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손일석이 십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 부원장님 말이 맞네. 자격이야 우리 김 부원장님만큼 충분한 사람이 없죠. 원장단 선생님들을 설득하려면 엄청 힘들 테고, 의사 서열을 실력으로 가리는 것도 아니잖아요. 물론 송재덕 선생님은 빼야 하지만 말발도 감투를 써야 더 세지고 말이에요.”
“그런다고 권위가 만들어지겠어?”
민정호가 곧바로 반박했다.
“진충기 선생님, 스스로 만드는 권위도 있지만 상대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권위 역시 유효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학회장 자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라고 할 수 없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취하지 않으면 종합 병원 건립은 요원합니다.”
결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단 하나뿐인 자리입니다.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면 안 되겠지만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양보 같은 미덕은 잠시 미뤄 둬야 합니다. 확고한 목적의식하에 당당하게 임해 주시길 바랍니다.”
민정호의 생각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었다. 반면 의사 사회도 세상의 일부인 이상 틀린 생각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려웠다.
또 하나의 변수가 생긴 것만큼은 분명했다.
분위기 묘해졌다.
순수하게 학회 설립만을 위해 뛰는 것과 초대 학회장 자리를 노리며 일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제 손으로 감투를 쓰는 것만큼 민망한 일도 없었다. 자칫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여길 다른 병원의 시각도 고려해야 했다.
손일석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유였다.
김지훈이 손을 저었다.
“민 부원장님 생각일 뿐입니다. 초대 학회장은 학회를 가장 잘 이끌 분으로 선출하는 것이 순리죠. 우리는 설립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개인적인 명예가 아니라 우리 병원의 미래를 담보하기 위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간 이식 분야에 있어서 부원장님의 위상이 있지 않습니까?”
“내 경력으로 부원장 자리에 앉은 것만 해도 과분해요. 때론 다른 사람의 시선도 중요하니까 더 이상 얘기하지 맙시다. 우리의 목적은 학회장이 아니라 학회 설립입니다. 손 교수, 진충기 선생님, 가시죠.”
“부원장님,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합니다. 자격 충분하고, 결격 사유도 없을 텐데 왜 마다하시는 겁니까?”
더 이상 끌고 나갈 얘기가 아니었다.
단호하게 말을 끊는 순간!
진충기 교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도 결국 힘 싸움에서 밀려 병원을 옮긴 진충기 교수였다. 초대 학회장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일 역시 다르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H 병원과 경기복 과장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 남아 있을지 몰라도 지금 오고 가는 말이 누구보다 불편할 사람이었다. 더구나 의학 이외의 야심과 욕망을 버린 상태기에 곱게 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김지훈으로서는 원치 않는 일이었다.
‘민 부원장은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분위기를 망칠까? 지금은 우리 세 명이 똘똘 뭉쳐 오직 학회 설립에만 집중해야 할 때다.’
“진충기 선생님, 학회장 문제는…….”
진충기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무척 진지한 얼굴이었다.
“민 부원장님 말이 맞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초대 학회장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서울과 천안 병원 원장단도 부원장이자 간 이식 학회 학회장으로 선생님을 대해야 한다면 단점일지도 모를 젊은 후배 의사라는 시각을 갖지 못할 겁니다.”
“그런 목적을 갖고 추진한다면 오히려 설립에 지장만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뜻을 오해하기 딱 좋지 않습니까? 학회를 수단으로 삼을 수도 없고요.”
“그럴까요?”
진충기 교수가 정면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선생님의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초대 학회장은 반드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돼야 합니다. 나이 따위는 고려할 요소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김지훈 선생님 이상의 적임자는 없습니다.”
“자격을 갖춘 분은 많습니다.”
“아닙니다. 자격을 따져 볼까요? 간 이식을 선도하며 가장 많은 수술을 하는 의사가 누구입니까? 비전을 갖고 학회 설립을 주도하는 의사가 누구입니까? 간 이식을 하는 병원은 물론 관련 직군까지 함께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한 의사가 누구입니까?”
목소리가 점점 뜨거워졌다.
“무엇보다 자신의 명예만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첫 학회장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학회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명예 좋아합니다. 많은 분들이 헌신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남보다 위에 서는 것을 명예라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같은 위치에 서는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했다고 여기며, 때론 명패 하나에 모든 것을 걸기도 합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진충기 교수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말하고 있었다. 경기복 과장을 향한 적대감 내지는 우려일지도 몰랐다. 사실 인간이 가진 본능적인 부분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학회장이 되기에 부족한 면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세상에 안 그런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그런 마음을 얼마나 잘 조절하는지에 달린 일 아닐까요? 막말로 진상건 같은 인간만 아니면 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더욱 선생님이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어떤 의사가 자신보다 나이와 경력이 많은 의사를 초빙하겠습니까? 자신을 잡아먹을 수도 있는 사람을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예전의 나였고, 선생님과 입장이 바뀌었다면 절대 초빙하지 않았을 겁니다. 내 자리를 위협하고도 남을 의사와 함께해서 얻을 이익이 없지 않습니까? 간 이식 분야의 발전만을 생각하는 그런 마음으로 학회를 이끈다면 어떤 사람도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김지훈이 입을 열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아무리 사람과 상황이 변했다고 해도 한때 라이벌을 넘어 적대적인 관계로 치달았던 과거를 생각하면 실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 무거워졌다.
민정호와 진충기 교수의 강력한 주장에도 정작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 탓이었다.
손일석이 피식 웃었다.
“김 교수, 뭘 망설여? 초대 학회장에 도전하는 것뿐이잖아? 나도 개인적으로 학회장이 됐으면 좋겠어. 그래야 자리를 넘겨받을 거 아니야?”
“갑자기 뭔 소리야?”
“우리 과에서 가장 파워가 센 간 이식 파트장을 주머니에서 물건 하나 빼는 것처럼 넘긴 사람인데, 나도 득 좀 보자. 초대는 몰라도 이대 학회장은 잘할 수 있어. 탄탄하게 길을 닦아 놓을 거 아니야?”
“이 와중에 농담이 나와?”
“농담 아니다. 진충기 선생님 말씀도 맞고, 민 부원장님 논리는 정말 그럴듯해. 다음 과장이 내 차례인데 전문 병원보다 종합 병원 과장이 됐으면 좋겠다. 그 정도 별호는 얻어야 어디 가서 힘을 쓰지.”
“맞네. 지금까지 양보만 했는데 손 교수 위상도 세워 줍시다. 손 교수, 종합 병원 과장 좋다.”
진충기 교수가 맞장구를 쳤다.
“제 일차 목표가 무엇인지 잘 알면서 왜 이러십니까? 파워에 죽고 파워에 사는 손일석입니다. 간 이식 파트장부터 내놓으시죠.”
“어허! 그건 안 돼. 어떻게 잡은 자리인데 벌써 내줄 수는 없어. 한 십 년 할 거야.”
“십 년이요? 어쩐지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라. 늙어 죽을 때까지 하시겠다는 말과 뭐가 달라요?”
조금은 분위기 가벼워졌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선뜻 동의하는 것도 우습지만 마냥 뒤로 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손일석 말대로 모사를 꾸미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는 것뿐이었다.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는 말 항상 명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학회장을 절대 목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우리 병원은 물론 H 병원이나 부산 병원에 저보다 적합한 분이 있다면 아예 논의조차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늦었습니다. 바로 출발하죠.”
“병원 하나는 제쳤네. 들리는 말도 그렇고, 일을 진행하는 방식이 이상한 사람은 제외해야지.”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경기복 과장님이 정말 그런 사람인가?’
가장 중요한 논의 상대였다.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면 정상적인 대화를 하기 힘들 것이 빤했다. 어떤 말을 하든 가급적 백지 상태에서 진지하게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했다.
민정호를 뒤로하고 출발했다.
가는 내내 갑자기 초미의 관심사가 돼 버린 학회장 자리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진충기 교수의 말이 의외일 정도로 가슴에 와닿았다.
“김 교수님, 지금까지 과장이나 부원장을 목표로 일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은 없습니다만, 욕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네요. 다들 똑같지 않나요?”
“똑같지 않죠. 최소 욕심의 크기는 다를 테고, 아마 선생님이 가장 욕심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쟁쟁한 선생님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과장이 되고, 최연소 부원장 자리까지 거머쥐었을까요?”
이유가 뭘까?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인정할 정도로 어떤 사심도 없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일 겁니다. 학회장 자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다릅니다. 만일 진상건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인정할까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깎아내리기 바쁠 겁니다. 적어도 그런 사람이 학회장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경기복 과장이 진상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건가? 차라리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비약이었으면 좋겠다.’
“세상 참 어렵네요.”
“김 교수, 세상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렵게 산다는 생각은 안 들어? 지금까지 해 온 대로 살면서 맡겨. 가뜩이나 샘나 죽겠는데 힘 빠지게 하지 말고, 적어도 난 아니라는 생각은 하지 말자.”
김지훈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 알 수 없었다.
초대 학회장이 돼 간 이식 학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자 한다면 개인적 욕심일까? 아니면 모두를 위한 공적인 욕심일까? 확실한 사실은 간 이식 대표 병원 세 곳 중 한 병원에서 맡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누구나 한 조직의 장이 되길 바란다. 개개인의 경쟁과 야망이 발전의 큰 원동력이라는 사실도 맞는 말이다. 오직 개인적인 명예나 야심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
결론을 내렸다.
“손 교수, 진충기 선생님, 좋습니다. 학회장 자리에 도전해 보죠. 단, 후보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나만이 아니라 두 분 다 도전해야 합니다.”
“우리까지?”
“누구든 우리 병원 대표가 될 수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야. 간 이식 분야 발전과 학회 설립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도전하겠다는데 누가 반대하겠어?”
“쩝! 말은 좋은데 우리 김지훈 부원장님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소리잖아? 계급장 떼고 붙어도 이길까 말까 한데, 시작부터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 그래도 누가 먼저 결승선을 통과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한판 붙어 보자.”
손일석이 투덜거리면서도 주먹을 불끈 쥐자 진충기 교수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좋습니다. 부원장보다 간 이식 센터장이 더 유리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두고 봐야 알죠.”
“어후!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네.”
김지훈도 웃었다.
‘일석이가 불리하긴 해도 이런 경쟁은 환영이지.’
정말 도전할지, 아니면 깨끗하게 물러날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떤 쪽이라도 다들 자격이 있기 때문인지 다소 무거웠던 기분이 싹 가시며 왠지 즐거웠다.
H 병원에 도착했다.
시간이 늦어 부리나케 약속 장소를 찾았다.
경기복 과장과 두 명의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공의 때부터 시작해 오창도 교수 영입 때까지 H 병원 의사를 제법 많이 알아 왔건만 모두 낯선 이들이었다.
진충기 교수와 비슷한 처지에 빠졌을까?
‘지금쯤 주역이 됐을 줄 알았는데.’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논의에 들어갔다. 시작부터 진충기 교수를 보는 경기복 과장의 눈길이 좋지 못했지만 각오한 일이었다.
공식적인 자리인 만큼 사적인 감정을 배제할 것이라 믿었고, 학회 설립에는 당연히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초반부터 의견 충돌이 발생했다.
각 지역 대표자 인원부터 문제였다.
“간 이식을 하는 병원 수 및 지역 중요도를 감안해 서울 지역 네 명, 경인 지역과 영남, 호남, 충청 지역에서 각 한 명씩 모두 여덟 명으로 구성해야 합니다.”
“서울에서만 네 명이요? 모든 조건을 감안해도 너무 편중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부산과 영남 지역을 구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산 병원의 수술 건수가 제법 많지만 정작 이식을 시행하는 병원은 경남 양산에 있지 않습니까? 엄밀하게 따지면 부산과 영남 지역을 구분할 이유가 없어요.”
민정호의 말과 진충기 교수의 우려가 절로 떠올랐다. 교통편의상 서울에서 모일 수밖에 없어 지방은 대표자 전원이 참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서울 대표가 네 명이나 된다면 누가 주도권을 가질지 빤한 일이었다. 반면 모두가 H 병원과 뜻을 같이한다고 할 수 없는 데다 병원 규모나 수가 많은 것이 사실이라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의 의견을 구했다.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문제로 티격태격하다가는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은 준비 위원회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부산 병원도 이해할 테고, 운영상의 문제는 차차 해결하면 된다.’
“좋습니다. 연락은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서울 지역을 맡겠습니다. 이런 문제로 말이 나오지 않도록 잘 설득해 주시기 바랍니다.”
뭔가 꺼림칙했지만 일단 모이는 것이 먼저였다. 불만이 있다면 그때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별다른 이의 없이 수용한 김지훈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또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