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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86화 (1,186/1,329)

12화

이를 악물고 풀린 다리를 추스른 진상건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사장이란 사실이 우스워질 정도로 발악에 가까웠다.

“구속이라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개소리를 해? 당신 어디 소속이야? 전화 한 통이면 너희들 다 끝장이야. 끝장.”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했다.

진상건이 바로 구둣발에 밟힌 지렁이였다.

서정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상건 이사장님, 상황 파악이 안 됩니까? 지금부터 하는 말은 모두 본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소속 찾기 전에 담당 변호사에게 연락부터 하시죠.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겁니다.”

단호한 어조로 미란다 원칙을 말하는 동안 수사관들이 침착하게 진상건을 에워쌌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민정호가 김지훈을 보았다.

“변호사에게 연락하라고 먼저 말씀하시는 걸 보니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확보한 모양입니다. 끝났네요.”

“손 떨리는 거 보이죠? 엄청 겁이 난 것 같은데 막말을 해 대다니, 발악도 아니고 끝까지 지저분하네요.”

“사식이나 넣어 줘야겠습니다.”

“뭐가 예쁘다고 사식을 넣어 줘요?”

“남의 눈에서 피눈물만 흘리게 한 인간인데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확실히 원한이 있네. 뭘까?’

그때 김병오 이사가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런 소란이 벌어졌는데 회의실 안에서 모를 리 없었다. 나름 측근이 있을 테니 대통령의 담화 발표 및 기자회견 소식도 들었을 것이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했다는 사실에 사색이 되고도 남았다.

“이사장님!”

진상건부터 찾던 김병오 이사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낯선 사람들이 검찰 수사관들이라는 사실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서정호가 곧바로 다가갔다.

“김병오 이사님,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진상건 이사장님과 같은 혐의로 구속합니다. 이사회 구성원 전체가 용의 선상에 올라 있습니다. 다른 이사님들도 곧 조사 예정이니 소환을 기다려 주십시오.”

난리 났다.

범죄 혐의가 없는 이사는 단 세 명뿐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는 이사들은 물론 투기와 관계가 없는 원장단까지 뜻밖의 사태에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끝이 아니었다.

서정호가 신현수를 찾았다.

“이렇게 되면 신현수 이사님이 임시 대표 이사가 되시겠군요. 이사장 집무실 및 자금 운용과 관련된 모든 부서의 수색 영장입니다. 지금 바로 집행하겠습니다.”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집행해 주십시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신현수 이사님도 참고인 조사를 받을 수 있으니까 연락이 가면 최대한 빨리 조사에 임해 주시길 바랍니다. 김지훈 과장님과 민 부원장님도 대기해 주십시오.”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못 본 듯 지나친 서정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압수 수색 팀은 즉시 수색 진행하시고, 남은 직원들은 피의자들 연행합시다. 사회적 위치가 만만치 않은 분들이니까 정중히 모시세요.”

검찰만의 은어일까?

수사관들이 진상건의 양팔을 잡았다.

“내 팔은 왜 잡아? 놔. 이거 놓지 못해? 너 이름 뭐야? 변호사 올 때까지 한 발도 못 움직여.”

“취조실에서 보시면 됩니다. 가시죠.”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거물이라 불리는 사람, 권력자라 불리는 사람은 적어도 추태를 부리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막상 진상건을 보니 동네 양아치와 다를 바가 없었다. 훨씬 더 추하고, 악한 사람이라는 사실만 깨달았다.

‘우리가 최소한의 양심도 없는 놈에게 걸렸었구나. 예의 자체를 모르는 놈을 한때나마 이사장이라고 불렀다니 내가 다 한심하네.’

“지훈아, 왜 화가 안 날까? 이상하다. 이상해.”

“진상건 행동이 너무 어이없어서 그럴까요?”

“불쌍하다. 불쌍해. 자기를 남편이라 부르고, 아버지라 부르는 가족이 있을 텐데 저러면 안 된다. 안 돼. 죄도 밉고, 사람도 밉다. 미워.”

“두 번째네요.”

“그치? 너도 그렇지? 칼 맞은 놈이나 저놈이나 감방에서 오래오래 썩어야 할 텐데 일찍 나올까 봐 걱정이다. 걱정. 변호사들도 괴롭겠다. 괴롭겠어.”

사회적 지탄을 받고도 남을 범죄자를 변호해야 하는 사람은 마음이 어떨까? 직업의 특수성 때문에 어쩔 수 없다지만 최소 돈에 팔리지 않기를 바랐다. 양심은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 결코 달라지지 않으니 말이다.

서정호 검사를 선두로 수사관들이 진상건과 김병오 이사를 연행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뒤를 따르던 전문 병원 식구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회의실에서 호송차로 향하는 통로가 깜짝 놀라 뛰쳐나온 직원들로 붐볐다.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수 없었다.

호송차 경광등이 번쩍이고 있다.

진상건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지만 누가 보아도 불안해 보였다. 김병오 이사는 물론 관련된 이사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직원들의 눈길을 피하기 급급했다.

“무슨 일이야? 검찰이 왜 이사장님을 연행하는 거야? 김병오 이사님까지 잡혀가는 거 아니야?”

“뭔지 모르지만 큰일이 벌어진 것은 확실해. 병원 앞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

로비에 도착했다.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야! 구속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 줬다고 해도 이 정도로 관심을 끌다니, 거물이긴 거물인 모양이네.’

진상건이 급히 얼굴을 가렸다.

찰칵! 찰칵! 차르르르! 찰칵!

카메라 불빛이 터지며, 셔터 누르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일선 기자들로 충분할 텐데 정훈철이 직접 나와 지켜보고 있었다.

“진상건 이사장님, 부동산 투기, 배임, 횡령 등의 혐의로 연행되시는데 인정하십니까?”

“…….”

“투기 규모가 천억대 이상이라는데 사실입니까?”

“재단 운영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배임과 횡령을 한 사실이 있습니까?”

묵묵부답이었다.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기자들이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병원 직원들만이 아니라 환자에 보호자까지 몰려나와 수사관 몇몇이 앞을 막지 않았다면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을 것이다.

혐의가 불확실하거나 애꿎은 사람이라면 피해야 할 일이지만, 김지훈을 비롯해 전문 병원 식구들에겐 속이 시원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정훈철에게 향했다. 다른 방송국 기자들까지 취재에 여념이 없는데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형님, 특종을 놓치신 거 아니에요?”

“양보다 질이야.”

“서정호 형님이 뭔가를 주셨나요?”

“어허! 큰일 날 소리 하지 마. 검찰은 검찰이고, 기자는 기자야. 엠바고 지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동안 모은 자료 모두 터트리면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을 거야.”

삼 주라는 이례적으로 긴 엠바고를 지킨 정훈철이었다. 수사상 기밀을 넘겨줄 리 없었지만 그에 준하는 정보는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경쟁사 기자들을 보면서도 웃고 있을 것이다.

“매장당하겠죠? 근데 어떻게 알고 기자들이 저렇게 많이 왔죠? 신문사 기자도 많아 보이네요.”

“정치라는 것이 그래. 대통령이 직접 담화까지 발표했는데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야 하지 않겠어? 진상건도 이번에는 빠져나가지 못해. 죄목이 한둘이 아닌 데다 본보기가 된 이상 어떤 변호사를 써도 세게 때려 맞을 거야.”

“죄목이 더 있나요?”

“오늘 밤 뉴스 봐. 그동안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지만 불법으로 저지른 일이 쌔고 쌨어. 질이 아주 안 좋은 인간이야.”

족히 십 분 넘게 로비를 벗어나지 못했다.

얼굴이 찍힐 대로 다 찍힌 데다 온 동네 사람들 귀에 죄목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하물며 존경받아야 할 병원 재단의 이사장 신분이었다. 법적 책임 이전에 개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진상건이 호송차에 실렸다.

마지막까지 막대한 돈을 뿌려 삶아 놓은 유력자들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어떤 조치도 없었다. 이제야 고립무원의 처지라는 사실을 실감했는지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끝까지 빠져나갈 궁리를 하겠지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진상건과 결탁했던 자들도 응분의 대가를 치를 가능성이 높았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이제 끝난 건가?’

아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먼저 진상건이 싸질러 놓은 똥을 치워야 한다. 무리하게 추진된 일을 모두 취소하고,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동시에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병원 분위기를 다잡아야 할 것이다.

‘현수 책임이 막중하네. 본원과 천안 병원 일을 우리 병원에 있으면서 처리할 수 있을까? 민 부원장까지 필요한 거 아니야?’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했고, 그에 따른 문제도 만만치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골치 아픈 일이었지만 지금은 즐겨야 할 때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짓밟으려 한 진상건과 이를 알고도 욕심에 눈이 멀어 협조한 모든 인간들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길!

카르페 디엠!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지만 사실 기대를 많이 했고, 실제 그 이상으로 기대를 충족시킨 결과였다. 시간이 갈수록 잔잔했던 흥분과 기쁨이 점점 커졌다.

더욱이 토요일이었다.

온 동네에 전화를 해 시간 되는 전문 병원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송재덕 교수, 이준영 교수, 김진호 교수, 진충기 교수에 사인방과 신 사인방까지 모두 모였다.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는 민정호도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했다.

다들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신현수가 이사회 경과보고부터 진상건이 연행되기까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일정 부분 손실이 불가피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자금 집행은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진상건과 김병오 아사를 비롯해 재단에 해를 끼친 사실이 명백한 사람들은 모두 처벌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꼴을 한두 번 봤어야지. 우리 병원 이사장만이 아니라 여기저기 직책을 갖고 있어 아직 불안한 거 아닌가?”

“미리 상황을 말씀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대통령이 직접 기자회견을 할 정도로 전에 없는 의지를 보인 데다 방송에서도 크게 다룰 겁니다.”

김지훈이 부연 설명을 했다.

“오늘 밤 9시 뉴스에 뜬답니다.”

“9시? 두 시간 정도 남았네. 오늘 같은 날 그때까지 술 조절을 해야 하다니 아쉽다. 어쨌든 신 교수, 김 과장, 민 부원장님,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박수 한 번 쳐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일석이 분위기를 띄웠다.

짝짝짝짝!

큰 박수 소리와 함께 술자리가 시작됐다.

이제는 젊었을 때처럼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실 몸도 아니었고, 뉴스에서 얼마나 비중 있게 다뤄지는지 봐야 하는 까닭에 자연스럽게 술이 조절됐다.

물론 김지훈과 신현수는 예외였다.

“김 과장, 신 교수, 그동안 고생했다. 고생했어. 주말 푹 쉬고, 새 마음 새 뜻으로 시작하자. 내 술 한 잔 받아. 쭉 마셔. 쭉.”

“원장님, 뉴스는…….”

“정훈철 국장이 직접 왔잖아. 직접. 두말하면 잔소리지, 뭘 걱정해? 잔 안 비우고 뭐 하니? 뭐 해?”

이준영 교수까지 가세했다.

“수고했다. 한 잔 받아.”

“예. 감사합니다.”

“야! 김 과장! 너 사람 차별하니? 이 교수 잔은 고분고분하게 받고, 왜 내 잔은 거부하는 거야? 나 원장이다. 원장. 준영이는 일개 교수야. 교수. 에이! 한 잔 더 받아. 한 잔 더.”

손일석이 쓰윽 끼어들었다.

“원장님, 제가 있지 않습니까? 한 잔 올리겠습니다. 고정하시고 쭈욱 들이켜시죠. 원장님이 안 계셨으면 이런 결과가 나왔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그치? 썩어도 준치라고, 나이 먹었다고 괄시하면 안 되지. 서럽다. 서러워. 손 교수, 일석아, 내가 팍팍 밀어줄게. 대장 하자. 대장. 민 부원장, 지네도 이리 와 한 잔 받아. 제일 공이 커요. 공이.”

뺄 줄 알았던 민정호가 바로 무릎을 꿇었다.

아주 공손하게.

“반만 주십시오.”

“그래. 그래. 반이 어디니. 반이. 안 마시겠다는 놈보다 백배 낫다. 백배.”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민정호가 술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은 처음이었지만 회식 때마다 본 풍경이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어 버틸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지도 몰랐다.

띠띠띠! 띠!

어느새 9시가 됐다.

뉴스가 시작됐다.

대통령 담화에 이어 곧바로 진상건이 연행되는 모습이 방영되자 모두들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재단에서 벌인 범죄 혐의만이 아니라 이전에 있었던 불법적인 일까지 정말 셀 수도 없는 의혹을 보도했다.

“후우! 저런 인간이 이사장이었다니, 이제라도 바로잡혀서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김지훈이 알딸딸한 눈가를 비볐다.

‘훈철이 형님이 정말 단단히 조사하셨네.’

서정훈의 구속 수사, 정훈철의 보도와 지원 사격, 어떤 권력을 가진 사람도 함부로 힘을 썼다간 대가를 치러야 하는 정국까지 진상건은 하늘이 무너져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것이다.

다신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앓던 이가 속 시원하게 빠졌다.

김지훈이 마음껏 외쳤다.

카르페 디엠!

“과장님, 아직 끝난 거 아닙니다. 내일 점심때 신 교수님, 이경석 교수님, 손일석 교수님, 진충기 교수님과 함께 할 얘기가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병원에서 뵙겠습니다. 그럼 이만!”

“예?”

‘무슨 일이 또 남았나?’

막판 민정호의 말에 김지훈이 눈만 멀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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