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빤한 답이었다.
“말해 뭐 해. 이제 좀 마음이 편해진다.”
“과장 계속하고 싶어?”
“하기 싫다면 그만둬도 돼?”
“잘됐네. 과장 그만하자. 진충기 선생님이 양보를 하셨으니까 일석이하고 경석이 형만 남는데, 나도 그렇고 민 부원장님도 경석이 형을 적극 추천했어. 다들 동의하면 다음 주에 바로 인사 조치할 예정이야.”
다들 깜짝 놀랐다.
평소 환자만 보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김지훈이었지만 2년 임기를 채우려면 아직 멀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모든 직원이 능력을 인정하는 마당인데 교체라니 상상도 못한 말이었다. 물론 이경석 역시 과장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실에 이의는 없었다.
김지훈도 순간 당황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막상 관두라는 말을 들으니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신현수와 민정호의 속마음이 무언지 몰라도 솔직히 서운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결코 나쁜 뜻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고, 그럴 일도 아니었다.
한편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스승과 함께 환자만 보고 싶다는 생각도 만만치 않았다. 오래 생각해서 좋을 일이 있는 반면 나쁜 일도 있는 법이었다.
후자를 훨씬 더 바랐던 모양이었다.
고민이라고 할 것도 없이 찬성했다.
“경석이 형이라면 난 좋아. 일석이도 자격이 충분하지만 정훈이가 있으니까 다음에 하면 되고 걱정 없네. 경석이 형, 그렇게 하시죠.”
이경석이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임기가 남은 김지훈이 밀려나는 꼴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확실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사실 민정호가 추천한 이유가 더 궁금했다.
“인사 권한을 말했지만 민 부원장님이 왜 날 추천하죠? 김 과장만 한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 병원 특성상 일반 외과 과장님과 상의할 일이 무척 많습니다. 훨씬 효율적으로 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이 깊으면서도 예리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이경석 선생님이 적임자라고 판단해 신 교수님께 건의드렸을 뿐입니다.”
“말은 고맙지만 이런 방식은 옳지 않습니다. 현수야, 솔직히 나도 과장을 하고 싶어.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야.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김 과장을 대신할 수는 없어. 병원을 위해 누가 더 필요한지 잘 알잖아?”
김지훈이 손사래를 쳤다.
한 번 결정하니 의외로 속 시원했고, 마음까지 편해졌다. 행정적인 면 역시 이경석이 더 훌륭하게 해낼 것이란 믿음도 있었다.
“난 괜찮아요. 안 그래도 순서 무시하고 먼저 과장이 돼서 정말 불편했는데 이제야 순서대로 돌아간다니까 좋기만 합니다. 사실 일만 많지 수당은 쥐꼬리만큼밖에 안 줘요. 하하하!”
“아닌 건 아닌 거야.”
이경석이 완강히 거절했다.
김지훈의 농담에도 얼굴을 펴지 않았다.
신현수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이경석 선생님, 신현수가 아니라 재단 이사장의 결정으로 받아들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부분이 해결돼야 홀가분하게 본원의 일을 처리할 수 있어요.”
하루 뒤면 이사장 직무를 수행할 사람의 결정인 이상 스스로 번복할 여지가 없었다. 남은 일은 이경석이 동의하는 일뿐이었다.
“맞는 말이네. 이사장 결정인데 따라야지. 현수야, 이렇게 되면 민 부원장님 조건까지 다 맞춘 거니까 끝난 거지? 신기동 선생님 모시는 문제 다시 생각하는 게 어때?”
신현수가 민정호와 눈을 마주치며 정색을 했다.
“김 과장, 무슨 소리야? 아직 민 부원장이 제시한 조건은 꺼내지도 않았어.”
“뭐? 더 있어?”
“김 과장이 부원장을 해야겠어.”
김지훈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들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상대적으로 전문 병원의 규모가 작지만 대학 병원 중 하나였다. 물론 구미 병원 원장단은 중견 의사들로 구성되긴 했다. 그러나 지역과 의료진 수급 문제에 따른 차이는 물론 위상이 다르다는 점까지 고려해야 했다. 무엇보다 세상 사람 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현수야, 어떤 생각인지 모르지만 부원장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잖아. 나이나 경력도 고려해야 하고, 무엇보다 내 능력을 제대로 판단했으면 좋겠어. 과장하고는 확실히 달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일할 범위가 넓어지는 것뿐이야. 권한 역시 그에 따라 더 많이 갖게 되는 거고.”
“신임 이사장이 되자마자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어. 능력, 공헌도, 나이 다 무시하고 친한 사람을 앉히는 꼴이잖아. 다른 사람들이 수긍하겠어?”
“전문 병원 내부의 일이고, 현 상황에서 외부 인사를 초빙하는 게 과연 득이 될까? 누구보다 전문 병원을 잘 이해하고,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해. 이게 바로 민 부원장님이 내민 핵심 조건이야.”
자연스럽게 시선이 집중됐다.
민정호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병원 일은 난생처음이지만 어려운 일이 많았기 때문인지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 병원을 반석 위에 올리는 것이 애초 목표이자 계약이었지만, 이젠 더 큰 목표를 이루고 싶습니다.”
“종합 병원 건립 말인가요?”
“맞습니다. 김 과장님과 신 교수님, 아니 이사장님까지 누차 말씀하셨던 일입니다. 문제는 혼자 이룰 수 없는 목표라는 겁니다.”
김지훈도 십분 동의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보다 훨씬 경륜이 깊고, 존경받는 분을 모셔야 합니다.”
“김 과장님, 제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무례할 정도로 직선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을 이해해 주실 분 많지 않습니다. 이준영 선생님과 송재덕 선생님은 정말 보기 드문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춰 가면 되잖아요?”
“그것으로 충분했다면 계약 연장에 조건을 달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 병원 사정에 환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능력과 열정을 갖춘 분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서로 호흡이 맞아야 합니다.”
마지막 말이 핵심이었다.
같은 말을 해도 누가 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동안 보인 민정호의 성격과 말투는 엉뚱한 오해를 부르고도 남았다.
“그래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겁니까?”
“서울 병원 확장과 천안 병원 이전은 앞으로도 초미의 관심사가 될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막대한 예산이 드는 종합 병원 건립을 추진해야 합니다. 우리 내부는 물론 외부와도 의견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분이 필요합니다.”
“나라고 민 부원장님 의견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불만이 있어도 병원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말을 안 했을 뿐입니다. 결과가 좋다고 과정이 모두 용인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감사하게 생각하고, 제 문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이런 말을 할 때는 최소 표정이라도 변해야 하건만 여전히 무표정했다. 오해하기 딱 알맞았지만 이런 모습이 민정호의 강점이자 매력일지도 몰랐다.
물론 김지훈의 생각이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자신의 단점을 솔직하게 말하기 어려운 법인데, 그 이상으로 내가 필요하다는 건가?’
“정리해 보죠. 결국 종합 병원 건립을 위해 계약을 연장할 의사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부원장 자리에 앉아 민 부원장님과 호흡을 맞추며 일해야 한다는 것이 연장 조건의 핵심입니까?”
“유일한 조건입니다.”
“개인적으로 봐도 그렇고, 다른 사람의 눈에도 무리한 일이라는 생각은 안 듭니까? 신 교수가 재단 이사장으로서 인사를 시행할 때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민정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 끝까지 제 조건을 관철시킬 생각이고, 이사장님 역시 자신의 업무에 지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반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김 과장, 민 부원장 말이 맞아. 나도 김 과장이 부원장을 맡아 줘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동의한 거야.”
김지훈이 콧등만 찡그렸다.
분명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하고, 할 말도 많은데 정작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욕심이 아니라 입장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손일석이 호들갑을 떨었다.
“이렇게 되면 결정됐네. 야! 능력자는 역시 달라. 대학 병원 사상 최연소 부원장이 되는 거 아니야? 진충기 선생님, 우리 나이에 부원장 되는 사람 보셨습니까?”
“물망에 올랐다는 얘기조차 못 들었지만 김 과장님이면 자격이 충분하지 않나? 신 교수님, 전 적극 찬성입니다.”
“저야말로 적극 찬성입니다. 부럽다. 부러워. 아! 민 부원장님, 한 가지 잘못 생각한 게 있습니다.”
“뭘 말입니까?”
“김 과장 화났을 때 어떻게 변하는지 못 봤죠? 멱살 잡고 메다꽂는 건 일도 아닙니다. 선배든 환자든 가리질 않아요. 만에 하나 민 부원장님이 인간적인 면모에서 벗어나거나 하면 ‘아! 내가 착각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겁니다.”
이경석이 크게 웃었다.
“민 부원장님, 인턴 때지만 악어라고 불리는 선배 멱살 잡은 일화 유명합니다. 응급실에서 난동 부리던 양아치 같은 환자 마취 안 하고 생살 꿰매기도 했고요. 그러고 보니 아주 감정적이네.”
“형, 갑자기 옛날 일은 왜 꺼내요?”
“부원장과 행정부원장으로서 일해야 하는데 정보는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야? 종합 병원 건립이라면 거의 매일 얼굴 맞대야 하잖아.”
“에휴! 형부터 확실하게 대답하세요. 내일 바로 과장 자리 맡으시는 거죠?”
헛기침 터졌다.
이유 불문하고 부담의 크기는 다르지 않았다. 둘 다 머뭇거리며 입을 열지 못하자 권한을 가진 신현수가 단호하게 정리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이사장으로서 내린 결정입니다. 더 이상의 논의는 무의미합니다. 이경석 선생님은 월요일부터 과장 업무 수행하시고, 김 과장은 이사회 결정이 날 때까지 잠시 대기 발령 후 부원장으로 취임하면 됩니다.”
“김 과장님이 수락하지 않으면 계약 연장 의사를 철회하겠습니다. 새로운 사람과 상의해 추진하기에는 제반 여건이 너무 좋지 않은 데다 모호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제 귀중한 시간을 소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후우! 김 과장이 부원장 자리 수락하면 저도 과장 업무를 마음 편히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경석과 민정호가 쐐기를 박았다.
“찬성합니다.”
짝짝짝짝!
김지훈만 박수를 치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 도리어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다들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고, 직책 하나 없는 손일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일석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우리 생각 좀 하고 살자. 부작용이 더 크다니까?”
“지훈아, 미안하지만 간 이식은 너 없이도 돌아갈 수 있지만 행정 쪽은 다들 문외한이야. 종합 병원 건립까지 걸려 있는 이상 민 부원장과 네가 정말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답은 간단해.”
“민 부원장이 가장 필요하지. 그래. 맞는 말이야.”
김지훈이 돌연 눈가를 굳혔다.
‘민 부원장이 정말 나를 필요로 한다면 먼저 나를 납득시키는 것이 맞아. 부원장 자리에 혹해 수락했다간 자칫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때 민정호가 뜻밖의 말을 했다.
“김 과장님, 단둘이 술 한잔하시죠.”
“술이요? 대낮입니다.”
“예외 없는 일이 있겠습니까?”
평소 원하던 일이었다.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필요한 자리였다.
“좋습니다. 단, 신 교수 결정에 내가 전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민 부원장님의 계약 연장 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왜 부원장을 해야 하는지 설득해 보세요.”
“설득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목표를 공유하고, 함께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처 알지 못한 근본적 차이가 있다 해도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어떤 자리도 소용없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날 설득하세요. 가장 중요한 당사자와 상의하지도 않고 부원장을 하길 바랐으면 그 정도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정호의 입가가 미묘하게 움직였다.
‘못 이기는 척하고 수락하면 될 일인데 자리 욕심이 이렇게 없는 사람도 있나? 참 한결같으시네. 욕심 없는 사람이 열정을 품고 일하면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더군요. 그래서 더더욱 과장님과 함께 일해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손일석이 단둘이 술 마신다고 중얼중얼 불평을 터트렸지만 다른 사람이 낄 자리가 아니었다. 무엇인가 좋은 예감이 들었는지 신현수가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지훈아, 도와줘. 부탁할게. 일주일 정도는 쉴 시간이 있을 테니까 푹 쉰 후에 같이 일하자.”
‘푹 쉬라고?’
“아직 동의 안 했다.”
“하게 될 거야. 종합 병원 만들어야지.”
‘종합 병원? 에휴! 내 발등 내가 찍은 꼴이네.’
대낮에 문 연 술집 찾기 쉽지 않다.
여기저기 헤맨 끝에 호프집을 찾았다.
첫 손님이었다.
“제가 사겠습니다.”
“오백 두 잔에 마른안주 하나요.”
이 집에서 제일 비싼 안주 시키고 싶었지만 술 마시러 온 자리가 아니었다. 술술 입이 열리게 할 양념으로 삼아야 할 때였다.
김지훈과 민정호가 마침내 전문 병원 개원 후 처음으로 단둘만의 술자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