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나직한 목소리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투표 결과가 나왔다. 혹시 하는 마음에 기대를 품어 보았지만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과반의 찬성으로 서울 병원 확장과 천안 병원 이전 계획이 모두 가결됐음을 알려 드립니다. 부지 확보가 최우선인 관계로 기존 재정을 빠르게 투입할 것이며, 부족한 재원 역시 신속하게 조달하게 될 것입니다.”
“공식 발표는 언제 하실 겁니까?”
“내주 월요일 재단 이사장님 이름으로 정식 공표할 예정입니다. 이미 상당 부분 진척된 상황이지만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여러분의 전폭적인 협조 부탁드립니다.”
진상건과 김병오 이사를 비롯해 찬성표를 던진 이사들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이며 박수를 쳤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자신들의 목적을 이룬 원장단 역시 축하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진상건이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약소하나마 식사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빠짐없이 참석하셔서 귀중한 고언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됐어! 굵직한 부분부터 이 주 내로 마무리 짓고 슬슬 손 털면 된다. 돈도 안 되는 놈들의 지긋지긋한 요구를 들어주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부도 직전에 몰린 병원을 신현수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도 괜찮겠어. 하하하!’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에 어떤 사심도 보이지 않았다. 앞과 뒤가 다른 전형적인 사기꾼의 모습이었지만, 그 때문에 아무도 검은 속을 알지 못했다.
이대로 끝난 것일까?
신현수가 매서운 눈으로 김병오 이사를 보았다.
“아! 한 가지 결정이 더 있습니다. 초반 진행이 무척 중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경과를 보고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어 일주일 후 이사회를 다시 열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알고 싶은 분은 참석하셔도 됩니다.”
진상건이 입술을 모았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신현수의 요구를 승인한 이유가 있었다. 확실하게 못을 박아야 다시는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재간은 누구에게도 없으니 말이다.
“다들 고생하셨는데 이만 가시죠.”
태도나 목소리는 여전히 신사였다.
누가 남아 있을지 빤했다.
참석자 전원이 전문 병원의 극렬한 반대를 예상했다. 별다른 힘도 쓰지 못하고 안건이 통과된 상황에서 참석하면 그보다 이상한 일이 없을 것이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현수와 민 부원장이 재정 상황을 속속들이 설명하며 이번 계획의 위험성을 알렸을 텐데 알면서 속는 걸까? 아니면 속고 싶어 속는 걸까?’
원장단의 속 역시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모든 책임은 재단에 있을 뿐 자신들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는지도 몰랐다. 하긴 이번 일에 국한시키면 단 한 줌의 결정 권한도 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각자 자신의 이해에 따라 행동할 뿐이었다.
옳고 그름을 따질 일도 아니었다.
잠시 얼굴을 찌푸리던 김지훈이 누군가의 기척에 미소를 머금었다. 어느새 민정호는 차가운 표정, 냉정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따스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원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긴? 잘 통과됐다. 통과됐어. 진상건 얼굴에 꽃이 활짝 폈다. 꽃이. 자세한 얘기는 밥 먹으면서 하자. 가자. 가자.”
졸래졸래 뒤를 따르는 김지훈, 신현수, 민정호의 얼굴이 예상 밖으로 좋았다. 마치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됐다는 표정이었다.
“민 부원장님, 다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빤히 아는데 깊게 논의한 척 생색을 내네요.”
“내용에 문제가 있는데 형식을 더 잘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사들의 이해관계가 이전이냐, 확장이냐에 따라 다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상건 이사장은 분명 그 점을 이용해 격론을 유도했을 겁니다.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 빠져나갈 틈을 마련해 놓아야 할 테니까요.”
“자신의 뜻이 아니라 다수의 뜻이다! 이거죠? 관점에 따라 참 치밀하고 머리 좋은 사람인데, 왜 이런 일에 그 좋은 머리를 쓰는지 모르겠네요.”
“돈 욕심을 비난해서는 안 되지만, 김 과장님과 우리보다 훨씬 부자인 사람 중 누가 더 욕심이 클까요?”
“둘 다 만만치 않겠죠. 욕할 일도 아니고, 솔직히 욕심 없는 사람 있겠습니까?”
“예외적인 사람을 빼면 그렇긴 합니다.”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우리 병원 식구들이 그렇긴 하지.’
조촐한 식사가 시작됐다.
송재덕 교수가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했다.
“김 과장, 신 교수, 너희들 말대로 하긴 했다만 정말 괜찮은 거니? 이러다 폭삭 망하는 거 아니니? 불안하다. 불안해. 진상건이 좋아하는 걸 보니까 화도 많이 난다.”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사실 우리도 불안합니다만, 모든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진상건이 자금 집행을 서두르고, 서정호 검사님의 수사가 제대로 진척된다면 한순간에 뒤집어질 겁니다.”
“일주일 내에 그렇게 될까? 너무 늦어지면 진상건을 잡아도 통장이 텅텅 빌 텐데 그땐 어떻게 하니? 그땐?”
“빚이나 없으면 다행이겠죠. 하지만 현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그 정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진상건을 막을 수 없습니다.”
민정호가 적절한 때 입을 열었다.
“원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안건 통과를 막지 않은 이유는 진상건 이사장을 제대로 잡기 위해서입니다. 실제 저지른 범죄와 미수의 차이가 어마어마합니다.”
“확신이 보여서 마음이 놓인다만 시간이 너무 촉박해. 너무. 서정호 검사가 날고뛰는 검사란 말은 들었지만 진상건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거물이라며. 거물.”
“이번은 다르고, 달라야 합니다. 여기저기 돈을 뿌려 매수한 인간이 아무리 많아도 빠져나갈 구멍이 거의 없습니다. 비호하려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까지 다칠 가능성이 높고요. 결코 몇 년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랬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근데 민 부원장은 도대체 진상건에게 어떤 원한이 있는 거야? 솔직히 말해 이전이든 확장이든 뭘 해도 우리 병원에는 아무 영향도 없으니까 계약 얘기하지 마라. 뭐니? 뭐야?”
김지훈이 귀를 쫑긋 세웠다.
이번 일과 민정호를 아는 모든 사람이 갖는 공통의 의문이었다. 송재덕 교수가 말을 꺼낸 이상 쉽게 넘어갈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원장님, 원한 때문에 움직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옳은 일을 하고자 할 뿐입니다.”
“사적 질문 하지 말라는 말과 뭐가 달라? 비밀이 많으면 언젠가 탈이 나는 법이다. 마음 열고 싹 말하면 편해질 거야. 뭐니? 뭐야? 혹시 진상건 때문에 폭상 망해서 전 재산 말아먹기라도 했니?”
“특별하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한잔하시죠.”
집요한 공격이 이어졌지만 민정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몇 번 더 찔러 본 송재덕 교수도 시들해졌는지 이내 본래의 주제로 돌아왔다.
관건은 일주일이란 시간이었다.
“서정호 형님 수사가 더디게 진행된다고 해도 정훈철 형님이 크게 터트리신다고 했습니다. 민 부원장과 진상미 환자가 제공한 정보까지 드렸으니까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방송의 힘을 믿자 이거지? 그래. 그래. 뭐가 됐든 도움이 된다면 다 잡아야 할 때다.”
다들 송재덕 교수를 안심시키는 말을 했지만 실상 초조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세상 사람 모두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일조차 하루아침에 뒤집히는 경우가 있는데 누가 미래를 확신할 수 있을까?
할 일은 딱 하나만 남았다.
신현수가 짊어질 일이었다.
“신 교수, 자금이 집행되자마자 알 수 있는 거지? 설마 그 부분까지 숨길까?”
“공식 발표를 하면 진상건이 아니라 재단이 움직이는 거니까 그럴 이유가 없지. 내가 걱정하는 건 지출 규모와 재단 자산을 이용한 대출이야.”
계약을 파기하면 위약금을 물어야 하는 것이 사회적 상규다. 더구나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민감해하는 부동산 거래였다.
계획이 실행되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손실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일 손해가 막심해지면 진상건을 잡아 처넣는다고 해도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파산이다.
환자 진료는 유지되겠지만 구성원 전체는 고통 속에 삶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떠날 테고,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남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 병원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 없었다. 굴지의 대형 병원 두 개가 흔들리는 만큼 어마어마한 파장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운영을 책임진 재단 이사들은 가진 지분만 포기하면 된다. 다들 그동안 쌓은 부로 먹고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다. 단지 도의적 책임 혹은 비난을 감수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물론 진상건과 연루된 이사들은 법적 책임을 져야 하지만 말이다.
모든 면에서 극과 극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하기에 신현수의 어깨에 걸린 짐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신 교수, 마지막까지 힘내자. 나도 훈철 형님에게 연락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게.”
“힘내야지. 아버님의 유업이 아니더라도 병원을 믿는 환자와 직원이 몇 명인데 어떻게 포기하겠어? 오래전에 생각을 바꿨어. 우리의 진짜 목표는 진상건의 몰락이 아니라 환자의 희망이자 삶의 터전인 병원을 지키는 거야.”
멋진 말이었다.
응분의 대가를 치르기 바라지만 세상에 나쁜 놈이 한둘도 아닌데 진상건 같은 인간이야 안 보고 살면 그뿐이었다. 욕심 부리다 엮이지만 않으면 평범하게 살 방법은 널리고 널렸다.
마음은 싱숭생숭했지만 모처럼 한가한 일요일이었다. 조카 재롱도 볼 겸, 그간의 경과도 알려 줄 겸 손일석을 찾아 시간을 보냈다.
손정훈!
선천성 거대 결장으로 고통받던 아이가 아니었다. 방글방글 잘도 웃었고, 낯도 가리지 않았다. 어느새 첫 걸음마를 할 시기가 됐는지 다리 힘이 장난 아니었다.
“조금 있으면 걷겠어. 빠르네.”
“빠른 아이는 구 개월이면 걷는다잖아. 내 아들인데 늦을 리가 있어. 자식이 힘도 좋아서 와이프가 쩔쩔맨다.”
“건강해서 좋네.”
배에 난 커다란 상처만 아니면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포동포동 오른 아이 살과 이젠 제법 엄마 티를 물씬 풍기는 고경희는 누가 봐도 평범한 모자지간이었다.
‘모두 행복해해서 정말 다행이다.’
정훈이를 보며 미소 짓는 김지훈을 보던 손일석이 대낮 맥주 한 캔을 들고 왔다.
“이사회는 어떻게 됐어?”
“일이 참 웃기게 됐어. 진상건을 확실하게 잡으려고, 무난하게 안건을 통과시켜 주는데 기분이 묘하더라.”
자세하게 설명했다.
손일석이 코를 매만졌다.
“걱정하지 마. 상황을 이리저리 맞춰 보니까 예상외로 촉이 좋아. 높은 데서 떨어질수록 다리몽둥이 하나 부러지는 걸로 끝나지 않는 법이야. 진상건은 목이 부러질 것 같다.”
“그럴까?”
“우리 김 과장 불안한 눈을 보니까 가슴이 찢어지네. 역시 내가 함께했어야 했어. 미안하다. 정훈이도 잘 크고 있으니까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병원도 중요하지만 정훈이만큼 중요하진 않아. 네 말대로 가족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뭘 할 수 있겠어?”
사실 주변에 손일석 이상으로 긍정적인 사람도 없었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좋은 기운을 받은 덕분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덩달아 의욕까지 치솟았다.
그동안 병원 일을 핑계로 월요일에 있을 간 이식 환자와 기존 수술 환자에게 다소 신경을 덜 쓴 것 같아 마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병원을 잠깐 다녀왔다.
우려와 달리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는지 일상적인 대화만으로 충분했다. 지대한 도움을 준 진상미 역시 잘 회복되고 있었다.
“일은 잘 해결되고 있나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고, 덕분에 잘 진행되고 있지만 환자는 자신의 몸에만 신경 쓰시는 게 맞습니다. 괜찮으시면 내일 퇴원해도 되니까 미리 준비하세요.”
“휴가까지 받았는데 며칠 더 있으면 안 되나요?”
“우리 돈 많이 벌게 해 주시려고요? 쓸데없이 병원에 오래 계시면 없던 병도 걸립니다.”
진상미가 밝게 웃었다.
“선생님도 농담을 하실 줄 아네요.”
“제가요? 민 부원장님에게 할 말입니다.”
김지훈도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문득 진상미를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민정호의 말까지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불과 두 번째 봤을 뿐이고,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환자와 의사 이상의 사이도 아닌데 사람 인연 참 무서웠다.
‘나도 같은 생각이라니 세상 일 묘하네. 진상미 씨가 그렇게 친근하게 느껴졌었나?’
입이 근질거렸다.
함께 일할 의향이 있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제안하거나 평가할 입장이 아니었다. 반면 만일 서로가 원하고, 나서야 한다면 진상미 편에 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민 부원장이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정말 함께 일할지도 모르지.’
나름 즐거운 상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온 김지훈이 바짝 엎드렸다. 마님의 양해를 훌쩍 넘어설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김 과장님!”
호칭 변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희연아! 숙제하니? 아빠가 뭐 도와줄 거 없어?”
꼬리 바짝 내리고, 집안일 알아서 돕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물론 옷도 허물 벗듯 벗으면 안 된다. 세탁기와 친해질수록 마님 눈길 부드러워지는 법이었다.
시간 참 더디게 흘렀다.
서정호, 정훈철, 신현수, 민정호에 진상건까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