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84화 (1,184/1,329)

10화

금요일 오후.

마지막 수술을 앞둔 김지훈이 휴게실 소파에 몸을 묻은 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전공의 때는 몰라도 펠로우 시절은 충분히 떠올릴 정도로 힘든 한 주였다.

‘현수 이 자식은 일이 바쁘면 수술 날짜를 미루던지 왜 진료는 꼬박꼬박 다 하고, 이번 주에 수술해야 할 환자까지 만들어서 이 고생을 하게 만드나. 환자와 함께 와서 수술 여부를 상의하는데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공여자 수술은 안호석이 대신 했고, 오히려 좋아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신현수가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하며 시행해 온 나머지 수술이었다.

물론 김지훈이 모두 수술한 것은 아니었지만 메이저 수술만 세 건이었다. 이경석이 복강경으로 가능한 수술을 맡아 준 덕분에 그나마 일과에 큰 지장을 받지 않았다. 대신 짬짬이 누린 휴식 시간을 모조리 반납해야 했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마지막 수술을 위해 몸을 일으키는 순간 우두둑 허리가 비명을 질렀다. 머리까지 무거워 찬물에 세수를 하고서야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다른 주에 비해 퇴근 시간이 특별히 늦어진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힘드냐. 맞아. 현수 욕을 해야 하는데 못해서 그래. 어디 놀러 다니는 거 아니라서 참는다. 그나저나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초조해 죽겠네.’

힘들긴 힘든 모양이었다.

신현수가 병원을 위해 얼마나 힘들게 뛰어다니는지 잘 알면서도 불평과 불만이 터졌다. 초조함이 겹쳐 유독 힘들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물론 얼굴 보는 순간 아무 걱정 하지 말라며 웃어 줄 테지만 말이다.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민정호와 딱 마주쳤다.

“수술 방에 웬일이에요?”

“과장님 만나러 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요.”

“내일 이사회 때문에요?”

“아닙니다. 다른 일입니다.”

“무슨 일인데요?”

“지금 말씀드리기 어렵고, 우리 병원만이 아니라 과장님께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럼 이만!”

환자가 기다리는 데다 곧바로 돌아서 붙잡을 겨를조차 없었다. 중요한 일이라고 한 이상 미룰 수도 없어 일과 후 또 시간 잡아먹게 생겼다.

무슨 놈의 일이 이렇게 많을까?

‘마지막 수술 끝나고 나면 더 퍼질 텐데 타이밍도 잘 맞추네. 그래. 이왕 힘든 거 아예 죽자. 죽어.’

어깨가 축 처졌지만 전문 병원을 믿고 온 환자의 수술이 남았다. 더욱이 위 절제에 있어서 유문을 남길 수 있는지 또 한 번 고민하고, 살필 수 있는 기회였다.

심기일전!

수술을 시작했다.

일전 휘플 시행 시 유문 보존이 가능한지를 두고 함께 논의한 때문인지 서도훈이 자청해 퍼스트를 섰다. 모든 신경을 집중시켜 수술을 진행하는 한편 유문 주변의 해부학적 구조를 다시 한번 눈에 박았다.

한편으로 고경철 교육도 잊지 않았다.

ㄱ, ㄴ, ㄷ도 모르고 한글을 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복강경 수술이 대세가 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개복 수술이 기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화면으로 보는 구조와 눈으로 직접 보는 구조가 주는 지식이 다를뿐더러 기구를 조작하는 방식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2차원과 3차원으로 보는 시각의 차이일 수도 있었다.

“고경철 선생, 요새 어떤 수술 들어가?”

“주로 간 이식 수술과 이경석 선생님의 라파로 수술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병원 특성상 간담췌 질환과 라파로가 많긴 하지만 전공의 때는 가급적 넓게 보고 배워야 해. 나도 위암 수술 오래간만에 하니까 많이 헷갈려. 무슨 소린지 알지?”

“예?”

이 년 차 되더니 기가 빠졌다.

하나뿐인 전공의라고 너무 애지중지하면 정작 핵심을 놓칠 수 있었다. 아랫사람이 즐비한 과장이라고 대놓고 지적하지 않을 김지훈도 아니었다.

“경철이 네가 이 대목에서 반문을 하는구나. 집담회 때 주로 펠로우 선생들이 답을 하니까 긴장도 풀릴 대로 풀렸을 테고 말이야.”

“아닙니다.”

“아니면 다행인데 우리 할 일은 하고 살자. 서도훈 선생, 간 이식부터 오늘 수술까지 우리 고경철 선생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하자.”

“예. 고경철 선생, 모레까지 리포트 제출해.”

‘어후! 죽었다.’

고경철이 울상을 지었다.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 하는 일 년 차와 모든 수술에 적극 참여해야 하는 삼 년 차나 사 년 차 사이에 위치해 가장 편하다는 시절이 이 년 차 때였다. 하지만 전문 병원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 쉴 틈이 거의 없는데, 무지막지한 용량의 리포트까지 작성해야 한다니 죽을 맛일 것이다.

그래도 어쩔 텐가?

리틀 이준영이라는 김지훈도 모자라 신 사인방 중 가장 매섭다는 서도훈의 오더를 무시했다가는 정말 죽을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죽으나 사나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고경철 선생, 확실하게 하자.”

묵직한 한마디로 깨끗하게 정리됐다.

수술도 덩달아 깔끔하게 끝났다.

서도훈이 마무리를 하는 동안 김지훈의 입이 쉬지 않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유문 보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서도훈 선생, 유문 기능을 보존하면서 수술 범위까지 좁아지는데 시도해 보는 것이 어떻겠어?”

“개복에서 가능하다면 라파로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마침 다음 주에 췌장암 수술이 있는데 시도해 볼까요?”

“그렇지? 문합 방법과 경험도 문제고, 하루 이틀 내에 라파로로 할 수 있는 수술이 아니니까 차근차근 가 보자. 시간 맞으면 내가 퍼스트 설게.”

“과장님이요?”

“과장이 무슨 소용이야?”

고경철이 콧등을 찡그렸다.

‘전 병원을 통틀어 수술 제일 잘한다고 인정받는 것도 모자라 최고의 수술 팀까지 이끌고 있는데 매형의 열정은 도대체 언제 식을까? 이준영 선생님이 스승님이시니 당연한 건가?’

생각해 보니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의 수술을 들어가면 거의 동일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사실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가장 긴장하는 때가 바로 이준영 교수의 월요일 공여자 수술이었다. 눈만 마주쳐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데다 분명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인데 한마디 날아오면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엄격함 속에 까마득한 후배를 향한 사랑과 열정이 담겨 있어 더욱 강한 긴장과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라 전문 병원에 파견 온 전공의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다.

힘들고 어려운 써전의 길을 걸어가려면 선배들의 열정은 반드시 배워야 할 면이었다. 자신과 주변을 뜨겁게 만드는 그 무엇을 말이다.

“타이! 컷!”

문득 든 생각에 몰두해 살짝 늦었다.

“고경철 선생!”

김지훈의 눈이 매서워졌다.

리포트가 부실하면 죽고도 남았다.

하루 일과를 끝낸 김지훈이 민정호를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미 퇴원했고, 외래 진료를 받을 일도 없는 진상미가 떡하니 앉아 민정호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진상미 씨, 어쩐 일로?”

“민 부원장님이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요.”

바로 감이 왔다.

‘스카우트구나. 곧 접촉할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네. 이사회가 더 급하지 않나? 진상미 씨도 말 한마디에 달려오다니 이상하네.’

스스로에게도 의아한 일이었다.

중요한 일이기는 해도 추측이 맞는다면 행정 직원을 뽑는 일이니 김지훈이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민정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당연한 절차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과장님, 앉으시죠. 짐작하셨겠지만 전에 말씀드린 일 때문에 뵙자고 했습니다. 먼저 진상미 씨 의견부터 듣는 것이 순서겠죠?”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렸다.

“진상미 씨, 상신개발 건부터 추가 자료까지 진상건 이사장의 일로 피해를 입으셨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직접적인 말은 듣지 못했어도 정보가 유출된 것을 알면 누구 소행인지 결국 찾아내겠죠. 현재 직장을 다니긴 어려울 것 같아요.”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손발이 묶여도 그 정도 능력은 잃지 않을 테고요. 기정사실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진상미가 한숨을 쉬었다.

이미 진평호 회장 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 피를 그대로 받은 진상건이 어떻게 나올지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선택이기에 후회할 일이 아니었지만 앞날이 막막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 나이에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일이 쉬울까? 다들 부러워하는 집안인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틀린 말씀이 아니네요.”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넘겨주신 자료를 보고 진상미 씨의 능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 비밀 자료를 빼내는 능력이 아니라 내용을 해석하고 정리하는 능력을 말하는 겁니다. 여하튼 우리 병원의 회계 담당자로 와 주시길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동의하신다면 대우는 섭섭지 않을 겁니다.”

진상미가 깜짝 놀랐다.

당연히 진상건의 일이 본론일 줄 알았다. 도움이 될 정보가 또 있는지 고민까지 했는데 자신에게 새 직장을 제안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전 병원 업무를 해 본 적이 없어요.”

“누구든 처음인 시기가 있지 않습니까? 사실 업무 영역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병원 재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관리를 해 주시면 됩니다.”

“솔직히 당황스럽네요. 제 능력을 확실히 아시는 것도 아닌데 이런 제안을 하시는 다른 이유가 있나요? 만일 진상건과 관련됐기 때문이라면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정호가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전 오직 능력과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만 봅니다. 신세를 져서도 아니고, 공과 사를 무시하면서까지 일을 처리한 적도 없습니다.”

진상미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구든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자 이제야 기회를 잡은 김지훈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무리 권한 밖의 일이라 해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될 수는 없었다.

“민 부원장님, 무슨 말인지 잘 알겠는데 왜 나를 부른 겁니까? 내 의견이 필요한 일이 아니잖아요?”

“알고 계셔야 합니다. 우리 병원의 확장과 종합 병원 건립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재정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직장 문제는 단둘이 얘기하는 것이 맞고, 종병 문제는 신 교수와 상의하는 것이 맞죠. 운영이사라는 직을 너무 크게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종합 병원과 전문 병원의 운영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처음부터 함께 진행해야 손발을 맞추기 쉽습니다. 그래서 진상미 씨에게도 미리 제안을 드린 겁니다.”

가히 동문서답 수준이었다.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발을 맞추다니 뭘 맞춰요?”

“미래를 대비하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설마 뭘 또 맡으라는 얘기예요? 지금 일로도 바쁘고, 머리가 아파요. 나보다 능력 좋은 사람도 많잖아요?”

“많은 회사에서 경력자를 뽑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울러 제 계약 기간이 일 년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과 일해야 하는지가 연장 여부에 중대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핵심인 분은 진상미 씨입니다.”

김지훈의 얼굴이 묘해졌다.

마음과 달리 반박하기 쉽지 않았다.

민정호가 자신을 인정하는 것도 모자라 은연중 강한 동료 의식을 내비쳤다. 더없이 기쁜 일이었지만 요원하기만 한 종합 병원 건립까지 거론하다니 무슨 속셈인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거 찜찜한데 왜 기분이 점점 좋아지지? 아니야. 정신 차리자. 이러다 최고의 써전 물 건너간다. 절대 말려들면 안 돼. 나 말고도 일할 사람은 많아.’

여하튼 진상미에겐 실례되는 일이었다.

민정호 역시 같은 생각인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아직도 고민 중인 진상미에게 서류 몇 장을 건네며 진지하게 재차 제안을 했다.

“제가 작성한 계약서입니다. 연봉을 포함해 근무 조건은 일정 정도 협상할 수 있지만 큰 폭의 조정은 불가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십시오.”

‘겨우 이틀? 일 처리 하나는 정말 신속하네. 진상미 씨 직장 문제를 파악한 것도 그렇고, 한 번 결정하면 미적거리질 않아요. 그나저나 계약서를 줬다면?’

김지훈이 행여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마디 했다. 승낙하든 거절하든 민정호에게 계약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진상미 씨, 거절하셔도 좋지만 기한을 꼭 지키세요. 앞으로 민 부원장을 또 볼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과장님은 제가 근무하길 바라시나요?”

환자와 의사로서 만났고, 아직까지 다르지 않기에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정호에게 처음 말을 들었을 때 반대하지도 않았다.

‘신중하게 생각하자. 내가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가 정말 중요할까? 난 왜 내 의견을 말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하나였다.

낯간지럽지만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전 진상미 씨의 능력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민 부원장님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믿고, 존중합니다. 특히 제 영역이 아닌 부분에서는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만일 함께하신다면 진상미 씨도 그런 동료가 됐으면 합니다.”

진상미가 웃었다.

“좋은 분들이시네요. 제안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마음 놓고 결정을 내릴 수 있겠어요.”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거절로 마음을 굳히셔도 직접 얼굴 보며 이유를 들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과 접촉할 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긍정적인 대답 기대합니다.”

진상미와의 자리가 끝났다.

김지훈이 바로 못다 한 얘기를 꺼내려는 순간 민정호가 본 척도 안 하고 그대로 일어섰다.

“내일 이사회 보고가 열 시에 있습니다. 늦지 않게 와 주십시오. 그럼 이만!”

“어? 어어?”

민정호가 보낸 신호는 명확했다.

김지훈의 의사와 상관없이 종합 병원 건립 때까지, 혹은 그 이후까지 중책을 맡아야 한다고 못 박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어버버 말도 못했지만 이 이상으로 행정적인 업무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자기 계약까지 거론해?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니야? 민 부원장 없어도 잘 돌아가……. 잘 돌아갈까? 왜 확신이 하나도 안 서지?’

세상 뜻대로 이뤄지는 일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지난 일주일 내내 골치를 아프게 했고, 마음까지 무겁게 만든 날이 하루도 안 남았다.

째깍! 째깍!

김지훈이 눈가만 문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