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주말 집담회가 시작됐다.
매주 토요일마다 수술 때보다 더 심한 긴장에 휩싸이는 시간이건만 오늘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물론 위와 유문을 보존하는 변형 휘플을 넘어갈 리 없었다. 서도훈과 한수영이 송재덕 교수가 떠난 이후 더욱 맹위를 떨치는 화염방사기에 한바탕 몸부림을 쳤다.
김지훈이 축축한 목덜미를 닦았다.
‘스승님 공력은 정말 끝이 안 보이네.’
“김 교수, 환자는 어때?”
“이제 수술 후 삼 일째지만 현재까지 별다른 문제 없습니다. 원하는 결과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학회 보고는?”
“다섯 례 정도 더 수술을 한 후 정리해 발표하겠습니다. 주관은 서도훈 선생과 한수영 선생에게 맡기겠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을 두텁게 뒤덮은 재를 털어 내던 서도훈과 한수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학회 발표를 주관하라는 말은 곧 간담췌 최고 고수 두 명이 자신들에게 변형 휘플을 전적으로 맡겼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끝이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가 눈길을 돌렸다.
“서도훈 선생, 휘플 라파로 계획은?”
“변형 휘플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진 후 시행할 생각입니다. 췌장과 담도 쪽 라파로는 김지훈 선생님과 철저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좋아. 이경석 과장, 다음으로 넘어가자.”
조마조마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을 바라보던 의국원들이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막내로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고경철은 급격히 풀리는 긴장에 아예 축 늘어졌다.
‘이렇게 평화로운 주말 집담회가 도대체 얼마 만이지? 기억도 안 나네.’
이경석이 웃으며 앞으로 나왔다.
“이것으로 토론을 마치고, 반가운 얼굴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만석 선생이 다음 주부터 간 이식 공여와 위장관 파트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모두 환영의 박수 주세요. 오만석 선생, 인사해야지?”
짝짝짝짝짝!
맨 뒷자리에서 서울 병원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주말 집담회를 감상한 오만석이 쓰윽 일어났다. 어째 전보다 더 덩치가 좋아졌는지 이준영 교수보다 훨씬 커 보였다.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터트렸다.
‘에후! 나이 들수록 키가 줄어든다더니 스승님도 나이가 드신 모양이네. 하지만 카리스마는 여전히 짱짱하시니까 상관없지, 뭐.’
간담췌 학회장만 유지한 채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환자에게만 집중하는 스승이었다. 언뜻 존재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눈빛과 손짓 하나로 좌중을 압도하는 힘은 여전했다.
제자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잠시 스승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귀를 울리는 오만석의 목소리에 눈길을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오만석입니다. 응급의학과를 기웃거리다 뒤늦게 이혁민 선생님께 위장관 수술을 배웠습니다. 간 이식 공여자 수술은 한 번도 하지 못해 처음부터 배운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가르쳐 주십시오. 아! 혹시 응급실에 문제 생기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힘쓰는 일은 지금도 자신 있습니다.”
일반외과 역사상 가장 큰 주먹을 척 들어 올렸다.
웃음이 터졌다.
새 얼굴이 나타나면 기존 관계에도 미묘한 변화를 초래하기 마련이었다. 때론 부정적인 영향을 보일 수도 있지만 오만석의 등장은 분명 전문 병원에 긍정적이었고, 새로운 활력을 일으키고도 남았다.
“오만석 선생, 당분간 이준영 선생님, 안호석 선생과 수술 함께하면 됩니다. 잘 알겠지만 여력이 거의 없는 상황이니까, 힘들더라도 빨리 자신의 자리를 찾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김지훈이 손을 들었다.
“저도 있습니다.”
“우리 김지훈 선생님까지 나서 주신다면 정말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겠군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만석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이준영과 리틀 이준영의 합공!
점점 매서워진다는 안호석!
죽었다.
반면 함께 전공의 시절을 보낸 이혁원, 나종진, 강병옥, 송진우는 누구보다 좋아 죽었다. 새로운 경쟁자가 아니라 이미 한 명의 동료였다.
이경석이 다소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간 이식 학회 설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김지훈 선생님, 손일석 선생님, 진충기 선생님께서 바쁜 와중에도 앞장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중 상당수가 정회원이 되는 만큼 아낌없는 성원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이제 첫발을 내디딘 데다 결정된 사항도 거의 없어 이 자리에서 논의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서도진이 손을 번쩍 들며 돌직구를 날렸다.
“김지훈 선생님, 학회장에 도전한다는 소리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김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민 부원장! 도대체 어디까지 말하고 다닌 거야? 자신에게는 득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텐데 종합 병원에 목을 걸었다고 좋아해야 하나?’
이경석까지 가세했다.
“성급한 말입니다만, 초대 학회장이 우리 병원에서 나온다면 굉장한 영광이겠죠. 병원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김지훈 선생님,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다들 김지훈의 반응이 어떨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과장을 할 때는 물론 부원장이 될 때도 상당히 신중하게 대처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여겼다.
이준영 교수, 손일석, 진충기 교수와 눈빛을 교환한 김지훈이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편안한 미소까지 머금어 다들 의아해했다.
“사실입니다. 우리 병원이 간 이식 대표 병원 중 하나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고, 학회 설립에 주요 역할을 하는 이상 어느 병원보다 학회장 역할을 잘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웬일이시지?’
서도진이 또 돌직구를 날렸다.
“만만치 않은 상대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우리가 도울 일은 없습니까?”
김지훈이 티 나게 웃고 말았다.
결코 민정호에게 휘둘릴 서도진이 아니었다. 표현 방식이 다를 뿐 성격까지 비슷한 면이 많아 아마도 죽이 맞았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민 부원장은 걱정하는 척 얘기했을 테고, 도진이는 모르는 척 받아들였겠지. 그래. 자신이 아니라 병원을 위한 일이라는 사실 나도 동의한다.’
“현재로서는 없습니다만,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학회장 후보로 나선 분은 다른 병원에서 근무하는 경쟁자일 뿐입니다. 공정하게 경쟁해 후회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내겠습니다.”
내친김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생각에 따라 연관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말입니다만, 진상건 같은 인간을 이겨 내고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더 이상 우리를 힘들게 하는 내부의 적은 없지만 언제 또 같은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때 스스로를 도우십시오. 결코 물러서지 말고 불의에 맞서 당당하게 싸워 주시길 바랍니다. 의사의 본분을 절대 잃지 않아야 하지만 허울에 갇혀 외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모두들 김지훈의 분위기에 끌려들었다.
“학회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방해를 하든 중요한 사실은 내가, 우리가 정말 학회장 자격이 있는지입니다. 우리 중에 자격이 있는 분이 정말 많다고 생각합니다. 학회장이 아니라 탄탄하고 건실한 학회를 만들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믿고 앞으로 나가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주시는 것이 바로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결국 도전하시겠다는 말씀이죠?”
김지훈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도전하겠습니다.”
단호한 말에 여기저기에서 감탄 비슷한 소리가 터졌다. 그동안 보였던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도 나무랄 데 없었지만, 자신감 넘치는 태도 역시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단, 손일석 선생님, 진충기 선생님과 먼저 경쟁을 하고 싶습니다.”
손일석이 화들짝 놀랐다.
“김지훈 선생, 우리는 왜?”
“무엇보다 우리의 의견이 중요합니다. 개개인이 처한 상황도 고려해야 하고요. 솔직히 안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밖에서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제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더욱더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할 생각입니다.”
졸지에 후보가 셋으로 늘었다.
이준영 교수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김지훈, 너답다.’
제자는 자신을 가두었던 꺼풀 하나를 벗어 던졌다. 응당 갖춰야 할 자신감을 가졌고, 동료와 함께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은 결코 버리지 않았다.
로비를 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실력과 인품으로 경쟁하라는 의미였다. 이로 말미암아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 역시 한 단계 도약할 것이다.
마땅히 호응해야 했다.
“김지훈 선생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학회장 선출 전 적절한 시점에 우리 병원 자체적으로 후보를 선출하는 것이 좋겠다.”
“알겠습니다. 두 분 의견에 이의 없는 것으로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이경석이 과장으로서 못을 박았다.
주말 집담회가 끝났다.
이준영 교수가 한마디 던졌다.
“잘 생각했고, 잘했다.”
“이제는 피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누군가 반드시 맡아야 하는 일이라면 최선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경기복 과장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것 같아?”
“잘 아십니까?”
“학회 일 때문에 개인적으로 두세 번 만난 적이 있어. 의사로서 욕심도 제법 많지만 그 이상을 바라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무엇을 원하고, 어떤 목표를 갖든 상관하지 않지만 의사 본연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이준영 교수였다.
제법이라는 말을 했다.
호의적일 수가 없었다.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상관없습니다. 학회장의 자격을 평가하는 기준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테지만, 결국 회원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뽑히지 않겠습니까? 전 우리가 제안한 원칙과 구성이 통과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 결정한다고?”
“촉박하지만 열심히 뛰어 보겠습니다.”
“믿는다.”
무슨 이유인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다가왔다. 사실 부원장이 될 때도 별다른 말이 없었던 스승이었다. 그런데 학회장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도 모자라 제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석이나 진충기 선생님도 자격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부원장 일까지 두 가지 일을 감당하기도 힘들고요.”
“의국원들의 의견을 모으는 일인 이상 양보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경쟁하는 것이 맞아. 그것이 서로가 지켜야 할 예의다.”
“부원장 때와는 다르게 보시네요.”
“다르지 않아. 의사라고 모두 같은 길을 갈 수는 없어. 네가 꼭 가야 할 길을 가는 중이라고 생각할 뿐이야.”
반드시 가야 할 길이 무엇일까?
의사에게 대가 이상의 명예가 있을까?
문득 큰 스승님이 떠올랐다.
일 세대 일반외과를 이끌며 학문적으로는 물론 행정적으로 외과를 정비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어쩌면 그런 공적이 겹쳐 지금까지 큰 존경을 받고 있는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내 자신과 주변만이 아니라 외과 전체를 생각하라는 말씀인가? 대가를 목표로 살아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갈수록 어렵네.’
평생 고민해야 할 일이었다.
회진을 끝낸 후 책상을 정리하며 퇴근을 준비하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민정호가 근무 이래 처음으로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했다.
‘초안이라고 해도 종합 병원 건립안이 쉽게 나올 리 없겠지. 민 부원장 능력을 생각할 때 그만큼 고민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말이기도 할 텐데 걱정이네.’
진상미를 비롯해 다수의 행정 직원이 매일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씨름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부원장으로서 가끔이라도 찾아가 기운을 북돋아 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었다.
막 일어나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충기 교수야 만날 일이 쌔고 쌨지만 개인적으로 찾아올 이유가 없는 장기 코디네이터가 함께 들어왔다.
“부원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앉으세요. 무슨 일이시죠?”
코디네이터가 서류를 꺼냈다.
“한 달 후로 수술이 예약된 환자분인데 기억하시나요? 사촌이 장기 기증을 한다고 한 환자요.”
“기억하죠.”
다른 환자보다 또렷하게 기억하는 이유가 있었다. 보험 적용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환자가 이식 비용을 부담스러워했지만 이 환자는 확실히 달랐다.
우연히 주차장에서 보았지만 환자의 차가 국내에서 보기 힘든 최고급 승용차라는 사실 하나로 충분했다. 덕분에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을 새삼 떠올렸었다.
‘그런 차를 타는 사람은 얼마나 부자일까?’
“직계가족 중에 적합한 사람이 없어서 어렵게 공여자를 찾았잖아요. 사촌이라고 했지만 꽤 먼 친척으로 기억하는데 맞죠?”
“예, 맞습니다. 수술을 취소해야겠습니다.”
김지훈이 크게 놀랐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