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김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설득해 보시죠.”
“종합 병원 건립이 서울 병원 확장이나 천원 병원 이전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죠. 근방에 종합 병원이 단 한 곳도 없는 지역입니다. 지역 주민들의 요구도 굉장히 높고요. 더구나 애초 계획이었고, 이미 부지까지 확보된 상태인데 미룰 이유가 있습니까?”
“다른 병원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김지훈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예상되는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각 병원은 결코 자신들의 입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진상건의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전과 확장을 전면 백지화하고, 종합 병원 건립을 밀어붙이다간 신현수의 입지마저 흔들릴지 몰랐다. 신임 이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말이다.
원론적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불법적으로 추진됐던 일이라는 점을 알리는 동시에 우리 병원 확장의 당위성을 충분히 설명해 이해를 구해야죠.”
“바로 그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신 이사장님이 계시지만 재단 이사장의 권한을 행사하기 힘든 시점입니다. 각 병원의 형평성을 고려해야만 하는 자리기도 하고요. 반대에 부딪쳤을 때 전면에 나설 수 있는 분이 필요합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인정합니다만 경륜이 깊고, 친화적인 분만이 원장단을 설득하고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솔직히 송재덕 선생님이 어떤 사람보다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속한 병원의 이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분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의지와 열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완강하고 보수적인 성향을 깰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한 목적의식을 갖춰야 합니다. 송재덕 선생님도 물론 적임자 중 한 분이시지만 김 과장님만의 강점이자 장점까지 갖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내 장점이 뭔지 몰라도 실행 능력과 별개의 문제 아닐까요? 종합 병원 건립을 간절히 원하는 것과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잖아요.”
민정호가 눈가를 좁혔다.
“과장님 스스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능력이 있고 없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종합 병원 건립에 대해 생각만 했지, 구체적인 방안을 고민해 본 적은 없습니다.”
“사업 규모가 클수록 여러 사람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꼭 필요하지만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다른 사람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장님 역시 제 능력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환자를 보는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인데, 민 부원장님과 내가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 정도로 내 능력이 대단할까요?”
“과장님,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진상건을 상대하는 동안 의료 외적인 부분에서도 강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이미 증명하셨습니다.”
“내가요?”
“이번 일에 과장님의 생각과 대처가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결코 단순한 조언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지 않습니까?”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면 다행이지만 양상이 다른 일이었다. 공동의 적을 상대할 때는 한마음 한뜻이 되기 쉽지만,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개척하는 일은 의견 충돌을 넘어 심각한 분란까지 유발할 수 있었다.
기우이길 바라지만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호흡이 맞을 것이라고 했는데 나도 민 부원장님도 인간적인 접촉은 없었고, 사무적인 일만 같이했을 뿐입니다.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까요?”
“가끔은 한 가지만 봐도 충분할 때가 있습니다. 과장님이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환자와 동료를 대하는지 보았습니다. 누구나 올바르다고 인정하는 원칙에서 단 한 발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사람과 마음이 맞지 않는다면 대부분 제가 잘못된 거겠죠.”
“도리어 큰 소리가 나올 수도 있어요.”
“과장님과 제가 공유하는 원칙에서 벗어났다면 기꺼이 감수하고, 고치겠습니다.”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냉철함에 가려졌지만 누구보다 강한 자존심과 자신만의 뚜렷한 주관을 가진 민정호를 생각하면 결코 기대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항상 보였던 모습을 버릴 정도로 절실하다는 건가? 내가 부원장을 하는 것이, 종합 병원을 건립하는 것이 이 정도로 중요한 이유가 뭐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잘 들었습니다. 이제 진짜 민 부원장님의 마음을 듣고 싶군요. 내 능력이나 열정, 우리의 호흡이 아니라 민 부원장님이 계약 연장을 하는 진짜 이유 말입니다.”
민정호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급기야 심각한 대화 내내 건드리지도 않았던 김빠진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 무표정한 얼굴 사이로 언뜻 슬픔의 흔적이 지나갔다.
“진상건과 어떤 원한이 있는지 물으셨죠?”
김지훈이 순간 움찔거렸다.
‘언급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말을 먼저 꺼내? 모르긴 몰라도 아픈 경험이 분명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일과 연관된 일이라 해도 꼬치꼬치 캐물을 일이 아니다.’
시적인 문제는 핵심이 될 수 없었다.
“무척 궁금합니다만, 불편하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라면 말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개인적인 일이 맞습니다. 솔직히 진상건과 계약할 당시 다른 목적을 갖고 시작했기 때문에 무척 불편합니다. 더 이상 말씀드리지 못하는 점 이해해 주십시오. 하지만 저 역시 신 이사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무슨 말이죠?”
“선대의 유업 때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저 또한 지나간 일 때문에 남은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도리어 종합 병원 건립이라는 목표를 반드시 이루고 싶습니다. 전문 병원이 제 삶을 의미 있게 해 준다는 생각도 점점 강해지고요.”
‘정말 중요한 사람이 치료도 못 받고 잘못되기라도 했나? 어떤 이유가 됐든 농담으로도 꺼낼 일이 아니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죠. 저는 가장 적임자라 생각되는 분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부원장직을 수락하실 겁니까?”
‘왜 이렇게 인간적으로 보이지? 오늘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네. 하긴 누구나 따뜻한 속을 가지고 있겠지.’
민정호의 새로운 면모를 보았지만 이 또한 핵심이 아니었다. 더구나 미래에 지대한 결정을 끼칠 수밖에 없는 일이라 신중을 기해야 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신다는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맥주 김이 다 빠졌네요. 사장님, 오백 두 잔 다시 주십시오. 과일 안주 하나 주시고요.”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분위기 풀자는 술을 이렇게 무미건조한 말투로 시키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민정호와 단둘이 많은 대화를 나눈 하루였고, 감당하기 힘든 신뢰까지 느꼈지만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확실히 중심을 단단히 잡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리운전 하실 건가요?”
“그래야죠.”
“허리띠 풀고 싶지만 민 부원장님이나 나나 가족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딱 두 잔씩만 하죠.”
쨍!
잔을 부딪쳤다.
목을 타고 넘은 맥주가 강한 자극을 전했다.
김지훈과 민정호의 개성 강한 성격이었다.
과일이 제법 달달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녹아 있었다.
민정호가 말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장 빠른 시일 내에 결정해 주십시오.”
“거절하면 정말 계약 연장을 안 할 겁니까?”
“한 입으로 두말할 일이 아닙니다. 제 성격이 모가 나서 그런지 인정할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한다는 위험을 안고 이런 규모의 사업을 진행할 수도 없습니다.”
“후우! 거의 반강제네요.”
“신 이사장님도 거의 반강제로 계약 연장을 요구하셨습니다. 제가 꼭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연장을 하지 않을 거면 여기서 끝내자고 하시더군요.”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한때는 차갑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민 부원장님보다 더 냉철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 몰라요.”
“동의합니다. 신 이사장님과 단둘이 얘기하다 보면 한 수 밀린다고 여겨질 때가 많았습니다.”
“음흉한 놈이죠. 이번 일은 아예 독불장군이 따로 없고요. 최소한 언질이라도 줘야 했어요.”
“흠! 저도 음흉한 놈이군요. 인정합니다.”
“그 표정으로 농담하는 겁니까?”
“농담으로 들리십니까?”
술을 먹어도, 대화 내용이 달라져도 민정호의 무표정한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하하하! 썰렁하네요.”
결국 김지훈이 크게 웃고 말았다.
지금까지 한 발 가까워졌다면 오늘 하루에만 열 발은 더 다가선 것 같았다. 정말 수락하기 힘든 부원장 자리도 그만큼 가까워졌는지도 몰랐다.
즐거움도 잠시, 계획했던 일이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전문 병원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안이기에 미룰 수도 없었다.
“후우! 진상건 일이 끝나면 추진하려고 한 일이 있는데 골치 아파서 잘될지 모르겠네요.”
“무슨 일입니까?”
“간 이식 학회를 만들 생각입니다. 이준영 선생님이 간담췌 학회 학회장이시고, 현재 주축이 되는 병원이 세 개 정도라 추진만 하면 곧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되면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어요.”
민정호의 눈이 반짝였다.
“부원장을 하셔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겼습니다. 여건이나 시간상 어려운 점이 많더라도 반드시 만드셔야 합니다. 그리고 초대 학회장을 맡으십시오. 종합 병원 건립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초대 학회장이요? 그놈의 장 소리에 알레르기가 다 생기겠네.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원장단분들을 만나며 나이나 경험만큼 직위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부원장에 학회장이라면 적어도 무시당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때론 전면에 나서서 이뤄야 하는 일이 있는 법입니다. 지금이 그때 아닐까요? 노력하셔야 합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목표 하나 정하면 모든 일을 잘도 이용하시네요. 이 짧은 순간에 거기까지 생각을 하다니 참 대단하시네. 아! 절대 나쁜 뜻으로 말하는 거 아닙니다. 말 꺼내자마자 치고 나오는 순발력이 부러워서 그래요.”
“정당하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간절히 원하는 일이 있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야 이룰 수 있는 법입니다. 말로만 최선을 다한다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게요. 솔직히 피곤하고, 빡빡하다는 기분이 들지만 반박하기 어렵네요.”
“다른 생각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환자를 보실 때 마음 그대로 모든 일에 대처하시면 됩니다.”
민정호가 정말 좋은 기회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행정적으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자세하게 물으며 비용 일체를 제공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덕분에 술자리가 길어졌다.
오백 두 잔이 네 잔이 됐다.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됐고, 특히 민정호의 가려졌던 인간적인 면모를 본 김지훈에겐 무척 인상적인 시간이었다. 똑같이 마셨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주량까지 말이다.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좋죠.”
마른안주와 과일까지 싹 해치우고 일어났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민정호는 발음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세네. 맥주라 해도 다섯 잔이면 술기운이 제법 올랐을 텐데 평소와 똑같네. 그동안 민 부원장에 대해 도대체 뭘 알고 살았던 거야?’
총총 걸음을 옮기는 민정호를 보던 김지훈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고민에 잠겼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빨개진 얼굴을 가려 주었다.
부원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과연 적임자인지, 송재덕 교수나 이준영 교수를 대신해도 되는지 고민했다.
사람 간사한 모양이었다.
완강하게 거절하다시피 했는데 점점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신현수와 민정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선택했단 사실에 일종의 책임감까지 느껴졌다.
‘간 이식 학회 설립도 시급하고, 과장하고는 차원이 다른데 환자를 보며 병원 일까지 할 수 있을까? 다른 병원에서도 나오는 말이니까 진충기 선생님하고 일석이 둘이 추진해도 충분하겠지? 초대 학회장? 어후!’
김지훈이 무심코 시계를 보다 말고 화들짝 놀라 부리나케 달렸다. 점심때 간단히 회의한다고 나왔는데 저녁 시간이 훌쩍 넘었다.
맥주 때문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헉헉헉! 경아 씨!”
내일을 위해 쉬어야 할 주말에 홀로 희연이와 보냈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고경아로서는 술까지 먹은 남편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일단 급한 불을 꺼야 얘기가 되지.’
급히 입을 열려던 김지훈이 눈만 껌벅거렸다.
어라? 고경아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부원장님, 오셨어요. 희연아, 아빠 오셨어. 빨리 나와서 인사해야지.”
“아빠아아아!”
희연이를 안은 채 멍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이내 범인을 떠올렸다. 이런 일을 가슴속에 품고 있을 손일석이 아니었다. 시샘은커녕 김지훈이 부원장이 되기를 정말 바라고 있을 친구기도 했다.
“일석이가 말했어요?”
“좋은 일인데 식구끼리 먼저 나눠야죠. 민 부원장님과 얘기 잘했죠? 신 교수님, 아니 이제는 이사장님이시네. 이사장님 결심이 확고하다던데 시간 너무 끌지 말아요.”
“부원장을 하면 좋겠어요?”
“당연하죠. 누가 싫어하겠어요?”
웃는 모습을 보니 좋긴 했지만, 마음속 고민을 털어놓고 신중하게 대화를 나눠야 할 때였다.
그때!
따르르릉!
전화통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