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참석자 모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먼저 미흡하기만 한 제게 과분한 자리를 맡겨 주신 신 이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종합 병원 건립은 우리의 목표이자 숙원 사업입니다. 김진호 원장님을 중심으로 모두 하나가 돼 주시길 바랍니다. 이를 바탕으로 추진해야만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결과는 결과로써 말씀드리겠습니다.”
화려한 언변이 필요한 때가 아니었다.
짧은 소감이자 각오가 오히려 믿음을 주었다.
짝짝짝짝!
박수가 터졌다.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누가 어떤 직위를 맡든 각자 고유의 업무를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이며, 우리 병원의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계획을 제안합니다. 바로 간 이식 학회 설립입니다.”
대부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간 이식 수술을 하는 일반외과 내부에서 상의하고 추진하면 되는 일을 왜 꺼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외과 학회 산하 분과를 만드는 일이 드물지 않은 데다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가 학회 이사인 이상 별다른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의료보험 적용 이후 급격하게 수술이 늘어 설립 필요성도 충분했다.
“전체 회의에서 논의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이 자리에서 말씀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간 이식 학회는 결코 일반외과 의사만으로 구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과, 방사선과, 간호과는 물론 장기 코디네이터를 포함한 행정 파트까지 유기적으로 돌아가야만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는 수술입니다. 따라서 관련된 모든 분야가 모여 학술적, 실제적 발전을 이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웅성웅성 회의실이 소란스러워졌다.
학회와 학회가 모여 연합 학술 대회를 여는 일마저 흔치 않았다. 그런데 의사부터 행정직까지 망라한 학회를 만든다니 당혹스러운 제안이었다.
“우리도 학회 설립에 참여하라는 말로 들리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합니까?”
“물론 외과 학회 산하가 적당한지부터 시작해 어려움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길을 갈 수 있고, 가야만 합니다. 우리 중 누구 한 명만 빠져도 간 이식 수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생각도 못한 제안이라 당황스러울 지경입니다. 만일 설립을 추진한다면 누가 주도합니까?”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우리 모두입니다. 일반외과는 이경석 과장님, 진충기 교수님, 손일석 교수님이 앞장서실 겁니다. 따라서 각 과의 과장님, 간호 부장님, 간 이식을 담당하는 행정 직원분들 모두 다른 병원 관계자분들을 만나 이해를 구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기를 설득해야 합니다.”
“외과 내부적으로 사전 작업은 돼 있는 겁니까?”
“오래전부터 구상은 해 왔지만 구체적인 사안이 오고 간 것은 없습니다. 동의하신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간 이식 학회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될 겁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내 저마다의 가슴에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하나의 학회를 설립한다는 설렘과 기대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창립 멤버가 된다는 사실이 주는 감흥이었다.
간호 부장이 발언을 청했다.
“먼저 우리 간호과의 중요성을 인정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내부적으로 상의해야겠지만 간호과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부원장님의 제안을 수용하고,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경아의 호흡이 살짝 가빠졌다.
점차 개선되고 있지만 전문 의료직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의사와 간호사의 관계가 수평적이지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 물론 지시를 내리고 이행해야 하는 업무 특성의 차이가 있고, 반드시 지켜야 할 일이지만 그것이 상하 관계를 규정하는 요소가 될 수는 없었다.
그간 불만의 목소리가 많았다.
전문 병원 상황은 다소 다르다고 해도 직군끼리의 해묵은 관념이나 갈등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었다. 때문에 사소한 말 한마디나 가벼운 실수 하나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일까지 종종 벌어지곤 했었다.
김지훈은 그런 현실을 혁파하고자 했다.
개인의 발전만이 아니라 병원 전체의 발전을 도모하는 길이기에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고마울 뿐이었다.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지훈 씨, 고마워요.’
정말 고마운 일일까?
아니다.
정상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
옳든, 그르든 사회적 관념만큼 완강한 것도 없다. 비록 한순간에 고쳐지지 않겠지만 꾸준히 개선해 나간다면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다른 과 분들도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실무를 맡게 된 입장에서 당부 말씀 드리겠습니다. 민정호 부원장님의 역할이 무척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큰 문제 없었지만 앞으로는 여러분의 협조가 더욱 필요합니다. 자료 요청 등 요구 사항이 있을 경우 적극적으로 응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짝짝짝짝!
큰 박수가 터졌다.
원장단 선임 문제를 다 같이 논의하고, 결정한 자리로도 의미가 크건만 김지훈의 새로운 제안까지 겹쳐 다들 가슴이 뜨거워졌다.
직위, 직군을 떠나 모두 동료다!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걱정했는데 오히려 분위기를 더 끌어 올렸네. 지훈아, 네가 있어 마음 놓고 서울로 갈 수 있어 정말 고맙다.’
“시간이 늦었습니다만, 한 말씀 드리고 끝내겠습니다. 송재덕 원장님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전 이번 주 근무를 마지막으로 서울 병원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신임 원장단분들과 함께 우리 병원을 이끌어 나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평생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렇다고 해서 떠나야 하는 사람과 보내야 하는 사람의 마음이 편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다들 입을 열지 못했다.
“신 이사장도 그렇고, 나도 곧 돌아올 텐데 왜들 이래? 왜? 김 부원장, 우리 빨리 보고 싶으면 종합 병원 건립 확실하게 추진해. 내가 단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하도록 자료 준비해야 한다. 미진하면 서울 병원 확장이 먼저 시행될 거야. 알았지? 난 부원장 편 아니다. 아니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민 부원장, 우리 김 교수 할 일이 아주 많은 사람이야. 힘들지 않도록 잘 도와줘. 서울 병원 올 일 있으면 나 꼭 보고 가. 알았지? 그래야 한다.”
때론 엄한 아버지 같은 직장 상사로서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고, 때론 동네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알뜰살뜰 직원들을 살핀 송재덕 교수였다. 설령 누군가 실수를 해도 탓하거나 책임을 미루지도 않았다.
아쉽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허허! 이거 밥도 못 먹고 가려니 발이 안 떨어진다. 안 떨어져. 늦었지만 술 한잔할 사람 있나? 내가 산다. 내가 술 산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를 빼고는 모두 마지막 인사를 하고자 했다. 예상외로 많은 인원에 송재덕 교수가 좋아하면서도 쩔쩔맸다.
“너무 많아. 너무. 나 돈도 얼마 없다. 없어. 일 있는 사람은 집에 가자. 근데 자리가 있을까? 없으면 어떻게 하지?”
민정호가 쓰윽 나섰다.
“원장님, 식당 예약해 놨습니다.”
“벌써? 어떻게 잡았니? 어떻게?”
“단체 손님 마다하는 식당이 있겠습니까? 삼겹살 맛있다고 소문난 집이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다. 좋아. 가자. 가자.”
즐거우면서도 씁쓸한 자리였다.
맨 마지막에 서서 뒤를 따르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고경아를 찾았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퇴근할 시간이 넘어도 한참 넘었다.
“경아 씨, 희연이는요?”
“정훈이랑 놀고 있을 거예요.”
“후우! 다행이다.”
자식 건사야말로 맞벌이 부부의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24시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사실 방과 후에 돌봐 줄 사람을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희연이에게도 미안하고, 일석이와 처제한테도 미안하네. 앞으로 시간이 더 없을 텐데 어쩌지? 빠질 수도 없고, 당장 오늘부터 문제네.’
걱정을 알기라도 한 듯 고경아가 속삭였다.
“잠깐 얼굴만 보이고 먼저 들어갈 테니까 원장님 잘 모셔요. 오늘만큼은 특별히 늦게 들어와도 봐줄게요.”
“어후! 고마워요.”
“제부에게 연락했으니까 곧 올 텐데,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요.”
김지훈이 척 엄지를 치켜세웠다.
인간관계 사소한 일로도 좌우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고 해도 사실상 송재덕 교수와 신현수 송별회가 벌어지는데 연락 안 했다간 두고두고 욕먹었을 것이다.
고경아 없었으면 이 험난한 세상 어떻게 살아갔을까? 아마도 수없이 많은 부분을 빠트린 채 매일매일 둔한 자신을 탓했을 것이다.
환송회가 시작됐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고 가며 수많은 대화를 나눴다. 늦지 않게 합류한 손일석의 재치와 적절한 농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원장님이 원래 통이 어마어마하게 크신 분인데, 직원 몇 명 안 되는 병원에서 얼마나 심심하셨겠어요? 서울 병원 정도는 돼야 성에 차실 겁니다. 원장님, 안 그렇습니까?”
“맞다. 맞아. 역시 우리 일석이가 딱 부러져. 축하받을 일이다. 축하받을 일.”
“신 교수는 더하죠. 우리 목줄을 쥐고 흔드는 자리에 앉았는데 지금 우리가 서운해하는 게 말이 됩니까? 승진했다고 슬퍼하면 속으로 욕하는 겁니다. 신 이사장님, 전 정말 기뻐하고 있습니다.”
“손 교수, 왜 이래?”
“나도 부원장 되고 싶어서 그래.”
“하하하!”
김지훈도 축하 인사를 받기 바빴다.
내일 당장 수술이 두 건이나 있는 데다 본의 아니게 벌여 놓은 일이 산더미인지라 밀려드는 술잔이 곤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이준영 교수와 민정호 사이에 앉아 속도 조절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할 얘기가 많았다.
“선생님, 우리 과 내부부터 간 이식 학회 설립에 관한 생각을 정리해야 할 텐데 언제 시간 되십니까?”
“이번 주 내로 시간 잡아.”
“계획이 서면 바로 손일석 선생과 진충기 선생님에게 맡기겠습니다.”
“H 병원은 물론 부산 병원 선생들과 충분히 상의해야 돼. 두 병원이 빠지면 학회 자체가 유명무실하게 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김지훈이 슬쩍 민정호에게 눈길을 주었다.
분명 술잔 쉬지 않고 드는 모습을 봤는데 혈색이 말짱했다. 여전히 표정을 보이지 않았고, 술로 푹 젖었을 혀도 꼬부라지지 않았다.
‘강적이야.’
“민 부원장님, 종합 병원 건립 계획안을 언제 볼 수 있죠? 가급적 빨리 봤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미 작업을 시작했고, 진상미 씨가 본격적으로 합류하면 세세한 자금 소요까지 추산해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당분간 간 이식 학회 설립 때문에 시간을 내기 어려울 수 있어요. 전적으로 맡길 테니까 초안이 나오면 원장님과 함께 보기로 하죠.”
“실무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결정 난 덕인지, 스승과 민정호가 전하는 든든함 때문인지, 아니면 슬슬 기어 올라오는 술기운 탓인지 의외로 담담했다.
꽤 늦은 시간에 환송회가 끝났다.
몇몇이 아쉬워 이 차를 외쳤지만 무쇠 체력을 가졌던 젊은 날이 아니었다. 송재덕 교수, 이준영 교수, 신현수를 차례로 배웅한 김지훈이 내일을 기약하며 집으로 향했다.
김지훈이 하늘을 보았다.
맑은 날이라도 별을 보기 힘든 것이 당연해졌다. 하지만 사방을 밝히는 빛 어딘가에 두 개의 별이 항상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오래간만에 인사드리네요. 저 부원장 됐습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최연소 대학 병원 부원장이라네요. 희연이도 잘 크고, 경아 씨에게 정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행복하게 잘살 테니 웃으며 지켜봐 주세요.’
뚜벅! 뚜벅!
내일은 또 어떤 날이 펼쳐질까?
다음 날.
원장실 명패가 김진호 교수로 바뀌었다.
교체할 필요가 있는 집기들을 하나둘 치우는 사이 송재덕 교수의 흔적도 따라 사라졌다. 한동안 특유의 온기는 남아 있을지 몰라도, 곧 김진호 교수만의 새로운 색깔을 띠게 될 것이다.
신현수의 연구실이 텅 비었다.
누군가의 공간이 돼야 하지만 신관 이주 날짜가 결정돼 당분간 빈 교수실로 남아야 했다. 썰렁해진 공기가 신현수의 부재를 더욱 아쉽게 만들었다.
하나둘 조용한 변화가 시작됐고, 김지훈도 새로운 업무에 집중해 속도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다들 바쁜 일과에 짓눌려 모이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세상일 예정한 대로 이루어지면 힘들 일 거의 없을 것이다.
어느새 금요일 오후였다.
일과를 모두 마치고 부원장실을 겸하게 된 연구실에서 휴식을 취하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아이고! 할 일이 마구 밀어닥치네. 내일 학회 설립 건을 논의해야 하는데 하필이면 신관 이주하고 겹쳐 회의할 공간이나 있을지 모르겠네. 다음 주 휘플 때 유문 보존술도 시도해야 하고 바쁘다. 바빠.’
준비할 것이 많은 상황에서 신관 이주에 따른 문제까지 최종 점검해야 했다. 애초 부족한 공간을 해소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적재적소에 필요한 시설을 배치해야 신관을 건립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민 부원장은 왜 안 와? 아직 일이 안 끝났나?”
똑! 똑! 똑!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오는 모양이었다.
“들어오세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던 김지훈이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스승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의사 한 명이 꾸벅 인사를 했다.
“선생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오만석 선생?”
“하하하! 잘 지내셨죠?”
우렁찬 목소리가 연구실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