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김지훈이 반색했다.
본인 의사는 물론 서울 병원 외과와 어떤 말이 오갔는지 모르지만 오래간만에 본 후배였다. 내심 일주일 가까이 지나 불안했는데 얼굴을 보니 좋은 소식을 들고 온 것 같기도 했다.
결과를 떠나 반갑기 짝이 없었다.
커피 한 잔 내왔다.
“어쩐 일이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신 이사장과 이혁민 선생님하고 얘기됐어도 오만석 선생 생각을 직접 들어야 결정이 나는 거지.”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응급 의학과를 준비하다 뒤늦게 위장관 파트를 시작해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간 이식 파트를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생각이었다.
제 입으로 묻기 민망한 내용이라 머뭇거리기 마련인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세월이 꽤 흘렀건만 타인을 압도하는 큰 덩치에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졌던 오만석답게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과장님하고 간 이식 파트를 담당하는 진충기 선생님에게 물어봐야 할 말 같은데.”
“수술하시는 동안 이미 말씀 듣고 왔습니다.”
“좋은 소리 들은 모양인데 자신 없어?”
“제가 자신감 빼면 시체입니다만 사안이 다르지 않습니까? 선생님 의견을 꼭 들은 후 결정하고 싶습니다. 제가 전문 병원에 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김지훈이 웃었다.
“난 좋아.”
“간 이식 공여자 수술은 언제 주실 겁니까?”
“너무 앞서간 질문이고, 진충기 선생님이 결정하실 일이지만 도와줄 수는 있어. 물론 내 눈에 들어야겠지?”
“가장 어려운 조건을 거시는군요.”
“온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오만석이 눈가를 굳혔다.
“솔직히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습니다. 이혁민 선생님 밑에서 배우며 이제야 전임 강사에 한 발 다가섰습니다. 제가 온다면 교수가 될 수 있습니까?”
김지훈도 눈가에 힘을 주었다.
‘세부 전공을 떠나 역시 병원 선택에 가장 큰 요인이 분명해. 나라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면 옮길 이유가 없겠지. 솔직하게 말하는 게 맞아.’
“확률적으로는 서울 병원에서 근무할 때 교수가 될 가능성이 더 높아. 하지만 최고의 써전과 수술 팀을 만들어 가는 것이 내 목표야. 우리가 인정하는 후배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제게 달렸다는 말씀이시군요?”
“누구한테나 적용되는 원칙 아니겠어? 하지만 한 가지만 알아 둬. 내 역할은 순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우리가 함께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거야. 자격이 된다면 탈락할 이유가 없어. 오만석 선생 스스로 왜 필요한지 증명했으면 좋겠다.”
사실 여건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종합 병원을 건립한다면 지금보다 몇 배 이상의 교수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금부터 훌륭한 인재들을 모아 미래를 대비해야 했다. 그러나 목표일 뿐 확정되지 않은 일인 데다 몇 해는 기다려야 하기에 성급하게 꺼낼 사안이 아니었다. 당장은 간 이식 센터의 규모와 발전 여부를 두고 판단하는 것이 마땅했다.
신현수와 사전에 얘기가 된 이상 오만석도 종합 병원 건립을 알고 있을 테고, 그 여파가 자신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를 리 없었다.
오만석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종합 병원으로 승격된다면 교수 자리가 많이 필요할 텐데, 그 점은 염두에 두시지 않습니까?”
‘다른 놈이 말했으면 좋게 보이지 않았을 텐데 만석이 너는 그냥 솔직하게만 보이네. 내가 너무 감정에 휩쓸리는 것은 아니겠지?’
“당연히 많이 필요해. 하지만 특정인에게 기회가 더 주어지는 것은 아니야. 우리보다 더 능력이 있고, 자격을 갖춘 선생님이 계시다면 기회는 없어. 나 역시 예외가 아니야.”
“선생님도요? 부원장님이시잖아요.”
“자리가 무슨 소용이야? 부원장이면 저절로 실력이 늘고, 인간성이 좋아지기라도 한대?”
“항상 똑같으시네요. 감사합니다.”
“뭐가?”
“새로운 도전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 말씀 들으니까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팍팍 듭니다.”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신 교수 빈자리가 커. 생각만 하지 말고 다른 선생 초빙하기 전에 빨리 결정해. 오면 두 팔 벌려 환영해 줄게.”
“환영이요?”
오만석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김지훈이 말하는 환영은 술자리가 아니라 제대로 가르치겠다는 의지였다.
전문 병원을 찾을 때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선생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다면 저야말로 환영입니다. 체력과 정신력 모두 전공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늦은 만큼 더 환영해 주십시오.”
“역시 오만석이야. 빨리 와.”
“정리되는 대로 근무 시작하겠습니다.”
시원시원한 성격대로 빠르게 결정했다.
김지훈이 오만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전문 병원에 새로운 활력을 실어 주고, 큰 힘이 될 인재임이 분명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키웠을 이혁민 교수에게 미안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똑! 똑! 똑!
‘민 부원장인가?’
“들어오세요.”
연구실로 들어서던 민정호가 순간 발을 멈췄다. 꽤 놀랐다는 표현이었지만 만날 예정이 없었던 진상미는 아예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깜짝 놀라 주춤 뒤로 물러섰다.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만석아, 웃자. 그 덩치에 인상이 좋다고 말하기 어려운데 가운 벗으면 누가 의사로 보겠니!’
“민 부원장님, 서울 병원에 근무 중인 오만석 선생님입니다. 곧 우리 병원에서 근무하실 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민정호입니다.”
“오만석입니다. 행정부원장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했는데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가 보겠습니다.”
“날짜 정해지면 바로 연락 줘.”
“예.”
뚜벅! 뚜벅!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민정호가 살짝 넥타이를 고쳐 맸다.
‘이준영 선생님보다 더 큰 것 같네. 저 손으로 어떻게 섬세한 수술을 하지?’
“한 덩치 하시네요.”
“응급실이 조용해질 겁니다. 근데 진상미 씨는 다음 주부터 근무일 텐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인수인계 중입니다. 신관 공간 배치와 시설 설치 결과부터 검토하시죠.”
민정호의 말에 진상미가 웃기만 했다.
‘인수인계가 아니라 일을 시키고 있네.’
몇 장의 자료를 받아 꼼꼼하게 확인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원장실부터 연구실까지 의료진이 사용할 공간을 비롯해 각 직군에게 필요한 공간과 시설 배치가 무척 효율적으로 보였다. 문제는 마지막에 첨부된 깨알 같은 숫자로 된 서류였다.
“이 부분은 재정 문제니까 최종 비용만 알면 되죠? 세세한 지출은 항목만 확인하겠습니다.”
“부원장님, 저나 진상미 씨를 믿으십니까?”
“당연히 믿죠.”
“믿으신다니 감사합니다만, 재정 문제는 그렇게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최소한 지출 항목과 그에 따른 비용이 적절한지 파악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걸 일일이 다 파악하라고요?”
“종합 병원 건립 실무를 책임져야 하는 자리를 맡으셨습니다. 적절성까지 판단하셔야 합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각자 영역이 있고, 난 이런 일 말고도 해야 할 일이 훨씬 더 많아요. 서로 믿고 이대로 갑시다.”
“부원장이라는 자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몰라도 제 생각과 다르시네요. 무엇보다 업무 파악이 안 되면 교차 검증을 할 방법이 없습니다.”
“교차 검증이요?”
“일반 시설 부분은 우리가 잘 알지만 의료 쪽은 부원장님이 가장 잘 아십니다.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는 이상 반드시 필요한 절차입니다. 종합 병원 건립을 추진하는 과정이나 확정 이후에도 십 원 한 장 허투루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매사 객관적인 방식으로 치밀하게 추진하는 것은 환영해야 마땅한 일이었지만, 재정 부분의 실무까지 알아야 한다는 말에 김지훈이 말을 잃었다. 속내를 알기라도 한 것처럼 민정호가 입도 벙긋하지 못하게 쐐기를 박았다.
“실무자에 준하는 능력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결정 권한을 가진 사람이라면 최소 자료를 해석할 정도의 능력은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정확하고,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흐음! 맞는 말이긴 한데.”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학회 설립에도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진상미 씨, 부원장님께서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세요.”
진상미가 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늦은 시간, 함께 온 이유였다.
민정호는 결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을 테고, 김지훈 역시 일정 부분 필요하다는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앞으로도 반복적으로 벌어질 일이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이지?’
김지훈이 귀를 기울였다.
쉬운 설명 덕인지, 애초 기본적인 자료였던 덕인지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따라오는 약간의 두통을 피하긴 어려웠다.
“집기 같은 경우는 단체 구입을 통해 단가를 많이 낮췄다는 말이죠? 대신 주말 내에 끝내기 위해 인건비는 더 들었고요. 청소 업체에 지불하는 돈도 만만치 않네요.”
“무조건 저가를 제시하는 업체를 제외한 탓입니다. 민 부원장님과 함께 적정한 액수를 산출했고, 가장 근사치를 써낸 업체로 선정했습니다.”
“두 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내일 오후부터 시작해 일요일 저녁이면 끝나는 거죠?”
민정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장을 넘겼다.
“월요일 근무에 차질 없도록 진행하겠습니다. 문제없다고 판단되시면 여기 서명해 주시죠. 내일 원장님께 최종 결재를 받겠습니다.”
서명란을 본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원장 직무 대행?
“직무 대행이요?”
“공고가 나왔지만 아직 최종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는 직무 대행이 맞습니다.”
참 꼼꼼했다.
‘특별한 말이 없으니까 승인된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왕이면 부원장이라고 해 주지. 능력 어쩌고저쩌고하면서 꼭 그걸 따져야 하나?’
속으로 투덜거리던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과장란에 결재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내용과 형식이 달라진 만큼 책임도 크다는 말이겠지만 묘한 흥분이 다가왔다.
김지훈이 힘차게 서명했다.
‘후우! 서명 하나 하는 게 뭐가 대수라고 가슴이 다 떨리네. 이런 맛에 다들 기를 쓰고 가려고 하는 걸까?’
“우리가 함께하는 첫 번째 일이네요.”
“자주 만날 일만 남았습니다.”
“자주 만나야죠. 아직 논의 일정조차 연락을 받지 못했지만 종합 병원 건립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데 우리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두 분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음 주까지 초안을 작성해 상의드리겠습니다. 진상미 씨, 일어나죠. 부원장님, 가 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김지훈이 의자에 몸을 묻었다.
흔들흔들 회전의자를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다음 주까지 초안을 만든다!’
“할 일이 많네.”
컴퓨터를 켰다.
틈틈이 만들어 온 간 이식 학회 설립에 대한 자료를 정리했다. 재정 서류를 본 탓인지 불현듯 사람 한 명 만나는 일에도 돈이 든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공적인 일일까? 사적인 일일까?’
학회 참석은 사적이지만 전문 병원의 성격상 설립은 공적인 일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 탓에 생각지도 못한 일까지 해야 했다.
예산 청구였다.
얼마 안 되는 돈이었지만 허투루 쓸 수 없어 신중하게 작성하느라 시간을 꽤 잡아먹었다. 각자 전문 분야가 있다지만 민정호, 진상미를 비롯해 행정 직원들의 능력과 노고에 새삼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구나.’
더 이상 병원에 머물다간 가정을 등한시하는 아빠와 남편이 될 상황이었다. 연구실을 나온 김지훈이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다.
아직 고민해야 할 일이 남았다.
‘휘플!’
유문을 보존해 온전한 위를 남기며 수술할 때 따를 위험성은 물론 어떻게 수술해야 할지도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다. 치명적인 장기 몇 개를 제거하는 수술이니만큼 환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했다.
머릿속으로는 간단했지만 무수한 선배들이 그걸 몰라서 유문을 포함해 위를 절반 가까이 절제한 것이 아니었다. 기술과 장비의 차이 등을 감안해도 인간의 육신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수술이었다.
‘이제 일주일도 안 남았네. 관련 논문을 뒤져 봐도 유문을 보존하는 휘플을 했다는 보고가 없었으니까, 도훈이도 고민하고 있겠지?’
각 장기의 위치와 수술 과정을 그려 보았다.
또 골치가 아팠지만 부원장 업무를 수행할 때보다는 나았다. 역시 복잡한 숫자보다 인체의 신비, 해부학이 더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지훈이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간 이식 학회 설립과 새로운 방식의 휘플 수술에 신관 이주와 부원장 업무 수행까지, 고민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후우! 막막하네.’
극복할 길은 하나!
카르페 디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