할 수 있겠지? 어떻게 생각해?”
“절개창 아무는 속도도 좋고, 전체적으로 무난한 회복을 보이는 이상 미룰 이유가 있을까요?”
“좋아. 빼자.”
조경태 환자를 괴롭히던 마지막 장치까지 모두 제거됐다.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운동을 하며 배고픔까지 느끼는 모습에 다소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제 주말이 지나면 위와 유문을 보존하는 첫 변형 휘플의 결과를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았어. 이대로만 가자.’
금요일 저녁.
김지훈이 손일석, 진충기 교수와 함께 다른 병원과 접촉한 결과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예상대로 경기복 과장은 서울 지역 병원에 집중했고, 대표자 선출도 비밀리에 진행했다. 물론 지방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손 교수, 어떻게 될 것 같아?”
“우리 제안에 호의적인 병원이 많았지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잖아. 속마음을 누가 알겠어?”
“의사만의 벽을 치려는 사람들이 더 많을까?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충기 교수가 깍지를 꼈다.
“직접 대면하지 못한 병원이 더 많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수술이 취소된 환자 사례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이제 하루만 지나면 학회 설립의 기본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서울 지역 대표 네 명과 지방 병원 대표 네 명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부산 병원만 확실한 동의 의사를 표명했다. 충청 지역과 호남 지역 병원은 우리 제안에 기운 것 같지만 확신할 수 없고, 역시 서울이 문제구나.’
안달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도 최대한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설립부터 학회장 선출 문제까지 편안하게 대처하죠.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개선해 나갈 수 있잖아요. 다들 퇴근하시고, 내일 점심때 같이 출발하죠.”
손일석이 쓰윽 엄지를 치켜들었다.
“야! 부원장 되더니 여유가 넘치네. 전과는 표정이 달라요. 초조해하면서 쫓기듯 일하는 모습보다 훨씬 보기 좋다.”
그러고 보니 김지훈의 얼굴이 정말 편안해 보였다. 이 정도 일로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다는 때깔에 잘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다음 날 오후.
전문 병원 대표 세 명이 H 병원으로 향했다.
경인 지역 대표로 참석하는 김지훈의 어깨에 가장 큰 짐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