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95화 (1,195/1,329)

1화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입이 여간 쓴 것이 아니었다.

“H 병원도 며칠 전에 논의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제반 사항을 통보받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상당히 구체적이었다는 걸로 봐서 내부적으로 결정을 내린 지 오래됐다는 말이겠죠.”

“몇몇 병원도 대충 알고 있는 것 같아. 분위기상 우리하고 부산 병원을 제외한 나머지 병원에 연락을 한 게 분명해. 과장 선에서만 얘기가 오가 말이 새지 않았겠지. 뭐, 샜다고 해도 일부러 시간 내서 연락할 관계가 아니잖아.”

의사 사회의 단점이었다.

한 직장에 속해 있어도 해당 과 혹은 개개인이 독립적으로 일하는 경향이 강해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물며 공동의 이익이 걸리지 않는 한 병원 간의 연락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아닌데.’

“학회 설립이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 우리와 부산 병원 선생님들에게 왜 연락을 안 했을까요?”

“주도권을 잡고 싶은 겁니다.”

“간 이식을 대표하는 세 개 병원이 협의를 통해 끌어 나가야 할 텐데 주도권이랄 게 있나요? 솔직히 우리를 빼면 간 이식 학회를 만들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잖아요.”

손일석이 고개를 저었다.

“경기복 과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학회를 좌지우지하고 싶다면 지금 방식이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어. 각 병원마다 한 표의 결정권을 행사한다면 단지 병원 두 곳만 빠진 셈이잖아. 다른 병원들도 대표 병원을 견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수 있고.”

“후우! 학회 설립이 아니라 부차적인 문제를 고민해야 하다니 괴롭네. 주도권을 잡았다 치자. 그래서 마지막으로 무엇을 얻겠다는 걸까?”

진충기 교수가 허탈하게 웃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의사도 많지만 목을 거는 의사도 적지 않아요. 더구나 간 이식 수술이 크게 늘면서 일반외과의 주요 분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병원 내부와 외부에 미치는 영향력도 그만큼 커지겠죠.”

“그래서요?”

“만일 명예를 추구하며 의사를 넘어선 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초대 학회장이 된다면 의미가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병원장이 될 수 있는 발판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다른 수술과 달리 장기 기증부터 정부가 관여하기 때문에 부처 관계자들과 친분을 쌓을 좋은 기회가 될 테고요.”

손일석이 입맛을 다셨다.

“초대 학회장을 출세의 사다리로 삼겠다는 말이네. H 병원에서 외과 과장을 할 정도면 그 자체로 병원장을 노려 볼 수 있지 않나? 재단 내에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흠흠!”

진충기 교수의 아픈 부분이었다.

간 이식에만 주력하겠다는 요청마저 거절당하고, 쫓겨나다시피 전문 병원으로 온 의사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진충기 교수가 웃었다.

“손 교수, 말꼬리 흐릴 일 아니야. 나도 한때 경기복 과장처럼 물불 가리지 않고 올라설 생각만 했지만 이젠 그게 얼마나 허망한지 잘 알아. 노력 없이 편법으로 목적을 이루려는 것 같아서 화가 나기보다 안타까워.”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해서 수단까지 정당하다는 말이 아닐 텐데 답답합니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 건지, 살아남은 놈이 강한 건지 알 수가 없네요.”

김지훈이 한 가닥 끈을 놓지 않았다.

진상건과 비슷한 인간과 또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학회 설립을 두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기는 더더욱 싫었다.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모든 일이 풀리기를 바랐다.

한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주변 정황을 보고 판단했을 뿐 경기복 과장의 진짜 뜻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어쩌면 진행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자세를 고쳤다.

‘민 부원장님, 초대 학회장이 되기를 강력히 요구했지만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고, 상황이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무엇보다 내 목적은 학회 설립 그 자체에 있습니다.’

“누가 어떤 의도를 가졌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오늘 내부적으로 확실하게 결론을 내린 후 H 병원, 부산 병원과 함께 공동으로 준비를 해 나가는 것이 맞습니다.”

“H 병원은 김 교수가 직접 맡을 거야?”

“그게 가장 좋지 않겠어? 상대방의 직위를 중요하게 여긴다면 내가 부원장이라는 사실도 도움이 되겠지.”

“좋은 생각이야. 의사 선배라도 부원장 대 과장이라면 꿀릴 일이 없네. 그래도 마음고생은 좀 하겠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괜찮아. 진충기 선생님, 다른 과와 상의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힘드시더라도 총괄 업무를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연스럽게 진충기 교수가 전반적인 실무 작업과 부산 병원을 맡게 됐다. 거리가 멀어 만나는 일조차 쉽지 않겠지만 H 병원 경기복 과장을 만나는 것보다 훨씬 마음은 편할 것이다. 호의적인 상대와 뜻까지 일치한다면 그보다 즐거운 일도 없으니 금상첨화였다.

곧바로 회의에 참석했다.

간 이식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모여 열띤 논의를 이어 갔다. 직군과 직능에 관계없이 학회 설립의 주역이 되는 과정이기에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김지훈이 제시한 원안과 핵심 원칙이 큰 무리 없이 통과됐다. 세세한 규칙은 다른 병원과의 논의를 통해 정하기로 했다.

‘관련된 모든 직군을 학회 일원으로 구성하며 분과를 설치한다. 동등한 권한과 권리를 가지며, 학회 개최 시 반드시 해당 분야의 논문을 발표해야 한다. 기타 등등.’

김지훈이 마지막 발언을 청했다.

“우리 병원만이 간 이식 학회 설립을 추진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솔직하게 말해 외과만으로 구성하자는 목소리나 원칙에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병원분들과 접촉할 때 이런 점을 참조하셔서 신중하게 대처해 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우리의 핵심 원칙을 절대 잊으면 안 됩니다.”

“의견 충돌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논의 도중 수시로 상의가 필요할 텐데 어느 선생님에게 연락하면 됩니까?”

“진충기 선생님에게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충분하지 않지만 공식 출장에 준해 예산을 책정할 계획입니다. 실무를 맡으신 분들은 잊지 말고 수령해 주십시오.”

적은 돈이 빤했지만 다들 미소를 머금었다. 자칫 간과하고도 남을 부분까지 챙겨 주는 병원 분위기에 무척 만족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일에 비용을 지원하는 일이 흔한 것도 아니었다.

귀중한 토요일 오후였다.

대부분 빠르게 자리를 정리한 후 퇴근을 서둘렀다. 몇몇이 남아 진충기 교수와 구체적인 말을 주고받으며 의견을 교환했다.

“일석아, 서운하지 않지?”

“만날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데 서운할 틈이 어디 있겠어? 결정적으로 난 경기복 과장 같은 사람 아니다.”

“속단하지 마.”

“너무 좋은 쪽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돼.”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잠시 생각에 빠졌던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 손일석, 고경아와 함께 신관으로 향했다.

전문 병원 확장의 첫걸음이었다.

한창 짐을 옮기는 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지만 감회가 남달랐다. 함께 고민하고, 고생했던 신현수가 떠올라 한편으로 착잡한 마음도 들었다.

“3층부터 연구실이 들어선다고?”

“예. 생각보다 구조가 잘 짜여 구내식당부터 일부 검사실까지 별문제 없이 배치했습니다.”

“간호과는 5층이죠?”

“3층에서 본관과 연결되니까 크게 불편하지 않을 거예요. 민 부원장님이 간호사 전용 휴게실을 마련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꾸몄을지 모르겠네요.”

“신경 많이 써 주셔서 감사하네요.”

김지훈이 십분 동의했다.

비용부터 시작해 준공까지 사실상 민정호가 도맡아 시행한 사업이었다. 때문인지 다른 사람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손일석이 고개를 빼 들었다.

“민 부원장님 성격에 이 난리를 보면서 퇴근했을 것 같지 않은데 안에 있나?”

호랑이가 제 말 했다고 나타났다.

민정호가 총무과 직원과 함께 양팔 가득 박스를 들고 다가왔다. 힘에 부칠 정도로 꽤 무거워 보여 김지훈이 재빨리 달려가 박스 하나를 번쩍 들었다.

민정호가 흠칫 놀랐다.

“힘이 세시네요.”

“이 정도쯤이야. 끙! 뭐예요?”

“일하시는 분들 새참입니다. 내일 오전에 청소 작업이 예정돼 있어 밤늦게 끝날 텐데 빈속으로 일하긴 힘들죠.”

“퇴근 안 해요?”

“일이 끝난 후에 퇴근할 생각입니다.”

한동안 번듯하게 완공된 신관을 바라보았다. 저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가슴 두근거리는 감흥만은 똑같았다. 이제 없어서는 안 될 동료로서 어깨를 나란히 한 민정호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감정은 감정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민정호가 곧바로 이를 일깨워 주었다.

“부원장님.”

“할 말 있어요?”

“눈앞에 보이는 것이 다 돈이라는 사실 잘 아시죠? 앞으로 할 일이 많으시겠지만 월말 결산 회의 때 분위기 나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주셔야 합니다.”

“실적 많이 올려라?”

“정답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돈 얘기라니!

김지훈이 바로 되받아쳤다.

‘돈은 돈으로 풀어야지.’

“신 교수가 이사장이 됐는데 독립채산제를 철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재원이 풍부하면 여유롭게 일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이사회에서 결정할 일이지만 재정이 통합된다고 해도 변할 부분은 없습니다. 종합 병원 건립은 우리 일인 데다 사업 규모가 커 지금보다 더 쪼들릴 수 있으니까요. 부원장님 어깨가 여러모로 무겁습니다.”

“돈으로 말이죠?”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신관을 건립한 이유도 잊지 마세요. 결코 연구실 같은 공간이 부족해서만은 아닙니다. 실적이 향상될 것이란 확신이 없었으면 반대했을 겁니다.”

“기대가 아니라 확신을 했다고요?”

“부원장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상호 간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 사람도 부원장님이고요.”

돈으로 풀기는 개뿔!

역시 재정 문제에 관해서는 당해 낼 수 없는 상대였다. 무엇을 보든 돈으로 환산해 내는 능력과 관점까지 초지일관 유지했다.

말발은 더 늘었다.

‘차라리 말수가 적었을 때가 좋았네.’

우군이 필요하건만 손일석이 슬그머니 이준영 교수 곁에 바짝 붙으며 딴청을 부렸다. 고경아도 게걸음을 치며 김지훈과 민정호에게서 한 발 떨어졌다.

“건물이 반짝반짝 빛나네. 간호 과장님, 이런 건물에서 근무하면 없던 힘도 생기겠어요. 선생님, 안 그렇습니까?”

“좋긴 좋다.”

김지훈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스승님과 경아 씨까지? 내 편이 아무도 없는 건가?’

재단 지원이 있어도 결코 재정 운용에 여유를 둘 민정호가 아니었다. 종합 병원 건립이 결정되면 얼마나 시달릴지 상상만으로도 손이 떨렸다.

끝이 아니었다.

“회의는 잘 끝났습니까?”

“내부적으로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제가 드린 말씀 잊지 마십시오.”

‘학회장?’

“무슨 말이요?”

김지훈이 짐짓 딴청을 부리자 민정호가 힐끗 눈길을 주었다. 조용히 신관 너머 아무것도 들어서지 않은 땅을 가리켰다.

“협상력과 발언권을 높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으십니까? 누가 봐도 좋은 기회이고, 무리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부지를 놀리는 것은 죄악이나 다름없습니다.”

‘아! 하다 하다 죄악까지 들먹이다니, 할 말만 딱 하던 민 부원장은 어디로 간 거지?’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학회 설립을 둘러싼 문제를 말할 수도 없었고, 사실 민정호와 상의하거나 알아야 할 일도 아니었다. 빤히 듣고 있을 손일석은 이미 눈치를 챘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김지훈이 한숨만 내쉬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일에 뻐근해진 고개를 돌리다 말고 화들짝 놀라며 신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미처 물어볼 틈도 없어 다들 눈만 동그랗게 떴다.

한참 후 김지훈이 나타났다.

양손에 자료가 가득이었다.

“뭘 가지고 온 거야?”

“다음 주 수요일에 휘플 있잖아.”

“아! 유문을 보존한다는 그 수술? 첫 시도인데 공부해야지. 주말에도 바쁘겠다.”

고경아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준영 교수 이하 모두들 웃고 있었다. 환자에 대한 열정과 노력하는 자세는 언제 보아도 즐거운 법이었다.

“간호 과장님, 정말 한가할 때, 아무 일도 없을 때만 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꼭 그러셔야 돼요.”

“약속합니다.”

가능할까?

“김 부원장, 손 교수, 그만 퇴근하자. 우리 간호 과장은 너무 걱정하지 마. 민 부원장, 수고해.”

이준영 교수와 함께 퇴근했다.

다들 발걸음이 가벼웠다.

편하게 굴러가는 일이 없었지만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이었음이 분명했다. 다만 주말 휴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 아쉬웠다.

집안일 돕는 것은 필수였다.

희연이와 노는 것은 의무이자 행복이었다.

틈틈이 휘플 준비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월요일은 수술이 늦게 끝나고, 화요일에는 학회 설립으로 H 병원과 긴 통화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세상에 바쁜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닐 텐데 좋게 생각하자. 카르페 디엠!’

그런데 왜 눈물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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