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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85화 (1,185/1,329)

11화

조사가 시작된 지 제법 오래됐지만 서정호는 어떤 연락도 주지 않았다. 기밀인 탓이라 믿고 싶었지만 민정호의 예측이 틀렸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중요했다.

진상건을 단죄한다고 해도 정도 이상의 자금이 집행되면 득보다 실이 클 가능성이 높았다. 최악의 경우 허공에 돈을 날리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병원의 미래가 바뀌지 않는 것이다.

현상 유지에 급급하며 간신히 생존하는 것과 최소 발전의 희망이 보이는 직장의 차이가 얼마나 현격할지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선대의 유업을 눈앞에서 잃을 신현수의 아픔은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김지훈을 비롯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과보고까지 하면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어 더욱 빠르게 진행시킬 텐데, 그 전에 막을 수 있을까?’

관련된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지만 결정타를 날릴 사람은 따로 있었다. 더구나 유일한 희망인 서정호 역시 지시를 따라야 하는 사람임은 분명했다.

운명의 신이 누구 편을 들지 모르는 일이었다.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뱉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무조건 된다. 진상건은 절대 자신의 욕심을 채우지 못한다.’

부지런히 회진을 돌고 서울로 출발했다.

전 병원의 관심이 쏠린 일인 데다 집행 여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날이었다. 어떤 이유로든 각자 자신의 사활을 건 원장단들도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이전과 확장이 시작됐다고 여기는지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불안은 전문 병원 식구만 느끼고 있었다.

진상건과 김병오 이사의 만면에 웃음꽃이 폈다. 더 이상 발목 잡힐 일이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김지훈의 눈에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로만 보였다.

‘오늘이 상황을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날인데 형님들은 어떻게 된 거지?’

“신 교수, 검찰 조사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야. 대비책은?”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했어도 대규모 자금을 집행하기에 일주일이란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점을 믿어야지. 만에 하나 집행하고 있다면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막아야 해.”

“이미 결정된 상황인데 가능할까?”

“단 한 시간이라도 늦춰야지. 민 부원장 말이 아니더라도 형님들이 스스로 정한 시한이 오늘이야. 그 안에 뭔가 결론이 날 거야. 난 그렇게 믿어.”

신현수의 얼굴이 예사롭지 않았다.

정말 몸싸움이라도 할 것 같았다.

다소 왜소하고 나이까지 많은 송재덕 교수마저 눈가를 굳히며 회의실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야야야’를 넘어 몸이라도 날리겠다는 기세였다.

김지훈이 어깨에 힘을 주었다.

‘정말 힘을 써야 하는 일이 생길까? 어후!’

생각과 달리 점점 힘이 들어갔다.

김병오 이사가 회의 시작을 알렸다.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참석 자격이 있는 분들만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관에 명시된 회의 요건에 따른 의견 개진이 아닌 관계로 전문 병원 운영이사는 자격이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신 이사님, 이사장님의 재량에 속하는 일입니다. 정관 좋아하지 않습니까? 항상 강조하는 원칙과 규칙을 따라 주세요.”

꽝! 문이 닫혔다.

항의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이사회 보고가 시작됐다.

신현수와 송재덕 교수가 참석했지만 어떤 정보도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애초 참석 자격이 없는 탓인지 민정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초조하지 않아요?”

“그런다고 일이 해결되겠습니까? 마침 우리밖에 없는데 티브이나 보시죠.”

‘이 판국에?’

“훈철 형님이 뭐 특종이라도 내보낸대요?”

“연락 못 받았습니다.”

여유로운 것인지, 기분을 풀려고 하는지 몰라도 민정호가 대기실에 걸린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심지어 이리저리 채널까지 돌려 댔다.

‘너무 태평하네?’

이미 보고는 시작됐고, 어떤 일도 일어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보다 못해 한 소리 하려던 김지훈이 돌연 눈을 크게 떴다.

긴급 속보!

『곧 청와대에서 긴급 발표를 시작합니다. 어떤 내용인지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지만 최근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부동산에 관한 내용일 것으로 관측됩니다.』

『최 기자, 그동안 모든 정권에서 부동산 대책을 여러 번 내놨는데 특별한 대책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까?』

『관계자 모두 이번에는 기대해도 좋다는 말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일부에서는 상상을 뛰어넘은 대규모 공급일 것이란 말도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단기간에 걸친 대규모 공급 대책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클 텐데 일단 발표를 기다려 보죠. 아무쪼록 이번에는 국민들이 내 집 마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말 확실한 대책을 기대해 봅니다.』

기자회견장이 비춰졌다.

웅성웅성 소란스러운 대화가 여과 없이 전해졌다. 99퍼센트의 국민의 최고 관심사라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취재하는 기자들 역시 나름의 의견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처럼 일부는 예전 대책의 재탕일 것이란 생각에 다소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김지훈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 대책이면 너무 범위가 넓잖아요. 검찰 수사도 대책의 일부라면 수사 강도가 떨어지지 않을까요?”

“투기꾼을 모두 잡는다고 집값이 떨어질까요? 수요가 넘치면 투기하는 사람은 또 생기기 마련입니다. 정부 입장에서는 종합 대책을 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긴 한데 투기꾼들에 대한 대책이 발표되지 않는다면 진상건을 잡지 못할 수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김지훈의 말문이 턱 막혔다. 아주 낯익은 사람의 등장과 함께 기자의 긴박한 목소리가 울리며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곧 기자회견이 시작됩니다. 정부 관계자들이 속속 입장하고 있습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비중과 규모입니다.』

‘최태우 의원?’

국무총리를 필두로 청와대 관계자, 국토부 장관,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경찰총장에 여당 관계자까지 정부 고위직 인사들이 줄줄이 입장했다.

김지훈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검찰과 경찰까지 참석했으면?’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자 회견장이 조용해졌다.

『곧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대통령님께서 직접 담화를 통해 발표하시겠습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사회적 물의가 발생하거나, 비난 혹은 비판 여론이 비등해지면 사과 발표를 하긴 했었다. 다만 사안에 따라 다른 데다 간접적이었을 뿐 국가 최고 권력자가 직접 기자회견에 나선 적은 없었다.

흥분과 기대가 한껏 고조됐다.

대통령이 입장했다.

『국민 여러분, 부동산 투기를 비롯해 제반 문제가 망국의 병이라 불릴 정도에 이른 점 깊게 사과드립니다. 이에 정부는 단호하고도 신속한 조치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공급 대책이 발표됐다.

어디에 몇만 가구를 공급하고, 교통 대책을 포함해 신도시까지 건설한다는 내용이었지만 김지훈이 관심을 둘 내용이 아니었다.

‘서울에 안 사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어쨌든 검찰총장까지 대동했으면 그 이유나 빨리 말해 주세요.’

눈을 크게 떴다.

귀를 활짝 열었다.

드디어 원하던 단어가 들렸다.

『부동산 투기가 토지와 집값 급등의 원인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정부는 단호하고도 강력한 의지를 갖고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반드시 뿌리를 뽑겠습니다.』

김지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쟁! 투기와의 전쟁이라고 했다.

이보다 강렬하고, 강한 의지 표현은 없었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라는 듯 사법 당국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 분명했다.

『그동안 정부는 사회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전방위적인 수사를 시행해 왔습니다. 특히 일반 국민이 아닌 힘을 가진 사람, 직위를 통해 취득한 정보를 불법적으로 이용한 사람 등을 최우선해 엄벌에 처할 것입니다.』

마치 진상건을 콕 집어 말하는 것 같았다.

당국자들과의 구체적인 질문과 답이 이어졌다.

믿어야 했고, 믿을 수 있었다.

‘됐어. 진상건, 넌 죽었어.’

김지훈이 회의실을 보며 씨익 웃었다.

진상건과 김병오 이사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회심에 찬 미소를 띠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무언가 분위기가 다르다고 알고 있었을 테지만 민정호와 다른 판단을 내렸는지도 몰랐다.

“곧 난리 나겠죠?”

“많이 당황할 겁니다. 가진 것을 모두 잃을 수 있는 데다 그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민정호의 능력이 새삼스러웠다.

“가진 정보가 훨씬 많았을 텐데 진상건은 왜 예측하지 못했을까요?”

“욕망에 눈이 멀면 최악의 경우보다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니면 이번에도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든지요. 아직 방심할 때가 아닙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선이 한둘이 아닐 겁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회견은 회견일 뿐이었다.

무슨 일이든 빠져나갈 구멍이 있기 마련이었다.

최악의 경우 정훈철이 대서특필한다고 해도 서정호가 움직이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여전히 늦기 전에 진상건을 잡아넣어야 한다는 사실이 핵심이었다.

“서정호 형님에겐 연락 없었죠?”

“궁금하다고 전화를 드릴 상황이 아닙니다. 자칫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진상건 이사장이 오늘 여기에 있다는 사실은 문자로 넣어 드렸습니다.”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오늘일까? 아니면 다음 주에?’

새로운 초조함이었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

진상건 홀로 나왔다.

누가 보고 있는지 눈길도 주지 못한 채 심각한 기색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옆방으로 사라졌다. 이제야 대통령이 직접 주관한 기자회견 소식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당장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서는 한가로이 보고 따위에 신경을 쓸 수 없을 것이다.

다급한 정도가 아니었다.

똥마려운 강아지 꼴이 따로 없었다.

민정호가 웃었다.

김지훈의 눈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누구에게 전화를 하는 걸까요?”

“진상건 이사장의 돈을 먹은 국회의원이겠죠. 여당 최고 실력자라는 최태우 의원도 혹시 불찰이 있었을지 몰라 몸을 사리는 판국일 텐데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군요.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겁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는 절대 못 빠져나갈 겁니다. 피할 수 있는 소나기가 아닙니다.”

진상건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급기야 고함 소리가 들렸다.

“뭐? 연락이 안 돼? 내 전화도 안 받고, 이것들이 지금 뭐하자는 거야? 당장 차 대.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지금 당장 알아내.”

와장창!

벌컥 문이 열렸다.

얼굴이 시뻘겠다.

김지훈과 민정호에게 눈길도 주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과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알 속에 견디지 못할 불안이 잔뜩 실려 있었다. 가면처럼 뒤집어썼던 당당하고 여유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김지훈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도 있네. 당신이 저지른 짓을 알면 누가 당신을 동정할까? 욕 안 먹으면 다행이지. 죗값을 치러.’

자금 집행 여부와 상관없이 진상건과의 게임은 끝났다. 이왕이면 많은 부분을 되돌릴 수 있기를 바랐고, 무엇보다 눈앞에서 진상건의 몰락을 보고 싶었다.

“야이! 개새끼야! 월급을 받았으면 돈값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전화통 붙잡고 앉아 있을 때야! 당장 튀어 나가서 찾아내. 돈만 축내는 새끼들!”

‘본모습 나오네. 동정의 여지가 없어. 형님은 저런 사람 안 잡아가고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는 거지? 제발 오늘이었으면 좋겠다. 오늘! 지금 당장! 저 자식이 개처럼 질질 끌려가는 걸 보고 싶다!’

사람 하나 잘못되기를 이렇게 바란 적은 없었다. 면전에 대고 욕을 쏘아붙여도 시원찮았지만 그럴 가치조차 없는 인간이었다.

그저 몰락의 현장에 있길 바랄 뿐이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저벅! 저벅!

구두 소리가 이상스럽게 묵직했다.

서정호와 수사관들이었다.

김지훈과 민정호가 벌떡 일어났다.

“형님!”

“여기서 보네.”

한마디 툭 던진 서정호가 진상건을 보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급히 몸을 피하려던 진상건이 수사관들에게 덜미를 잡혔다. 서정호가 손에 든 서류를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진상건 이사장님, 맞습니까?”

“당신 누구야? 검사야? 어디서 함부로 내 앞을 가로막아? 옷 벗고 싶지 않으면 당장 비켜.”

서정호의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당신을 부동산 투기, 배임, 횡령, 특수 사기 등의 혐의로 지금 즉시 구속합니다. 영장 확인하시죠.”

확실한 증거를 확보했다는 듯 단호했다.

순간 진상건의 무릎이 툭 꺾였다.

김지훈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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