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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87화 (1,187/1,329)

13화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진상건 처리에 전문 병원의 미래가 달려 있기에 고경아 역시 큰 관심을 보였다. 덕분에 어젯밤 늦게 술이 머리끝까지 찬 채로 귀가했건만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다고 여겼다.

“형부가 직접 나섰으니까 잘 풀리겠죠?”

“어? 어떻게 알았어요?”

순간의 방심으로 큰 실수 했다.

“이제는 이기지도 못하는 술 작작 좀 마셔요. 한 시간을 넘게 붙들고 얘기하더니 기억 안 나요?”

‘아! 그랬지. 역시 방심하면 안 돼.’

“당연히 기억나죠. 잠깐 착각한 것뿐이에요.”

고경아가 혀를 차며 꿀물을 내밀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결과적으로 민 부원장님 예측이 정확하게 맞았잖아요. 주변에 사람이나 정보가 훨씬 많았을 텐데 진상건은 왜 그런 판단을 못 내렸을까요?”

김지훈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건의 전말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의문일 것이다. 민정호와 이미 나눴던 말이지만 김지훈의 관점은 약간 달랐다.

어쩌면 같은 뜻일 수도 있었다.

“진상건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돈을 선택했고, 우리는 우리 자신과 환자를 위해 돈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같은 돈을 두고 싸웠지만 지키고 싶은 대상이 달랐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만을 위한 욕심과 모두를 위한 욕심의 차이란 말이죠? 당연히 행동도 달라지겠네요. 그럴듯해요.”

“결과도 다르죠. 감방에서 썩어야 하는 놈과 자유롭게 햇빛 즐길 수 있는 사람과의 차이가 어마어마하지 않겠어요? 참! 간호사 선생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뉴스를 통해 들은 것 말고는 자세하게 알지 못할 거예요. 간호 부장님과 저만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요. 분위기 잘 추슬러야 할 것 같아요.”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약속 시간이 다 됐다. 준엄한 경고가 담긴 가자미 눈빛을 쏘아 대는 마님이 준비한 꿀물과 따스한 목욕으로 술기운을 탈탈 털어 낸 김지훈이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역시나 병원이 뒤숭숭했다.

독립적으로 운영된다고 하지만 본원과 천안 병원이 중심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떤 여파가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사장까지 잡혀갔으니 평온하면 그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직원이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하는 탓에 불안이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에 들어서자마자 말이 나왔다.

“과장님, 소식 들으셨죠? 어떻게 된 거예요?”

“곧 공식 발표가 나겠지만 비정상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과정 정도로 알고 계세요. 우리 병원에는 큰 영향이 없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요.”

말과 달리 김지훈의 마음도 복잡했다.

‘평일도 아닌 일요일에 우리도 모자라 진충기 선생님까지 다 모여 상의해야 할 일이 뭐지? 해결해야 할 일이 또 있나? 민 부원장이 사적인 일로 만나자고 할 사람도 아니고 답답하네.’

모두 제시간에 모였다.

민정호를 통해 연락을 받은 눈치였다.

전문 병원 상황이 특이해서 그렇지, 일부 직원을 제외하면 의료직과 행정직은 긴밀한 관계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했는지 모르지만 민정호의 위치와 위상을 엿볼 수 있었다.

다들 궁금해했다.

신현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휴일인데 자리를 요청해 죄송합니다. 비록 진상건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만 이제 시작이고, 여전히 유동적이며 불안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는 점을 양해해 주십시오.”

“또 다른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인데 이사 대부분이 조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가뜩이나 수습할 사람이 없는데 저 역시 시간을 내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중요 자료가 모두 검찰로 넘어가 수습하기 더욱 어려워진 상태입니다. 서둘러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진상건이 저질러 놓은 짓을 해결하려면 한두 사람의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중구난방 여러 사람이 제각각 움직였다간 더욱 꼬이기만 할 것이다. 당연히 일사불란하게 지휘할 사람이 필요했고, 누가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자명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설마?’

신현수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황상 제가 임시 이사장을 맡아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당 기간 전문 병원을 떠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충기 교수가 침착하게 물었다.

“아쉬워도 본원이 흔들리면 우리 병원도 결국 흔들리게 될 겁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 교수님, 언제 가실 생각입니까?”

“내일부터 본원으로 출근할 예정입니다. 다행히 이번 주에 개인적으로 잡은 수술이 없어 외래 진료만 하면 됩니다. 그때 정리할 생각입니다.”

다들 입을 열지 못했다.

솔직히 김지훈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결정할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신현수는 재단 이사이기 이전에 어려움을 함께한 동료이자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수술을 안 잡은 이유가 이거였어? 이제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현수 네가 없으면 말이 안 되지. 이러려고 허구한 날 머리 맞댄 게 아니야. 너무 빨라!’

한때 가장 경계했던 라이벌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진한 우정이 쌓였다. 더욱이 전문 병원 설립 이후 모든 난관을 함께 헤쳐 나온 때문인지 친구 이상의 존재가 된 신현수였다.

이상스레 마음이 안 좋았다.

이성과 감정이 따로 놀았다.

손일석도 눈가를 비비며 혀만 찼다.

“현수야, 진상건 일만 해결되면 다 잘 풀릴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 널 안 보낼 수도 없고, 보낼 수도 없고 답답하다. 에이! 그 자식이 끝까지 훼방을 놓네. 개새끼!”

“이해해 줘.”

“이해가 돼서 더 죽겠어. 우리 사인방에 진충기 선생님까지 힘을 합치면 못할 일이 없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심각하기 짝이 없는 대화가 오히려 친구를 부르고 있었다. 민정호까지 참석한 공식적인 자리라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이경석이 손일석의 어깨를 툭 쳤다.

“일석아, 결과적으로 보면 좋은 일 때문에 가는 거니까 얼굴 펴자. 현수야, 냉정한 얘기라서 미안한데 당장 공여자 수술 팀도 인원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네가 가면 그 자리를 누군가 채워야 하잖아? 대책은 세웠어?”

신현수가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미안하다. 전문 병원 설립부터 지금까지 네가 왜 그렇게 발 벗고 나섰는지 잘 알아. 하지만 반드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잖아.’

“지훈이가 해야 할 말을 형이 하시네요. 위장관 파트 써전이 필요하니까 이혁민 선생님과 상의해서 결정할 문제긴 한데, 제 생각에는 오만석 선생이 적임자 같네요.”

“오만석 선생?”

“예. 병원 차원에서 응급 의학과 지원을 못해 뒤늦게 위장관 파트를 시작했지만 이미 실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 부탁할 생각입니다.”

이준영 교수 못지않은 거구에 호탕한 성격을 가진 오만석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단, 간 이식 공여자 수술을 새로 배워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했다.

“진충기 선생님, 계획대로 오만석 선생이 오면 김 과장과 함께 잘 가르쳐 주십시오. 빠른 시간 내에 제 몫을 하고도 남을 써전입니다.”

“이혁민 선생님께 배웠다면 걱정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든든한 동료 한 명 더 알게 돼 좋습니다.”

오만석의 동의만 남았다.

김지훈과 관계가 무척 각별해 긍정적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경석이 굳은 안색을 풀지 않았다.

“현수야, 상황을 생각하니까 혼자 가는 것 같지 않은데 설마 지훈이도 가는 거야? 아니면 민 부원장님도?”

“지훈이나 민 부원장님은 우리 병원에서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 병원 분위기를 쇄신해야 한다는 것도 사실이고, 나 혼자 감당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또 누구를?

“송재덕 선생님을 서울 병원 원장님으로 다시 모실 생각입니다. 현 원장님이 진상건과 어떤 관계였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고,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말씀은 드렸어?”

“아니요. 우리부터 서로 이해하고,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의견이 없다면 간곡히 부탁드려야죠. 결과적으로 송재덕 선생님과 저만 본원으로 갑니다.”

이경석이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송재덕 교수는 일반 외과만이 아니라 병원 전체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존경받고 두루두루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어 더 이상의 적임자는 없었다. 하지만 제자 된 입장에서는 정말 아쉬운 일이었다.

‘언제나 곁에 계셔서 정말 좋았는데.’

“어쩔 수 없지. 난 현수 너를 믿어. 병원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란 사실도 잘 알아.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웃는 얼굴로 확실하게 해결해. 나도 잘 말씀드릴게.”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홀로서기와는 결이 다른 일이었다.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경석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만일 이준영 교수가 가야 한다면 얼마나 허전할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기에 흔쾌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마음을 바꿔야 했다.

‘어차피 한 공간이다. 서울에 있으나, 여기에 있으나 현수는 영원한 내 라이벌이자 친구다. 아쉬움은 아쉬움 그 자체로 묻자.’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지훈아, 너도 동의하지.”

“그럼. 원장님이나 네가 아니면 누가 그 일을 해? 이혁민 선생님이 무척 좋아하시겠다.”

“아! 나도 가야 하나? 우리 스승님 얼굴이 아른거리네. 이산가족이 따로 없다. 지훈아, 너도 우리 스승님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시는 모습이 보이지 않니?”

손일석의 농담에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세상 천지에 근무 지역이 바뀌는 일은 널리고도 널린 일이었다. 좌천도 아니고 승진 중의 승진이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이상 웃어야 할 때였다.

‘그래, 웃자. 무조건 좋은 일이다.’

때문인지 상황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라면 굳이 진충기 교수와 민정호까지 모일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원장 자리가 공석이 되기 때문에 전문 병원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어깨를 폈다.

‘지금은 우리가 처한 현실에 충실해야 돼.’

“그럼 우리 병원 원장님으로 누굴 생각하고 있어? 아니지. 당연히 이준영 선생님이 원장님을 하셔야 되겠네. 현수야, 자리 욕심이 전혀 없는 분이니까 결정하고 밀어붙여야 하지 않겠어?”

신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당시에는 성급한 행동이었지만, 며칠 전에 민 부원장과 함께 찾아뵙고 말씀드렸는데 들은 척도 안 하셨어.”

“혁원이 결혼 핑계라도 대시지. 하긴 부원장 자리도 헌 신발 버리는 것처럼 내던진 양반인데 씨알도 안 먹힐 분이긴 해. 지훈아,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거다.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러면 누가 원장님이 돼야 하는지 답 나왔네.”

손일석이 손가락을 튕겼다.

“신기동 선생님이 오시면 딱 맞지 않아? 혈관 수술 대가가 오시면 환자도 바글바글 몰려올 거야. 지훈아, 어때?”

“좋은 생각이야.”

신현수가 단호하게 반대했다.

“안 돼. 서울 병원이나 내게 꼭 필요한 분이야. 전문 병원 내부에서 해결하는 게 맞고, 원칙에 따라 김진호 선생님이 맡는 것이 순리야. 문제는 공석으로 남겨 둘 수 없는 부원장이야. 다른 병원에서 초빙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 부분부터는 민 부원장님과 상의하는 게 좋겠어.”

그때 이경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병원에 공헌한 부분이 굉장히 크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행정부원장이 관여할 부분이 아니잖아? 민 부원장님, 경우가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처음 입을 연 민정호의 눈이 반짝였다.

이경석을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역시 속만 깊은 것이 아니라 냉철함까지 갖춘 분이야. 겉모습만 보면 속기 딱 좋군.’

“그런데 왜 민 부원장님과 상의해야 하죠? 각자의 영역을 확실하게 지켰으면 합니다.”

“동의합니다. 다만 전 신 교수님께 계약 조건에 대해 말씀드렸고, 이행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설마 계약 조건에 의료직에 대한 인사권도 포함돼 있습니까? 현수야, 어떻게 된 거야?”

다소 팽팽해진 분위기에 신현수가 손을 저으며 입을 열었다. 직군에 따른 권한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엄격했는데 오히려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민 부원장님과의 첫 계약 기간이 일 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전문 병원이 종합 병원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요.”

“그래서?”

“그때까지 민 부원장님의 능력과 힘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은 모두 인정하시죠? 그래서 계약 연장을 요청했는데 민 부원장님이 조건 하나를 걸었습니다.”

김지훈이 반색했다.

세상천지 어디를 둘러봐도 민정호 이상의 적임자는 없었다. 새로운 사람이 온다면 병원 재정부터 시작해 내부 사정을 아는 데만도 상당한 기간을 소비할 것이다. 그럴 여유가 없는 전문 병원이었다.

“조건이 뭔데?”

“서두르지 마. 먼저 진 교수님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간 이식 파트 책임자를 계속해 맡아 주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당분간 과장을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진충기 교수가 웃었다.

“전 좋습니다. 이 상태로 쭈욱 발전해 나갈 수 있다면 과장 자리는 쳐다볼 생각도 없어요. 어쩌면 다들 간 이식 파트장을 하려고 줄을 설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김지훈의 입이 찢어졌다.

지향하는 바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 야심이거나 욕심이어도 좋았다. 진충기 교수의 능력과 열정이라면 평생 맡겨도 좋다는 생각까지 했다.

‘역시 진충기 선생님이네. 전문 병원 과장보다 간 이식 파트 책임자를 더 인정하는 때가 반드시 올 거야.’

“감사합니다.”

“지 자리 뺏기는 줄도 모르고 좋단다. 진충기 선생님, 너무 욕심내시는 거 아닙니까? 그 줄 맨 앞에 제가 있다는 걸 무시하시는 건 아니죠?”

“김 과장님 제치고 번갈아 합시다.”

“하하하! 좋습니다.”

잠깐 샛길로 샌 덕에 분위기가 좋아졌지만 구체적인 조건이 무엇인지 말도 안 나왔다. 소중한 일요일 오후를 잡담으로 허비할 수도 없었다.

신현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김 과장, 그동안 힘들었지?”

이건 또 무슨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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