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주말 집담회가 시작됐다.
주역이어야 할 김지훈에 진충기 교수와 손일석, 세 사람이 쏙 빠졌다. 학회 설립 논의를 해야 했기 때문인 데다 신현수와 송재덕 교수까지 없는 탓에 맥 빠진 집담회가 될지도 몰랐다.
빈자리가 무척 아쉬운 순간이기도 했다.
“설립 목적, 산하 위원회 구성, 운영 방침 등은 다른 학회를 대거 참조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추가하거나 삭제할 문구가 있는지 확인하고, 누가 실무를 담당할지까지 선정해야 합니다.”
“해당 과마다 H 병원, 부산 병원을 각각 한 명이 맡고, 간 이식이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병원들을 맡아야 할 사람 한 명까지 최소 세 명이 필요하겠네요.”
“다른 과는 알아서 결정하면 되니까 우리부터 결정하죠. H 병원은 누가 맡는 것이 좋겠습니까?”
김지훈의 말에 손일석이 쓰윽 진충기 교수의 분위기를 살폈다. 좋게 나왔다면 진충기 교수 이상의 적임자가 없었지만 현실은 정반대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전문 병원 누구도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아 H 병원과의 만남이 껄끄러운 상황이었다.
“어느 쪽을 맡아도 수월하지가 않네요. 부산은 멀어서 문제고, 남은 병원은 너무 많아서 문제고, H 병원은 우리 병원과 라이벌 관계라 얘기가 길어질 수 있잖아요. 메일과 전화로만 상의할 일도 아니고 말입니다.”
“손 교수는 어디를 맡고 싶어?”
“H 병원을 맡고 싶은데 아는 사람이 없네요. 다행히 남은 병원들에 친분이 있는 선생님이 제법 있으니까 제가 그쪽을 맡겠습니다. 발품 팔아야죠.”
어려운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었다.
간 이식을 대표하는 병원은 단 세 개였지만 남은 병원들의 자체 위상을 고려할 때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더욱이 학회 구성원은 많을수록 유리하기 때문에 일일이 만나 논의해야 구색을 맞출 수 있었다.
같은 의사라 해도 생판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두루두루 아는 사람이 많고, 무엇보다 친화력이 높은 손일석이 적임자라 할 수 있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상 병원이 많아 걱정했는데 손 교수가 맡아 준다니까 마음이 놓인다. 부탁할게. 그럼 병원 두 곳만 남는데…….”
‘부산 병원은 호의적이지만 H 병원은 분명 주도권을 가지려 할 거야. 진충기 선생님 일까지 겹쳐 껄끄러울 것이 빤하고, 논의 과정이 상당히 골치 아플 수도 있다. 입장 곤란한 사람이 맡으면 더 꼬이겠지.’
“진충기 선생님, 제가 H 병원을 맡겠습니다.”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 부원장 타이틀이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어.”
진충기 교수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도 분위기가 좋을 수 없는데 내가 담당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어쨌든 내 입장을 고려하기 전에 H 병원 상황을 정확히 알고 대처해야 한다.’
H 병원에 자신을 모르는 의사는 없었다. 그중 상당수와 격의 없이 논의하고도 남았지만 문제는 간담췌 센터와 간 이식을 주도하는 몇몇이었다.
“H 병원 간 이식 주임 교수는 과장을 맡고 있는 경기복 선생님입니다. 의사로서의 능력은 뛰어나지만 야심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힘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진충기 교수가 이직할 이유가 없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대략이나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본인 말이 아니라 항간에 떠도는 소문과 비슷해 보다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동안 경기복 과장님에 대해 한마디도 안 하셨는데 지금은 직접 들어야 할 때다.’
“야심이라니요?”
“마지막이 어디인 줄은 모르지만 병원장 이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어쩌면 의사로서의 성공이 끝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국회의원이라도 된다면 의료계에 많은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달린 자리를 원한다면 도리어 학회 설립에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을까요?”
진충기 교수의 눈가가 흐려졌다.
“내가 H 병원을 나와야 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누군가 자신의 위에 서는 것을 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간 이식 학회 설립에 어떻게 대응할지 짐작도 하기 어렵군요.”
그때 손일석이 갑자기 머리를 쳤다.
“아! 왜 이제야 그 생각이 나지? 진충기 선생님, 혹시 우리 계획을 다른 병원 선생님들에게 말한 적이 있으십니까?”
“내부 정리도 안 된 상황인데 누구에게 말해?”
“그렇죠. 일전에 혈관 수술 건으로 D 병원 선생과 통화를 한 일이 있었는데 뜬금없이 간 이식 학회를 꺼내더라고요.”
“혈관 전문의가?”
“간 이식에도 관여를 하고 있어서 곧 만들지 않겠냐는 말만 하고 끊었는데, 우리 병원에서 말한 사람이 없다면 혹시 H 병원도 자체적으로 추진하는 것 아닐까요?”
왠지 분위기 싸해졌다.
어느 병원이든 학회 설립을 추진할 수 있다. 내부적인 준비가 끝났다면 다른 병원에 연락해 뜻을 모으는 일이 다음 절차일 것이다.
문제는 전문 병원, H 병원, 부산 병원 중 어느 한 곳을 빼고 설립을 추진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만일 이를 무시하고 강행한다면 반쪽짜리도 안 되는 학회가 될 테고, 결국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용은 없고, 형식적인 자리만 양산하는 꼴이 될 것이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어느 병원이든 추진할 수 있는 일이고, 사전에 의향을 타진했을 수도 있잖아. 우리보다 준비가 빨랐다면 곧 연락이 오겠지.”
“그랬으면 좋겠지만 뭔가 앞뒤가 안 맞아. 솔직히 세 병원 중에서 가장 수술 건수가 적은 곳이 H 병원인데, 의향을 물어볼 생각이었으면 당연히 우리하고 부산 병원에 가장 먼저 연락을 했어야지.”
“일 처리가 그렇게 간단하면 얼마나 좋겠어? 다들 바쁘니까 친한 선생님들에게 먼저 연락했을 수도 있는 일이야. 너무 앞서 나가지 말자.”
“좋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야. 최악의 경우까지 대비해야 돼. 지금이야 학회 설립이 시급하니까 독단적으로 보여도 넘어갈 수 있지만, 만일 운영까지 그런 식으로 하려 하거나 일부만 주축이 된다면 학회를 만들 이유가 없잖아.”
진충기 교수도 동의했다.
“부원장님,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다른 과는 물론 간호과와 행정 부분까지 참여시킨다는 것이 우리의 안이 아닙니까?”
“반대할 가능성이 높을까요?”
“간 이식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면 얼마든지 반대할 수 있고,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수술을 담당하는 우리 과가 핵심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끝까지 순수 학술 단체로 남을 수 있는 학회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규모가 큰 경우 학회장 자리를 두고 암투가 벌어지는 일이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니까요.”
예상이 맞는다면 뜻밖의 암초였다.
일반외과 의사만 참여하는 학회와 관련 분야가 모두 구성원이 되는 학회의 성격은 천양지차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지향하는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H 병원의 계획을 아는 것이 급선무였다.
무엇보다 경기복 과장의 생각을 알아야 했다.
“당사자의 말도 듣지 못한 상황에서 섣부른 판단을 내려야 우리에게만 손해일 겁니다. 생각이 다르다면 서로 맞춰 가면 되고요. 진충기 선생님, H 병원 선생님들과 연락하고 계시죠?”
“독자적으로 학회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지 확인부터 해야겠죠? 몇몇은 지금도 자주 통화하고 있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진충기 교수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답답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한마디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마 숨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일 경기복 과장이 우리 귀에 들려야 주도권만 뺏긴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말이죠.”
“어쨌든 상황 파악이 먼저니까 바로 전화해 보시고, 알려 주세요. 손 교수도 회의 시작하기 전까지 아는 선생님들에게 연락해 혹시 들은 소리가 있는지 알아봐 줘.”
“에휴! 뭔 일을 해도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네. 마가 꼈나? 혹시 터가 안 좋은 거 아니야?”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성급한 판단이자 오해이길 바랐지만 모든 상황을 종합할 때 H 병원, 특히 경기복 과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H 병원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진충기 교수의 말이라 더더욱 가슴이 답답했다.
‘어느 병원이나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고, 어쩌면 우리를 보는 시각도 다르지 않을 수 있겠지. 간 이식 학회 설립에 이해관계가 걸릴 줄은 생각도 못했네.’
기우였으면 했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씁쓸한 일이었다. 환자를 우선시해야 하는 병원에서 금경태부터 진상건까지 자신의 이득만 생각한 놈이 한둘이 아니라 불안하기까지 했다.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칙에서 물러날 생각도 없었다. 하기에 간 이식 학회 설립의 당위성은 물론 왜 관련 분야가 모두 참여해야 하는지 단단한 논리로 무장해야 했다. 눈과 귀를 열고 있는 사람이라면 십분 동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닥다닥 모여 통화해야 방해만 될 뿐이었다.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가 각자 지인들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연구실을 나갔다. 문득 부원장임에도 인맥이 가장 좁다는 생각에 김지훈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민 부원장에게 미리 배워 둘걸.’
그나마 외과 학회라는 연결 고리가 있었다.
“선생님, 김지훈입니다. 그동안 별일 없으셨습니까? 자주 연락 못 드려 죄송합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무슨 일 있어?)
몇몇 학회 임원들과 통화한 결과 비공식적으로도 들은 말이 없다고 했다. 하긴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면 이준영 교수 귀에 바로 들렸을 것이다.
내친김에 초안을 잡은 후 상의하려 했던 부산 병원에도 전화를 했다. 이미 안면이 있는 데다 간 이식이라는 공통점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해 다행이었다.
(우리 병원에서도 학회 설립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다들 바빠 제대로 상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생각하고 계셨다니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 병원에서 첫 내부 회의가 열립니다. 기본적인 입장이 결정되면 일간 찾아봬 상의하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이구! 한 발 빠르시네요. 길이 멀어서 죄송하지만 찾아오신다면 우리야 감사하죠. 언제든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혹시 다른 병원도 학회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말이나 연락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까?”
(내부에서 오가는 말은 많았지만 외부 병원 선생님께는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왜 그러시죠?)
“같은 계획을 가진 병원이 있으면 공동으로 추진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오늘 통화 감사했습니다. 일간 내려가 충분하게 협의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부산 병원은 확실히 논의 단계였다.
전문 병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고, 무척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이상 기본적인 부분부터 상의하는 데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역시 관건은 H 병원이었다.
‘우리를 포함해 세 개 병원의 발언권이 가장 셀 수밖에 없지만, 모든 병원이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해야 한다는 자세를 잃지 않으면 H 병원과의 협의도 순조로울 거야. 일석이는 통화 끝났나?’
손일석의 연구실을 찾으려던 김지훈이 돌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기존 시설을 신관으로 옮기는 중이라 연구실에 있을 턱이 없었다. 다소 시끌벅적한 복도를 지나 집담회 중인 회의실로 향했다.
앙꼬 없는 찐빵일 줄 알았다.
오판도 이런 오판이 없었다.
부원장이 된 후 간덩이가 부어 스승과 이경석의 공력은 물론 신 사인방인 후배들의 힘까지 무시했던 모양이었다. 더욱이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위력이 줄지 않는 화염방사기를 무수하게 경험하고도 말이다.
‘스쳐도 사망이지.’
이혁원, 나종진, 송진우를 필두로 펠로우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경철은 아예 한 줌 재로 변해 하늘하늘 흩뿌려진 상태였다.
“분위기 살벌했구나.”
“말도 마십시오. 시작하자마자 이준영 선생님이 포문을 열더니, 평소 제일 온화하셨던 안호석 선생님까지 밀어붙이시는데 죽는 줄 알았습니다.”
교수 임용 결정이 얼마 안 남은 펠로우 삼 년 차들의 호소였다. 전공의 때처럼 바짝 긴장하고 집담회에 임했을 모찬우와 한수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신 많이 배웠겠네.”
“배움의 길이 너무 험난하네요.”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왜 이래?”
툭툭 어깨를 두드리며 펠로우들을 위로하던 김지훈이 나직한 헛기침을 터트렸다. 올바른 원칙만 지킨다면 누가 있건 없건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간 이식 학회도 마찬가지였다.
설령 H 병원과 이견이 발생하거나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이 걸린다 해도 모두가 인정하는 원칙을 지키는 쪽만이 뜻을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해와 양보 또한 중요한 요소였다.
‘어느 한 병원의 주장만으로 설립될 학회가 아니다. 핵심 사항을 합의할 수 있다면 부차적인 문제는 충분히 양보해야 한다.’
통화할 사람이 많은지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가 보이지 않았다. 결과가 궁금했지만 섣부른 판단인 데다 일과가 끝난 후 전체 회의가 열릴 예정인 까닭에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었다.
회진을 돌기 위해 이준영 교수와 함께 병동으로 올라가면서도 김지훈은 H 병원에 대해서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핵심 가치를 확인했다.
“선생님, 우리 과만이 아니라 관련 분야 전체가 참여하는 학회를 만들어야 의미가 있겠죠?”
“무슨 일 있어?”
이럴 때는 눈치가 귀신같은 스승이었다.
“아닙니다. 전례가 없는 일이라서요.”
“간 이식에 국한하면 다른 대안이 없어.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판단한다.”
“알겠습니다. 오후 회의가 끝나는 대로 진충기 선생님, 손 교수와 함께 진행하겠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잠시 김지훈을 보았다.
‘어떤 길이 정답인지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지금 네가 걷고 있는 길이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고 믿는다.’
장년의 스승이 중년 제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왠지 든든해진 김지훈이 등을 폈다.
회진을 끝낸 후 진충기 교수, 손일석에게 통화 결과를 듣는 내내 몸을 굽히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넘어야 할 산이 있으면 넘고, 건너야 할 강이 있으면 건너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