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91화 (1,191/1,329)

17화

김지훈이 깊은 고민에 잠겼다.

‘부원장이 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까지 추구했던 목표와 충돌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떤 식으로 일해야 할까?’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했다.

부원장으로서 할 일은 명확했다.

전문 병원을 종합 병원으로 탈바꿈시켜 지역의 거점 병원이자 유수한 대학 병원의 일원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간 이식 센터의 확장과 발전도 그 안에서 이뤄 내야 했다.

의사의 업무도 결코 등한시할 수 없었다.

결국 같은 맥락이지만 간 이식 학회를 설립하는 일, 췌장암 등에 시술되는 휘플 수술을 복강경으로 시행하는 일, 자신을 포함해 최고의 써전을 길러 냄과 동시에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드는 일 등 모든 목표를 초지일관 밀어붙여야 했다.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새벽이 돼서야 머릿속이 어느 정도 정리가 돼 눈을 붙였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되는 일인 탓에 허점이 많겠지만 핵심은 잡아냈다.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하면 된다. 마음 편히 먹자. 하나하나 부딪치며 해결하면 되겠지.’

잠이 부족한 탓에 입이 깔깔해져 간단히 우유 한 잔 마시고 출근을 서둘렀다. 이른 시간인지라 병원 로비가 한산해야 하건만 몇몇 직원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진상건이 벌인 일의 여파가 가라앉으려면 아직 멀었다. 아마도 한동안 보아야 할 모습일 것이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다잡으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이런 때일수록 실수가 나오기 쉬워 진료 중간중간 수술 방에 들러 분위기를 다잡았다.

“진충기 선생님, 한동안 뒤숭숭할 텐데 흐트러지지 않도록 손 교수와 함께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과 과장들과 상황을 공유했다.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터라 귀를 기울였다.

병원이 흔들리면 모든 직원이 불안에 휩싸이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전문 병원의 미래를 믿고 기존 자리를 박차고 나온 동료들이었다. 전말을 알고 난 후 분노를 금치 못하면서도 한편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병원 잘못되는 줄 알고 불안해서 잠도 못 잤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네. 김 과장, 그동안 고생 많이 했겠어. 고맙다.”

“어려운 일은 신 교수하고 민 부원장이 다 했어. 펠로우들이 동요할지 모르지만 일단 신 교수 이름으로 발표가 날 때까지 자세한 얘기는 함구했으면 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뒷마무리를 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루 종일 시간 날 때마다 병원 안을 돌아다니며 불안해하는 동료들을 수습해야 했다. 가끔 민정호와 마주쳤지만 똑같은 상황에 처해 별다른 말을 나누지 못했다.

어느새 하루가 저물었다.

이준영 교수와 만나기 위해 회의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로비가 가득 찼다고 할 정도로 직원들이 모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과장님! 아니, 부원장님.”

직원 입에서 부원장 소리가 나왔다.

“부원장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조용히 벽을 가리켰다.

두 장의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신현수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첫 공고를 통해 전임 이사장인 진상건과 김병오 이사의 구속 사유를 자세하게 열거하며, 임시 이사회 구성 및 신임 이사장 취임을 알렸다.

“이사장이란 사람이 재단 재산을 몽땅 빼돌리려 했다니, 도둑놈한데 병원을 맡긴 꼴이었네요.”

“지금이라도 바로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죠. 이미 빼돌린 돈이 있을 텐데 큰 피해가 없었으면 좋겠네요.”

문제는 두 번째 공고였다.

<송재덕 원장님을 서울 병원 원장님으로 이동 발령합니다. 오늘부로 현 부원장인 김진호 교수님과 일반외과 과장인 김지훈 교수님을 각각 전문 병원 원장님과 부원장님으로 인사 조치합니다. 신임 일반외과 과장은 이경석 교수님으로 내정됐습니다.>

김지훈이 할 말을 잃었다.

불과 하루 전 수락 의사를 단 한 명에게 밝혔는데 이미 결정 사항이 됐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빠른 인사가 필요하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적어도 오늘 상의를 한 후에 최종 결정을 할 줄 알았는데 당황스럽네.’

“부원장님! 축하드립니다.”

“우리 병원 역사상 가장 빨리 부원장님이 되셨네요. 역시 능력 있는 분은 다르다니까요.”

김지훈이 멋쩍은 표정만 지었다.

마침 고경아를 비롯해 수술 방 주간 팀이 퇴근을 했다. 공고문을 보자마자 난리가 났고, 고경아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함박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축하한다는 말만 족히 수십 번을 들었다.

고경아에게 회의 참석한다는 눈짓을 보낸 김지훈이 재빨리 사라졌다. 누군가는 불편해하고, 누군가는 시샘할 수도 있지만 최소 인심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에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후우! 왜 식은땀이 나지?’

김지훈이 회의실로 들어섰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몇몇이 모이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송재덕 교수, 이준영 교수, 김진호 교수, 신현수, 이경석을 비롯한 각 과 과장들에 민정호와 주요 행정 간부들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간호 부장과 고경아도 얼굴을 보였다.

전문 병원 핵심이 모두 모였다.

김지훈이 다소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전체 회의가 열렸고, 공고까지 낸 이상 오늘 이 자리에서 중요 사항이 모두 결정될 것이 빤했다.

‘이번 주 내에 확실하게 정리할 셈이구나. 현수, 네 얼굴을 보는 날도 며칠 안 남았네.’

신현수가 모두 발언을 했다.

“갑작스럽게 통보했지만 모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일로 많이 불편하셨을 겁니다. 수사 기관 요청 등 사정이 있어 자세하게 말씀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아울러 공고문을 보셨겠지만 중요한 인사이동을 두고 사후에 알려 드리게 된 점 역시 양해 부탁드립니다.”

김지훈이 입술을 오므렸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무게감이 느껴져. 이사장이 되더니 변한 것 같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나?’

“나도 갑자기 서울 병원으로 가 달라는 말에 당황했지만, 다들 자세한 정황을 알았을 테니까 이해하고 넘어갑시다. 이런 일에 모든 의사들이 신경 곤두세워야 환자에게 문제만 생기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지금은 지나간 일이 아니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논의해야 합니다.”

이준영 교수의 묵직한 말까지 더해져 분란의 소지 자체가 사라졌다. 신현수가 가볍게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한 후 경과보고를 했다.

“관련자들 전원이 조기에 사법 처리 됐습니다. 전임 이사장이 벌이려던 일은 이번 주 내로 모두 백지화될 것이며, 다행히 실질적인 피해 규모가 크지 않아 충분히 수습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김지훈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가장 우려했던 부분인 실제 피해가 작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이후 어떤 내용을 논의할지 빤하기에 어젯밤 내내 고민했던 문제들을 정리했다.

“임시 이사회의 결정이 있어야 하지만, 비상 상황인 만큼 이 자리에서 결정한 부분은 모두 통과될 것입니다. 먼저 송재덕 원장님을 서울 병원 원장님으로 모시게 됐음을 알려 드립니다.”

이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이경석은 물론 김지훈도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진상건 이사장에게 붙어 서울 병원을 위기로 몰아간 기존 원장을 대신할 사람은 없었다.

짝짝짝짝!

추인이 아니라 환영과 축하의 박수였다.

“서울 병원 정리되면 다시 오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니네. 은퇴할 날이 머지않았네요. 그때도 이렇게 박수로 맞아 주셔야 합니다. 뒷방 늙은이 취급하면 안 됩니다. 아암! 안 되고말고.”

일부 웃음이 터졌지만 씁쓸했다.

직종 간, 혹은 직위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받는 존경 이상으로 인기가 많았던 송재덕 교수였다. 은퇴라는 말이 가슴 깊이 박혔다.

“은퇴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내 나이 되면 압니다. 세월 금방 가요. 사람 때 되면 물러나는 게 맞지, 자리 차고 앉아 봐야 후배들 앞길만 막아요. 그저 환자 볼 시간을 조금만 더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 이 교수는 벌써 하고 있는 일이잖아요.”

분위기 축 처졌다.

맞는 말이지만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이경석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고, 송재덕 교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동네 아저씨 웃음을 연신 터트렸다. 서울 병원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는 일이 만만치 않아 돌아올 날을 기약하기 힘들 텐데도 말이다.

신현수가 미소를 머금었다.

“원래 대가인 분들은 은퇴 후에도 오랜 시간 진료를 하셔야 하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래오래 함께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김진호 교수님을 원장님으로 모시는 일에 이의 있으신 분 있습니까?”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복잡한 문제가 많겠지만 지금까지 해 오신 대로 전문 병원을 훌륭하게 이끌어 주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각 과 고유 재량이지만 신임 일반외과 과장님이 되신 이경석 교수님께도 박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짝!

일사천리였다.

남은 안건은 단 하나였다.

신현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가벼운 웃음으로 고맙다는 마음을 전했다.

“신임 부원장으로 내정된 김지훈 교수님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문 병원 설립 때부터 최종 목표는 종합 병원으로 발돋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수많은 성과를 이뤄 냈지만 지금이야말로 모두 힘을 합쳐 준비해 나갈 때입니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개원 초기부터 함께 땀 흘린 구성원으로서 가슴 뿌듯한 말이었고,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다. 목표를 이룬 후 대부분 중책을 맡게 될 수밖에 없어 개인적으로도 큰 명예가 될 것이다. 실례로 전문 병원의 과장과 종합 병원의 과장은 위상 자체가 달랐다.

“문제는 제가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입니다. 비록 모든 사업이 백지화됐다고 하지만 서울 병원 확장 및 천안 병원 이전은 각 병원의 숙원 사업이 분명합니다. 또한 전임 이사장 사건을 통해 독단적 결정이 얼마나 큰 폐해를 가져오는지 잘 알게 됐습니다. 따라서 어느 때보다 이사장의 공평무사한 자세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중립을 지키신다는 겁니까?”

“확장, 이전, 종합 병원 건립, 이 세 가지 사업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평가하고자 합니다. 가장 타당성이 높은 사업을 일순위로 추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뜻밖의 선언이었다.

선대 이사장의 유업이자, 신현수 역시 지금까지 같은 목표를 갖고 노력해 왔기에 종합 병원 건립을 기정사실로 여긴 탓이었다.

곧바로 반발성 질문이 터졌다.

“일부 분야를 빼면 거의 전 부분에서 우리 병원의 역량이 다른 병원에 비해 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재단의 지원조차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추진한다는 말입니까?”

“우려하시는 점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김지훈 교수님을 부원장으로 내정했습니다. 민정호 행정부원장님과 함께 실무 팀을 맡아 어떤 이견도 없이 종합 병원 건립을 이뤄 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김지훈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재단의 도움 없이 우리 힘으로 종합 병원 건립을 이뤄 내라고? 이렇게 되면 일이 산더미처럼 몰려올 텐데 완전히 얘기가 달라지는 거 아닌가? 민 부원장은 미동도 없네.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도 영향을 안 받는 거야? 뭐야?’

“그럼 마지막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김지훈 교수님을 부원장으로 내정하는 데 이의 있습니까?”

일제히 김지훈을 보았다.

의사로서 탁월하다 못해 출중한 것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과장을 하며 보인 행정 능력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보다 많은 경험을 쌓은 타 병원 원장단을 상대해야 한다. 그것도 첨예한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말이다.

자신의 미래가 걸린 일이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대안이 있나? 대신할 사람이 있을까?’

송재덕 교수가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서울 병원 원장으로 내정됐다. 취임하는 순간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할 것이다. 어쩌면 얼굴 붉힐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이준영 교수는?

대가라 불리며 자타가 공인하는 의사지만 행정적인 일은 알레르기를 보일 정도로 멀리했다. 제자인 김지훈을 키우기 위한 방편이라는 말도 돌았지만 그간의 행적을 볼 때 틀린 판단이 아니었다. 더구나 총괄이 아닌 실무를 맡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

생각이 모아졌다.

김지훈 이상의 적임자는 없었다.

한 번 결정하면 뚝심 있게 밀어붙이면서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고, 결코 무시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일단 결정한 일에 쏟아붓는 열정과 의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나둘 동의를 표했다.

“동의합니다.”

초조한 기색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보던 고경아가 마지막으로 찬성 의사를 표시했다. 사실 이런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막중한 책임을 떠안은 김지훈에게 힘을 실어 주려는 신현수의 마음에 고마울 뿐이었다.

‘지훈 씨, 잘해 낼 거예요. 신 이사장님께도 여러모로 감사드려요.’

“이것으로써 김지훈 교수님의 부원장 취임을 확정하겠습니다. 김지훈 교수님!”

한마디 하라는 의미였다.

소감이 아니라 각오와 계획일 것이다.

김지훈이 천천히 일어났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일일이 눈길을 주었다.

‘최종 의사를 묻지도 않고 진행한 점은 마음에 안 들지만 누군가 맡아야 할 일이고, 모든 사람이 날 믿고 있다. 피하지 말자. 우리 손으로 종합 병원 만들어 보자.’

김지훈의 단호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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