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서울 병원 회의실에 재단 이사들과 각 병원 중요 인사들이 속속 입장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정식으로 올라온 안건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목소리.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사람.
진상건을 비롯해 몇몇 이사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는 사람까지 일견 다양한 모습을 보였지만, 각자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만은 확실했다.
신현수, 송재덕 교수와 함께 김지훈이 입장하자 일제히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애초 참석 자격이 없는 민정호의 부재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김지훈도 마찬가지 입장이라 여기저기에서 말이 나왔다.
김병오 이사가 김지훈을 제지했다.
“전문 병원 운영이사는 재단 이사나 원장단 소속이 아닙니다. 회의에 참석할 수 없어요.”
“김진호 부원장님 대신 참석했습니다. 권한을 위임한다는 위임장을 받아 왔습니다.”
김병오 이사가 힐끗 진상건을 보았다.
김지훈이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잘 아는 진상건이었다. 걸림돌이 분명한 데다 중요 역할을 해야 할 원장단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네까짓 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기회를 줘 봐야 분란만 일으키겠지. 형식적으로 하는 논의에서 골치 아프고 싶지도 않아. 시작도 하기 전에 소란을 일으키면 네놈들이 더 불리할 거야.’
진상건이 고개를 저었다.
김병오 이사가 눈가를 굳혔다.
“신 이사, 위임을 해도 된다는 규정이 없다는 거 잘 알지? 원장단만 참석할 수 있는 자리야. 김지훈 선생은 아예 자격이 없어.”
“안 된다는 규정도 없습니다. 투표권이 있는 이사 자격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논의를 위해 참석한 이상 우리 병원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어허! 왜 이래?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거야. 회의 시작도 하기 전에 방해를 할 생각이아?”
노골적이었다.
신현수도 물러서지 않았다.
목소리가 커지자 여기저기에서 관심을 보였다. 합당하다는 의견과 규정에 어긋난다는 의견이 엇갈리며 결국 안건 토론도 하기 전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김지훈이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내가 반대한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지. 결국 투표 권한도 없는 날 막는 것은 스스로 안건에 허점이 많다고 인정하는 꼴인데 불쌍해 보일 지경이네.’
자격 시비가 붙은 당사자가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자코 상황만 바라보던 송재덕 교수가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규정에 없다면 원칙을 지키면 됩니다. 각 병원 원장과 부원장이 참석할 수 있다는 말은 두 명에게 권한을 준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요. 더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법과 관련된 일조차 위임장을 인정하는데 자격이 안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민간 재단이라고 쉽게 생각하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그럴수록 규정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규정이 애매모호하면 구성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계속 반대하고 싶으시면 투표로 결정합시다. 원장단 구성과 권한에 관한 문제니까, 여기 계신 원장님과 부원장님들도 각각 한 표를 행사해야 합니다.”
원장단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상건이 눈가를 찌푸렸다.
객관적으로 보면 송재덕 교수의 의견이 보다 일리가 있었다. 귀찮은 일을 피하려다 도리어 소란만 일으킨 꼴이었고, 이 상황에서 원장단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다간 돌발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제길! 내 앞에서는 웃으며 꼼짝도 하지 못하는 것들이 의사랍시고 신현수 편을 들어? 전문 병원이 반대한다고 욕을 할 때는 언제고, 자신의 권리가 걸렸을 때는 한편이라 이건가?’
진상건의 표정이 확 변했다.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김병오 이사님, 송재덕 교수님 말씀도 틀리지 않네요. 사소한 문제니까 넘어갑시다. 김지훈 선생님, 예의를 지켜 준다면 참석해도 좋습니다.”
“예의 좋지. 소리 지른 건 난데 김 과장은 왜?”
나직한 목소리가 몇몇 사람에게 똑똑히 들렸다. 송재덕 교수가 또박또박 남들과 다르지 않은 말투로 말할 때 얼마나 진지한지 잘 알고 있어 은근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회의가 시작됐다.
서울 병원 확장과 천안 병원 이전이라는 안건이 정식으로 상정되자 상당한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각 병원 원장단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이번 논의는 실제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의견을 듣고 참조하는 자리입니다. 이사님들은 자신의 의견을 표로 행사하시기 바랍니다. 서울 병원부터 의견 말씀해 주시죠.”
“최근 들어 서울 병원의 위상이 저하되고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필요한 시설을 적재적소에 만들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한 공간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유수한 대학 병원이 밀집한 지역인 이상 특단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확장에 찬성한다는 말입니까?”
“그 이상의 조치가 필요하지만, 재정 상황을 감안해 확장만이라도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확장과 이전 중 한 가지만 가능하다면 양보하실 수 있겠습니까?”
“곤란합니다. 우리 재단의 대표 병원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합니다. 서울 병원의 이미지가 추락하면 모든 병원에 영향을 끼치고도 남습니다. 결국 어떤 투자를 해도 서울 병원이 배제된다면 전체적으로 손해가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확장이 반드시 필요하며, 일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예. 참고로 서울 병원의 수익과 비용을 적은 자료를 드릴 테니 깊게 고민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병오 이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김지훈은 잠자코 지켜만 보았다.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네. 서울 병원은 재단 재정 상황이 어떤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건가?’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내심 전체적인 상황을 보길 원했다. 하지만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서울 병원의 당면 과제를 말하는 이상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해당 병원의 의사들을 대표할 뿐이었고, 어차피 고용된 의사기에 재단을 먼저 생각하라는 요구는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천안 병원의 입장이 이어졌다.
“이제는 무조건 서울이 아니라 병원이 위치한 지역을 무엇보다 중시해야 합니다. 천안 병원 역시 충남의 대표 병원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서울 병원 이상의 수익을 내온 것도 주지의 사실입니다. 따라서 좁고 낙후된 건물부터 복잡한 진입로까지 문제가 산적한 이상 이전 이외에는 어떤 해결책도 없습니다.”
“한정된 재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해야 합니다. 이전이 확장보다 우선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까?”
부원장이 몇 장의 도표를 배부했다.
“우리 역시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천안 병원의 외래 환자 수, 수술 건수, 검사 횟수는 물론 장례식장과 편의 시설 이용률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입니다. 시기를 놓치면 타 대학 병원보다 뒤처질 테고, 그때는 이전을 해도 이미 늦습니다.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절대적으로 이전이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그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질문하실 분 있습니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전문 병원 역시 말이 없었다.
진상건에게는 의외이자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전문 병원의 의견을 듣겠습니다. 원장단분들과 이사님들은 전문 병원이 독립채산제를 택하고 있으며, 재정이 통합되는 시기조차 정해지지 않았음을 명심해 주십시오. 엄밀하게 말해 이전과 확장에 어떤 재정적 역할도 없다는 말입니다.”
“사정은 알지만 재정이 분리되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물밑 논의도 없었습니까?”
서울 병원 원장의 말에 김병오 이사가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말 못할 고충이 있다는 사실만 알아주십시오.”
송재덕 교수와 김지훈이 코웃음을 쳤다.
공적인 일에 한해 신현수와 모든 사안을 공유했다. 노력이라는 좋은 말을 거짓을 치장하는 데 사용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화를 낼 일이었다.
‘정말 뻔뻔하네.’
“전문 병원 의견 말씀하십시오.”
당연히 송재덕 교수가 나섰다.
“독립채산제를 시행한다고 해도 재단 산하 병원입니다. 어느 한쪽에 문제가 생기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규모가 큰 서울 병원과 천안 병원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게다가 이전과 확장을 동시에 추진하는 순간 엄청난 돈이 들어가게 돼 있는데, 현재 재정 상태가 명확하게 공개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재정 운용은 재단 이사회 고유의 권한입니다. 원장단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니까 말씀 가려서 하십시오.”
“그렇습니까? 저도 재정 상황을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당위성만 따지기에는 너무 심각한 문제가 보여 한 말입니다. 김지훈 선생에게 잠시 발언권을 넘기겠습니다.”
상황이 변했다.
적극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방법은 폐기해도 좋을 첫 대처 방안이었다. 하지만 각 병원이 내세우는 주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야 향후 똑같은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김지훈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전문 병원 김지훈입니다. 다행히 양 병원에서 자료를 준비하셔서 설명드리기 한결 편해졌습니다. 먼저 각 병원의 수익이 얼마인지 확인해 보십시오. 한계에 달했다는 말씀을 인정하지만 이런 수익 구조로 확장과 이전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장기적인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수많은 직원들의 삶과 환자 치료가 걸려 있습니다. 병원 재정이 건실하지 않으면 병원 본연의 책임마저 이행하지 못할 겁니다. 이에 재단에서 계획하고 있는 자금 조달 방안 공개를 정식으로 요청드립니다.”
진상건이 피식 웃었다.
‘신현수, 네가 준비한 논리가 겨우 이거였어? 권한과 권리조차 구분하지 못하는군.’
김병오 이사도 이미 예견했던 일이라는 표정이었다. 이미 원장단은 자의든 타의든 원하는 대로 움직였고, 이런 식이라면 전문 병원의 반대도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사실 신현수 이사가 아니었다면 대응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재정 관리는 재단 이사회 고유의 업무입니다. 더욱이 사업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재정을 공개한다면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돈이란 놈이 그만큼 무섭지 않습니까? 공개할 수 없습니다.”
“그럼 추정치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부정확한 정보로 판단을 흐리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에 하나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이사님들이 동의를 하시겠습니까? 오랫동안 병원을 위해 힘써 오신 이사님들을 믿으시면 됩니다.”
‘역시 능구렁이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론을 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진상건과 적대 관계인 신현수를 대변할 김지훈이 질문 하나를 던지며 순순히 물러났다.
“오늘 안건이 통과된다면 시행 일자가 어떻게 됩니까? 그 정도는 알려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공개적으로 준비해 왔습니다. 원장단이 한마음으로 동의하시고, 이사회를 적법하게 통과한다면 곧바로 시행할 예정입니다. 모든 분들이 아시다시피 땅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시일을 끌게 되면 부지 확보조차 어렵게 됩니다.”
김지훈의 눈이 번쩍였다.
‘곧바로 시행한다는 말은 일주일도 안 걸린다는 얘기겠지? 하루라도 빨리 손을 털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현수가 자금 집행을 제때에 알아내는 것이 관건이네.’
진상건과 김병오 이사로서는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 지어야 발 뻗고 잘 것이다. 일단 무시하기로 했지만 항간에 부동산 투기를 잡는다는 소문도 도는 데다 투자금을 빨리 회수할수록 이익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할 말 없습니다.”
송재덕 교수까지 물러서자 참석자 모두 깜짝 놀랐다. 신현수와 진상건이 어떤 관계인지 잘 알고 있는데, 신현수의 의중을 대변해야 할 사람이 모두 인정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다니 의아한 일이기도 했다.
말은 고분고분하게 하지만 투표에 들어가는 순간 물리적으로 막겠다는 걸까?
싸움은 엉뚱한 곳에서 벌어졌다.
김병오 이사가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각 병원 의견 잘 들었습니다. 이사회는 참조만 할 뿐 확장과 이전 중 하나의 방안만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서울 병원과 천안 병원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재정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어 사활을 걸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병원을 위한 일일까? 자신을 위한 일일까?’
의문도 잠시, 진상건을 보는 순간 의도된 일임을 알 수 있었다. 확장과 이전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하나라도 틀어지면 최종 목표인 전문 병원 부지를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충돌을 지켜보는 이유는 명확했다.
‘둘 다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명분을 세우겠다 이거구나. 이쯤 되면 진상건이 한마디 해야 되는데.’
추측대로 진상건이 나섰다.
“자자! 모두 흥분 가라앉히고 제 말부터 들으십시오. 제 입장에서는 모든 병원이 다 중요하고, 발전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일단 확장과 이전 모두 시행하는 안까지 포함해 표결에 부치겠습니다. 어떤 결정이 나도 따라 주셔야 합니다. 이의 없으시죠?”
“좋습니다.”
“그럼 투표에 들어가겠습니다.”
참석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신현수에게 쏠렸다.
진상건과 김병오 이사 주도로 만들어진 발전 계획이 통과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대로 순순히 물러난다면 항복의 백기를 드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재단 경영의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갈 것이다.
선대부터 심혈을 기울여 키운 병원이건만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전문 병원에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자명한 일이었다.
이사들이 하나둘 투표장으로 향했다.
불과 두 명의 이사만이 다가가 몇 마디 말을 건넸을 뿐이었고, 신현수는 말이 없었다. 체념인지, 분노인지 모를 눈빛만 보였다.
반면 게임 끝났다는 듯 진상건의 얼굴은 밝았다. 신현수의 존재 자체를 무시한 채 김병오 이사와 환담을 나누며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좌중의 분위기가 복잡했다.
연임을 생각하며 눈가를 좁히는 사람.
‘끝났네. 끝났어. 역시 급이 다르네.’
선배이자 선대 이사장을 기억하는 사람.
‘후우! 신현수 선생, 누구보다 병원에 대한 애정이 클 텐데 상심하지 말기를 바라.’
김지훈과 송재덕 교수만이 어깨를 두드리며 애써 미소를 보일 뿐이었다. 그저 결과를 기다릴 뿐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다는 것 같았다.
이사들만의 시간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