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고성문이었다.
(김 과장, 나다.)
“예, 아버님. 어쩐 일이십니까?”
(손 교수에게 들었어. 부원장 됐다며? 축하해. 대학 병원급에서 자네 나이에 부원장 되는 의사가 어디 있겠어? 앞으로 일 열심히 하고, 손 서방도 좀 챙겨 줘. 정훈이 때문에 하라고 해도 못한다고 말은 하지만 마음이 좋지만은 않을 거야. 알았지?)
“아버님, 아직 결정이…….”
(어허! 신임 이사장인 신 교수가 결정했는데 무슨 소리야? 고민할 일이 아니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거야. 버스 떠난 뒤에 손 흔들면 무슨 소용이 있어?)
“알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날 잡아 밥 먹자. 집안 경사다.)
따르르릉!
(진상건 처리는 잘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부원장 역할에 집중해. 축하한다.)
“형님도 들으셨어요?”
(왜? 난 알면 안 돼? 김병오 이사 말고도 문제가 있는 이사 여럿 확인했으니까 운영에 지장이 많이 생길 거야. 이럴 때 김 과장이 역할을 해 줘야지. 계속 조사하느라 잠을 못 잤더니 무척 피곤하네. 끊는다.)
난리 났다.
여전히 고민이 필요한데 이미 부원장이 됐다. 확실하게 결정된 일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결론은 축하한다는 말로 끝났다.
범인을 단죄해야 할 때였다.
“손일석! 너 어디까지 전화한 거야?”
(집안 경사인데 알아야 할 사람에겐 다 연락해야지. 훈철이 형님한테 아직 전화 안 왔지? 방금 통화 끝냈으니까 곧 올 거야.)
“야? 너도 같이 있었으면서 내 입장 곤란해지게 왜 이래? 부원장이 옆집 개 이름이야?”
(김 과장,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나 맡아도 되는 자리가 아니야. 반드시 김 과장이 해야만 하는 일이야. 신 교수부터 진충기 선생님까지 아무 생각 없이 찬성한 것 같아? 우리 그렇게 맹탕 아니다. 널 믿기 때문에, 너만큼 잘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찬성한 거야.)
사람 무안하게 손일석이 무척 진지했다.
“스승님께 말씀도 못 드렸어.”
(자식! 별걱정을 다 하고 있네. 내가 누구냐? 어떤 대답을 하실지 빤한 거 아니야? 직접 타 주시는 커피 마실 생각이나 하셔.)
“얼마 전에 내가 한 말 잊었어? 간 이식 학회는 어쩌고?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진충기 선생님하고 내가 있잖아. 이준영 선생님도 발 벗고 나서실 텐데 뭐가 걱정이야? 설마 우리가 추진도 못할 정도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말이 아니라…….”
(얘기 끝났네. 축하한다. 부원장님! 행복한 꿈 꾸세요. 우리 정훈이도 방긋방긋 축하한다는 말 전해 달랍니다. 형부! 축하드려요.)
“고마워, 처제.”
얼떨결에 고맙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우아악!
진수성찬이다.
술자리를 즐기지 않는 고경아가 맥주까지 꺼냈다. 당사자의 고민과 의사는 확인도 안 한 채 온 동네 사람이 모두 김지훈을 부원장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등 떠밀려 하면 안 되는 일이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인정한다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부원장이라! 그래. 내 인생이자 가족의 인생이다. 피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꽤 늦은 시간까지 고경아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자신을 믿고 응원하는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실망을 안겨 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김지훈이 새로운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당직만 근무한 주말에도 뒤숭숭했던 병원이 아예 뒤집어졌다. 진상건과 김병오 이사의 전격 구속 소식은 가히 충격에 가까웠다.
“과장님, 어떻게 된 거예요?”
“두고 봅시다. 다행히 우리 병원에 당장 영향을 미치는 일이 아니니까 업무에 집중합시다.”
김지훈이 전문 병원 경영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보는 사람마다 물었지만 신현수가 신임 이사장으로 취임한 후 공식적인 입장 발표를 할 때까지 입 꾹 다무는 것이 마땅했다. 있는 그대로 발표할지, 병원에 피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원론적인 견해만 밝힐지 모르는 일이었다.
‘확 까발리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대처해야 돼. 이미 개망신 당한 놈 망신 더 준다고 뭐가 달라질까?’
회진을 시작했다.
송재덕 교수와 신현수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의아한 기색이었고, 이준영 교수는 평소와 다름없이 묵묵하게 자신의 환자를 보았다.
김지훈을 지나치지 않았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신 이사장과 손 교수에게 얘기 들었다.”
“안 그래도 상의드리고 싶었습니다. 간 이식 학회 창립 문제도 있고, 솔직히 제가 그런 자리를 맡아도 될까요?”
“이미 충분해. 부족한 점이 있다면 보충하고, 자격은 스스로 만들어 가면 된다. 오늘은 수술이 늦게 끝날 테니 내일 내 방에서 보자.”
툭툭 어깨를 두드렸다.
격려와 응원의 힘이 가득 차 있었다.
그저 제자를 믿을 뿐이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때마침 이경석이 회진을 끝냈다.
“이경석 선생, 인수인계 잘 받아.”
“알겠습니다.”
“누구보다 원장님이 좋아하실 거야. 나도 기쁘다.”
살짝 어색한 표정을 짓던 이경석이 눈가를 굳혔다.
전문 병원의 주력이자 가장 많은 의국원을 가진 일반외과를 책임져야 한다. 큰 파도 하나를 넘었지만 오히려 더욱 엄중한 시기를 앞둬 일반외과 과장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강한 부담 속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나도 저런 자신감을 가져야 해.’
수술 방에 들어서자 김진호 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손짓을 했다. 아직은 극소수만 알고 있는 사실인데 어째 간호사들의 눈빛이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김 과장, 잠깐 얘기 좀 하자. 신 이사장에게 전화받았어. 내가 원장을 하고, 김 과장을 부원장으로 발령 낸다고 하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좋은 일 같지가 않아.”
“저도 당황스럽습니다.”
“이준영 선생님은 별말씀 없으셨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열심히 하라며 내일 보자고만 하셨습니다.”
“그때 다 모여 얘기할 생각이시구나.”
“선생님도 오시나요?”
“송재덕 선생님하고 신 이사장까지 다 모이는 것 같아. 후우! 서울 병원으로 출근을 하셔서 미리 상의할 시간도 없고 난감하다.”
같은 입장이었다.
김진호 교수는 진상건 일을 알긴 하지만 깊숙이 개입하지 않은 데다 주로 병원 내부 일을 담당해 더욱 난감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우왕좌왕할 때가 아니었다.
이미 결심한 마당이었다.
김지훈이 어깨를 폈다.
“선생님, 선생님만 믿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일을 하기도 전에 송재덕 선생님과 이준영 선생님께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의외라는 듯 빤히 눈길을 주던 김진호 교수가 갑자기 웃었다. 마냥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한시름 덜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김 과장이 확실하게 의사를 밝혀 주니까 도리어 마음이 편하네. 사실 우리 병원 원장단은 우리 병원 출신이 맡는 것이 가장 좋겠지?”
“그럼요.”
“알았다. 잘해 보자.”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급박하게 변할 외부 환경에 맞서 단단하게 정비해야 할 때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전문 병원을 새롭게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격려한 시간이었다.
수술이 시작됐다.
매주 월요일마다 반복되는 간 이식 수술이지만 기분이 달랐다. 과장이든 부원장이든 의사이긴 매한가지라 해도 주어진 권한 이상으로 책임이 커질 테고, 환자를 치료하는 일 역시 다르지 않았다.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나를 보는 사람들 시각이 변하는 것처럼 환자들 역시 더 많은 기대를 할 것이다. 실패하면 지금보다 훨씬 큰 영향을 받겠지.’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수술 이외의 모든 일을 지웠다.
오직 한 사람의 생명이 손끝에 달려 있다는 사실만 떠올렸다. 한수영과 고경철이 사뭇 달라진 것 같은 분위기에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건강한 사람의 간이 스승의 손을 통해 절제됐다. 제자의 손을 거쳐 삶의 마지막 희망을 품고 수술대 위에 누운 환자에게 전해졌다.
“혈관 겸자 풉니다.”
따르륵! 따가각!
간동맥과 문맥을 통과한 피가 힘차게 간을 돌아 정맥으로 빠져나갔다. 검붉었던 간이 서서히 선홍색으로 변하며 환자에게 새로운 삶의 빛을 비췄다.
“끄으으응!”
열 시간이 넘는 수술을 견딘 환자가 눈을 떴다. 중환자실의 삭막함 속에 숨은 두려움보다 무사히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보호자의 눈물을 보았다.
결코 무덤덤해질 모습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각오를 다졌다.
‘환자를 치료하는 일과 부원장 업무는 절대 별개의 일이 아니다. 우리 병원을 종합 병원으로 키우면 간 이식 센터도 커질 수밖에 없다. 지금보다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다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 있을까?’
역시 가장 중요한 답은 환자에게 있었다.
명예와 욕망만을 좇았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이유였다. 늦은 회진을 돌며 의사인 자신을 믿고 육신을 맡긴 환자들의 눈빛을 보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비로소 확신이 섰다.
부원장은 단순한 직위가 아니었다.
최고의 써전과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몸은 두 배로 힘들지 몰라도 그 꿈을 앞당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스스로 가야 할 길이었다.
정규 일과가 모두 끝난 지 오래였다.
당직만 남았고, 병원 곳곳이 어둠에 잠겼다.
연구실 창문 너머로 한창 내부 공사가 진행 중인 신관이 보였다. 초반에는 꿈도 못 꾼 일이었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문 병원 발전의 첫걸음이자, 민정호의 지대한 역할을 부인할 수 없었다.
‘내 눈의 티끌이 제일 아프다더니, 나 힘든 것만 생각했지 민 부원장이 얼마나 힘들지는 생각도 못했네. 같은 목표를 가진 이상 나눠 지는 것이 맞다.’
때문인지 발걸음이 돌고 돌아 민정호 사무실 옆을 지나치고 있었다. 꽤 늦은 시간임에도 문틈 사이로 환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아직 퇴근을 안 했나? 진상미 씨는 우리 병원에서 근무하기로 결정했을까?’
똑! 똑! 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던 김지훈이 살짝 놀랐다.
일과 중에 마무리 지었을 줄 알았는데 진상미와 대화 중이었다. 확실하게 결론을 지었는지 계약서에 막 도장을 찍고 있었다.
“진상미 씨, 이제 함께 일하게 되는 건가요?”
“다음 주부터 정식 출근하기로 했어요.”
“감사합니다. 잘해 봅시다.”
민정호가 서류를 정리하며 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퇴근하다 우연히 불 켜진 거 보고 들렀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뭐 하나 보려고요.”
“가시는 길이 아닌데요. 늦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답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면 이만 퇴근하시죠.”
김지훈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사람 무안하게 만드네. 그토록 인간적이었던 어제의 민정호는 어디 갔을까?’
내친걸음이었다.
주저한다고 결론이 바뀔 상황이 아니었다.
“가져왔습니다.”
“말씀하시죠.”
“함께 일합시다.”
민정호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분명 어깨를 움찔거렸다.
“감사합니다. 신 이사장님과 송재덕 선생님께 바로 연락드리고 절차 밟겠습니다.”
“이사회부터 통과해야 할 텐데 무슨 절차를 밟아요? 우리끼리 결정했다고 확정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내부 절차는 진행해야죠. 내일 이준영 선생님과 자리를 가질 때 차질 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어쩌면 더 빨리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몇 마디 더 나누고 싶었지만 어느 틈엔가 방 안 정리가 끝났다. 성격답게 무척 깔끔했고, 진상미도 서둘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알겠습니다. 퇴근하죠.”
“먼저 가십시오. 진상미 씨, 안녕히 가십시오. 업무 인수인계하는 날 뵙겠습니다.”
“민 부원장님은 퇴근 안 해요?”
“과장님께서 방금 전에 일거리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내일 뵙겠습니다. 그럼 이만!”
사람 보낼 때도 그럼 이만이라니!
김지훈이 머뭇거리는 진상미에게 눈짓을 하며 함께 퇴근했다.
“직장을 옮기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무척 기대되네요.”
“저도 기대가 큽니다.”
응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을 스승과 동료들, 든든하기만 한 민정호와 진상미까지 부원장은 결코 혼자 일을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김지훈이 가슴을 폈다.
카르페 디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