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98화 (1,198/1,329)

4화

다음 날 오후.

김지훈이 신중하게 조경태 환자의 배에 꽂힌 드레인을 살폈다. 배 좌측의 심지는 췌장 공장 문합부 유출을 반영하고, 우측 심지는 십이지장과 공장 문합부의 상태를 알 수 있도록 위치시켰다.

문제가 생겼다면 좌측은 췌장 소화액의 특성을 따라 맑은 체액이 흘러나올 테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췌장액에 노출된 피부에 발진이 발생할 것이다. 때문에 유출 즉시 발견하기 힘든 면이 있었다.

반면 우측은 담즙 색깔인 갈색 체액의 유무가 유출의 직접적인 증거였고, 조기에 발생할 수 있어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 빠르게 발견할 수 있다고 해서 부담을 더는 것은 아니었지만 빠른 대처만이 후유증을 줄이는 길이었다.

김지훈이 심지를 따라 흐르는 체액을 깨끗한 거즈에 묻혀 유심히 관찰하며 냄새까지 맡아 보았다.

‘냄새는 괜찮네.’

“한수영 선생, 별 변화 없지?”

“예. 아침하고 동일합니다.”

보호자는 물론 이제 간신히 몸을 추스르기 시작한 환자의 불안이 눈에 보였다. 변형된 휘플을 받은 데다 양상이 동일하다는 말을 괜찮다는 말로 받아들일 처지가 아니었다.

“선생님, 괜찮은 건가요?”

“현재까지 별문제 없습니다만, 앞으로 일주일 정도 계속 관찰해야 합니다.”

“점심때 서도훈 선생님이 오셔서 내일부터 가볍게 움직여도 된다고 하셨는데 정말 걸어도 될까요? 소변 줄은 뺀다고 하셨지만 코 줄은 못 뺀다고…….”

“경과에 따라 적절하게 조치할 테니 조금만 참으세요. 힘들어도 조기에 운동을 한다면 회복에 큰 도움이 됩니다. 무리하지만 마십시오.”

김지훈이 편안한 미소를 머금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휘플 자체가 갖는 위험성에 수술의 특수성이 겹쳐 사실 의사에게도 상당히 불안한 시간이었다.

장과 장, 혹은 장과 다른 장기를 연결했을 경우 일주일 안에는 언제든 터질 수 있었다. 환자의 전신 상태, 감염, 수술 중 정확한 연결 여부 등 여러 요소가 영향을 끼치지만 일단 문합 부위가 터지면 결과는 동일했다.

대부분 보존 치료로 아물지 않는다.

운이 좋은 몇몇 경우를 빼면 재수술을 시행해 터진 부위를 제거하고 다시 연결해야 회복시킬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부담인데 조경태 환자는 차원이 달랐다.

‘휘플을 받은 상태에서 위와 유문을 모두 절제하고 다시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한다면 췌장 부위를 다시 수술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환자는 또 어떻게 버틸지 모르겠네.’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첫 시도가 주는 엄청난 부담은 경험이 거듭돼도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의학적 근거하에 시도한 수술이었고, 휘플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육체적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환자에게 최대한 유리한 방법임이 분명했다.

김지훈이 한동안 병실에 머물렀다.

환자와 보호자의 걱정을 덜어 주는 데 대화 이상으로 좋은 방법은 없었다. 진지하게 듣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길 원할 뿐이었다.

어려운 일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대가는 그 한마디로 족했다.

제법 시간이 지나서야 병실을 나왔다.

한수영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선생님, 일주일이 고비겠죠?”

변형된 휘플 수술을 먼저 제안한 의사이자 집도의로서 자신만이 아니라 수술 팀 전원에게 강한 자신감을 줄 필요가 있었다.

“수술은 잘됐어.”

“휘플 자체가 드문 데다 위와 유문을 보존하는 수술을 처음 봐서 그런지 정말 신경이 쓰이네요.”

“아뻬 처음 했을 때 기억나?”

“어떻게 잊겠습니까?”

“퇴원할 때까지 내내 불안했지? 나도 그랬어. 첫 시도나 처음이란 것이 의사를 정말 불안하게 하지만 의학적 근거가 충분하고, 기본을 잘 갖췄다면 나쁜 결과가 나올 수가 없어. 이번 수술 역시 문제가 발생한다면 불가피한 합병증이라고 생각해야 돼.”

“환자나 보호자가 이해할까요?”

“영원한 숙제긴 하지만 결국 우리에게 달렸다는 사실을 잊지 마. 최선을 다해 환자를 치료했다면 말이 통할 여지가 있지만, 반대라면 아마 같은 의사라도 이해하지 못하지 않겠어?”

“어디까지가 최선일까요?”

“나도 잘 몰라. 모든 시간을 환자에게 쏟아부을 수는 없지만 스스로 납득할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환자가 필요할 때 곁에 있는 의사가 돼야 하겠지.”

의사들의 딜레마였다.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단순히 오진이나 실수로 넘어갈 수 없기에 더욱 어려운 문제였다. 하기에 이준영 교수는 물론 김지훈도 기본과 원칙을 유난하게 강조하는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한수영의 등을 툭 쳤다.

“걱정하는 만큼 환자 열심히 보자.”

최선 이상의 방법은 없었다.

“그 길밖에 없겠죠? 빤히 알면서도 어렵거나 유난히 질문이 많은 환자를 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네요.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쉽지 않고요.”

“나도 힘들어. 하지만 우리에겐 기본적인 지식에 불과해도 환자는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가 돼. 솔직히 환자 한 명 한 명이 모두 의사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지만 세상에 스트레스를 안 받는 사람이 있을까? 피할 수 없다면 맞서 싸워야지. 이왕이면 좋은 방향으로 말이야.”

한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얘기 또 하고 또 해야 하는 일이 귀찮고 번거롭지만, 결국 환자가 불안하기 때문이겠지. 방금 전 김지훈 선생님처럼 공감하는 자세가 필요해.’

달리 생각하면 매너리즘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인턴 혹은 전공의 시절 환자를 보며 느꼈던 가슴 떨림을 기억한다면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하루 지났다.

조경태 환자와 병실에 있는 수많은 환자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일과를 마무리했다. 막 부원장실을 나가려는 순간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경기복 과장이었다.

“이번 주 금요일 일곱 시요? 내일이네요.”

(다른 날짜에는 도저히 시간을 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장소도 우리 병원으로 했으면 합니다. 인사 겸 기본적인 사항만 상의하는 자리인데 주말에 만나기도 그렇고요.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

일방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정했지만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는 법이었다. 간 이식 학회 설립이 무난하게 진행된다면 이 정도 수고쯤은 감수할 수 있었다.

다만 수술이 두 개 있어 회진 빨리 돌고 출발한다고 해도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 것 같았다. 다소 늦을지 모른다고 양해를 구한 후 반드시 통보해야 할 말을 했다.

‘초반 논의부터 주도적으로 움직여야 할 사람 모두 참석해야 우려하는 부분을 해소할 수 있겠지.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고려할 이유도 없다.’

“진충기 선생님, 손일석 교수와 함께 가겠습니다. H 병원도 세 명이 참석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충기 선생이요?)

“우리 병원 준비 위원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 일로 얼굴 붉힐 때는 지나지 않았습니까? 사실 그럴 일도 아니고요.”

(그렇긴 합니다.)

떨떠름한 목소리로 잠시 시간을 끌던 경기복 과장이 양 병원 대표 구성에 동의했다. 껄끄러운 입장을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었지만 부원장까지 된 이상 모든 일을 자신 있게 처리해야 했다.

“다른 병원에도 자리를 갖기로 한 사실을 알리고,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부산 병원 역시 대표 병원인 이상 참석을 요청하겠습니다.”

(참석하기 어려울 테지만 통보는 해 줘야죠. 전화하는 김에 내일 양 병원이 기본 방향을 정하면 적극 수용해 달라는 말까지 했으면 좋겠습니다. 참석도 못하는 병원 의견을 일일이 수용하다가는 제대로 진행할 수가 없지 않겠어요?)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선입견 때문인지 삐딱하게 들렸다.

‘왜 부산 병원은 무조건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지? 내가 너무 예민한가? 어쨌든 첫 자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일 오후 일곱 시! 빡빡하네.’

첫 단추를 어떻게 꿰느냐에 따라 간 이식 학회 설립의 방향이 정해질 것이다. 하기에 대표 병원들만의 자리가 먼저 필요하다는 사실을 십분 인정하지만 다른 병원의 입장까지 충분히 고려하는 것이 정도였다.

시간이 없었다.

일단 부산 병원에 연락했다.

사정을 설명하고 참석이 가능한지 물었다.

역시 촉박한 시일 탓에 불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전화상으로 전문 병원의 제안을 설명했고, 다른 과와 직군이 함께 구성하는 문제를 두고 이해를 구했다.

일부 이견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방향에 동의한다는 무척 반가운 대답을 들었다. 전문 병원을 믿고 H 병원과 합의한 내용을 수용하겠다는 말까지 들어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은 덤이었다.

‘좋았어. H 병원만 동의하면 된다.’

곧바로 손일석에게 연락했다.

“손 교수, 다른 병원에 모두 알려 줘. 혹시 우리만 만난다고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니까 사정 자세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아.”

(오케이! 전화로 이미 연락하고 있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 대략 계획을 설명하는 정도였는데 다들 고생이 많다고 하시더라.)

귀찮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손일석과 호응해 주는 의사들까지 모두 든든했다. 하지만 들리는 말보다 실제 생각이 가장 중요했다.

“반응은 어때?”

(반반이야. H 병원은 기존 학회와 동일한 구성을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게 아니더라도 의사 학회를 다른 직군과 왜 같이해야 하는지 의문을 갖는 선생님들도 제법 있어.)

역시 H 병원은 물론 여러 병원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기존 학회를 생각할 때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고, 지금부터 논의해 설득해 나갈 과제였다.

“뭐라고 했어?”

(상의한 대로 말했지. 순수 학술 단체 성격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간 이식과 관련된 분야가 워낙 많고 정부 부처와도 관계가 있는 만큼 현실적인 대안과 대책을 강구하고, 실행하는 학회가 돼야 한다고 말이야.)

“우리가 그런 말을 했었나?”

(우리 부원장님 생각을 정말 잘 정리했는데 왜 이래? 그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자 원칙 아니야?)

척 하면 착이었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친구의 힘이었다. 물론 손일석 역시 간 이식과 혈관 수술을 두고 수많은 고민을 거듭했기 때문일 것이다.

진충기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하기에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H 병원과의 만남을 먼저 자청했을 것이다. 그만큼 당당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김지훈이 기분 좋게 웃었다.

‘우리 셋이 함께하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네.’

어떤 일이든 난관이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동의할 수 있는 원칙을 갖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퇴근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금요일 오후.

김지훈이 서둘러 모든 일과를 마쳤다.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도 오후 다섯 시까지 일을 마무리하느라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간단하게 어떤 말을 나눠야 할지 정리한 후 출발을 서둘렀다.

그때 민정호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금 출발하십니까?”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간 이식 학회 설립 건과 별 상관이 없지만, 초대 학회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으며 알게 모르게 관여하는 민정호였다. 물론 행정 부분 참여까지 구상하고 있지만 재정과 무관한 사안이었다.

‘한마디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조금 있으면 퇴근 시간이라 길이 어떨지 모르겠네요. 무슨 일 있어요?”

“H 병원 경기복 과장님에 대해 간단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 분만 시간을 내주시죠.”

귀가 번쩍 뜨였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에 대한 정보라면 무조건 환영이었다. 출발 시간이 촉박한데도 다들 자동적으로 앉아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빨리 말씀하세요.”

“진충기 선생님과 서로 껄끄러운 관계라는 점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어느 직장이든 자리싸움은 벌어지고, 이기고 지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H 병원에서 갖고 계셨던 위상을 생각하면 상당히 의외라는 생각도 듭니다.”

누구도 언급하기 힘든 말을 태연하게 잘도 꺼냈다. 더구나 당사자가 앞에 있어 손일석마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데도 말이다.

“사족은 빼죠.”

“사족이 아닙니다. 결국 병원 전체의 이득보다 개인의 이득을 우선시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병원 간 이식이 발전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이유로 경기복 과장님이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지 먼저 알고 대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목적이라니요?”

“H 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부원장 자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병원 규모를 생각할 때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면 우리 김지훈 부원장님보다 훨씬 빠르다고 할 수 있겠죠. 재단에서 밀어주는 사람을 믿고 있는 것 같은데, 근무 기간이 짧은 데다 강력하게 내세울 만한 경력이 없어 좀처럼 물망에 오르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진충기 교수가 눈가를 흐렸다.

“간 이식 학회를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자체 성과도 있고, 초대 학회장이 된다면 경쟁력을 갖출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학회 내부에서 결정될 일입니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무슨 말이요?”

민정호가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우리 병원이 종합 병원으로 발전하기 위해 초대 학회장은 반드시 김지훈 부원장님이 되셔야 합니다. 이유는 서울과 천안 병원 원장단을 상대하기 위해 필요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초대 학회장이요?”

진충기 교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심 누가 후보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지금 꺼내기엔 너무 성급한 말이었다. 더구나 김지훈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무리한 일이라고 보십니까?”

“갑작스러워 그런지 솔직히 당황스럽군요.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입니까?”

“물론 자격을 먼저 갖춰야겠지요. 전 자격이 충분하시다고 생각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민정호의 행동은 무리한 개입이었고, 일종의 월권이었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원칙에 반해 더 이상 대화를 진행시킬 이유가 없었다.

그때 손일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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