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슨 일인지 묻는 사람은 김지훈인데 시선은 신현수에게 가 있었다.
“신현수 선생님이시죠? 저 기억하세요?”
“누구……. 아! 진상미 씨?”
무척 큰 도움을 받았지만 일이 바빠 입원한 후에도 본 적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나 이혁원 교수에게 수많은 고민을 안겨 주었던 환자를 제자인 신현수가 모를 리 없었다.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또 아프다고 얘기 들었습니다. 우리 김 과장만 믿으십시오. 인사가 늦었습니다만, 도움 주신 일 정말 감사하고요.”
“저도 감사드려요.”
진상미가 뜸을 들였다.
이제야 김지훈을 보았다.
‘진상건 때문에 내게 신경을 쓴다고 해도 이런 선생님들을 믿지 못하면 누굴 믿을 수 있을까? 김지훈 선생님, 환자를 대하는 마음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선생님께 드리는 마지막 선물이에요.’
“다른 게 아니라, 도움이 될지 어떨지 모르지만 자료가 하나 더 있어서요.”
깜짝 놀랄 일이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큰 도움이 될 일이기에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왜 입원 즉시 건네지 않고 이제야 말하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신현수에게 자료를 주면서도 정작 김지훈에게 눈길이 쏠려 있는데도 말이다.
‘내 아픔보다 자료에 더 관심을 쏟았다면 절대 제공하지 않았을 거예요. 항상 환자부터 생각하는 의사로 남아 있기를 바라요.’
김지훈과 신현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치료 잘해 주실 거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곧바로 자료를 확인했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동시에 전화기를 잡았다. 자료를 꽉 채운 어지러운 숫자와 복잡한 표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민 부원장님, 퇴근 중입니까?”
(예. 왜 그러시죠?)
“연구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지금 당장 차 돌려요. 진상미 씨에게 새로운 자료를 받았습니다.”
김지훈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아무리 보아도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회계 관련 업무를 하는 진상미가 추가로 건넨 자료였다. 별다른 의미가 없다면 책상 한구석에 처박아 두었을 것이다.
째깍! 째깍!
수술실에서 조직 검사를 기다리는 때 이상으로 초조했다. 봐도, 봐도 움직이지 않는 시계 침을 보고 또 보며 답답한 숨만 내뱉었다.
드디어 민정호가 도착했다.
그대로 자료를 내밀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가뜩이나 표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었기에 초조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천천히 마지막 장을 넘긴 민정호가 고개를 들었다.
의미 모를 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슨 내용이에요?”
“꼭 필요했던 퍼즐의 조각 하나를 찾았습니다. 일단 서정호 형님에게 연락하고, 제 추측이 맞는다면 작전을 변경해야겠습니다.”
“작전을 변경하다니요?”
머리를 맞댔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민 부원장님 판단이 정확했으면 좋겠네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지금 즉시 서정호 형님을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진상미 씨는?”
“모레 수술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김 과장님, 진상미 씨가 퇴원하기 전에 꼭 만나야겠습니다. 자료를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한 분은 어디에서나 스카우트 대상이 아니겠습니까?”
뜬금없는 소리였다.
신현수도 눈만 말똥거렸다.
“스카우트라니요?”
“제 대신 행정부원장을 맡아도 충분한 사람을 놓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회계 사무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대우도 일반적이니까 대화가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규모가 큰지, 작은지 어떻게 알아요?”
“설마 자료의 신빙성도 확인하지 않고 일을 진행시켰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사람은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때론 주변 상황이 진실을 알려 줄 때도 있고요.”
자료의 신빙성, 아니 진상미를 의심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다른 분야에 경험이 없는 의사의 한계이자 민정호의 치밀함이었다.
“그럼 이만!”
민정호가 걸음을 서둘렀다.
김지훈이 넥타이를 풀며 이마를 닦았다.
“우리가 하나를 생각할 때 민 부원장은 열을 생각하고 있었네. 다른 세상 사람 보는 것 같아. 진상건이 얼마나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인지 새삼 느꼈어.”
“그래서 작정하고 사기 치는 사람을 못 당한다는 말이 있겠지. 계약서 하나 잘 쓴 덕분에 우리 능력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동감이야.”
“진상미 씨 수술 잘 끝내. 은인이라고 해도 무방한데 보답을 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위암 환자 도로 가져가시는 건 어때? 진상미 씨 수술을 앞당길 수 있거든. 자료가 확실하다면 할 일도 거의 없잖아?”
신현수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김 과장, 환자하고 입장 바꿔 생각해 봐. 집도의가 또 바뀌면 의사를 믿을 수 있겠어? 허구한 날 신뢰를 외치면서 왜 이래?”
“그렇구나.”
주변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데 그놈의 일복은 왜 그대로인지 알 길이 없었다. 문득 마지막 당직 때 겪었던 아수라장과 다음 주에 당직이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 김지훈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일이 너무 많아!’
이젠 김지훈에게도 공포였다.
시간은 변함없이 흘렀다.
서정호의 연락이 없는지 민정호가 은연중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김지훈 역시 당장 전화해 사정을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선뜻 번호를 누르지 못했다.
‘민 부원장은 확신하는데 형님도 같은 생각일까? 엠바고까지 요청한 상황에서 함부로 물어볼 수도 없고 궁금해 죽겠네.’
이사회의 대처 방안까지 바꾼 상황이었다. 이러다 일이 잘못되면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설 정도였다.
또 하루가 지났다.
일복 줄어들지 않는다고 내심 불평했던 김지훈의 얼굴이 도리어 편해졌다. 첫 번째 수술을 마치고, 연이어 신현수의 위암 환자를 수술하는 동안 마음속 불안을 싹 잊을 수 있었다. 겸사겸사 유문을 보존할 방법까지 찾느라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드디어 진상미가 수술할 차례가 됐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사라졌던 걱정이 또다시 느껴졌다. 진단을 위한 복강경이라지만 배 속에 아무런 병변이 없어도 문제였고, 있어도 문제였다.
‘없으면 쓸데없는 수술을 한 꼴이고, 만일 재발했다면 또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니까 환자에겐 그보다 나쁜 일이 없네.’
덩달아 진상건과 이사회 일까지 떠올랐다.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 진상미였기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탓에 심리적으로 불안해졌다.
의외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만큼 진상건 문제가 머릿속에 단단히 박힌 탓이었다. 애써 지우려 할수록 하루 앞둔 이사회에서 벌어질 일이 더욱 걱정됐다.
김지훈이 훅훅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라파로로 간단하게 끝날 가능성이 높아 다행이지, 다른 수술이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수술실로 가야 할 시간이 됐다.
다소 무거운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민정호에게 연락이 왔다. 나름 확신했다지만 일개 개인의 판단에 불과해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알 길이 없었다.
초조한 마음을 안고 귀를 기울였다.
(우리가 원하던 판이 깔렸습니다. 진상미 환자분 수술 잘 끝내 주십시오.)
“서정호 형님 의견이죠?”
(그렇습니다. 정훈철 형님에게도 정보를 드렸고, 서정호 형님과 상의해 약속한 기한이 지나는 대로 터트릴 생각이라는 말씀까지 들었습니다. 특종 잡았다고 좋아하시더군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소식에 춤을 추고도 남았다. 무거웠던 다리에 힘이 팍팍 들어가며 오로지 진상미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막상 수술실에 누우니까 불안하네요.”
“경험이 있다고 적응할 일이 아니니까요. 마음 편히 가지세요. 수술 잘 끝내겠습니다.”
수술이 시작됐다.
쓰리 포트로 수술한 자국이 선명했다.
원 포트로 수술하기 때문에 배꼽 주변의 상처만 조금 더 커질 뿐이었다. 배 속에 있을지 모를 병변만 해결하면 재수술을 받았는지도 잘 모를 것이다.
“모찬우 선생, 시작하자.”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넣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외부와 이어졌던 조그만 상처에 모두 장이 달라붙어 있었다. 복강 내 장기가 공기에 접한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생각보다 심한 것이 사실이었다.
“모찬우 선생, 라파로로 수술한 환자도 예상외로 심한 흉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잘 기억해 둬. 잘못하면 카메라 넣을 구멍을 뚫다가 장 손상을 줄 수도 있겠어.”
“어떤 사람은 개복 수술을 받고도 흉을 거의 볼 수 없는데 사람마다 참 다르네요.”
“다 똑같으면 의사 하기 쉽겠지. 우리보다 경험이 훨씬 많은 선생님들이 공연히 아뻬를 할 때도 집중하고, 긴장해야 한다고 강조하시겠어? 들러붙은 장부터 떼자.”
원 포트로 진행하는 이상 퍼스트가 할 일은 없었다. 모찬우 스스로 두 번째 수술인 까닭에 만일을 대비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긴 했지만, 강력한 참가 요청을 뿌리치지 못한 탓이 더 컸다.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지.’
“모스키토! 보비! 가위!”
김지훈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가늘고 작은 기구 끝을 정확하게 조작해 복막에 들러붙은 장을 떼어 냈다. 소장과 대장이 제자리를 찾아가자 예전에 수술했던 자리가 드러났다.
‘유착까지 발생했네. 애초 원인이었던 끈 같은 구조물이 생기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인데 하필이면 이런 체질까지 타고났을까?’
지지리도 운이 없는 환자였다.
세심하게 유착된 장을 하나하나 분리했다. 복막의 손상은 대수롭지 않은 부분이었지만 장 손상은 차원이 다른 문제기에 조심하는 것 이외에 정답은 없었다.
서서히 예전에 수술했던 부위에 접근했다.
명색이 퍼스트일 뿐 두 손 모두 놀고 있는 모찬우가 감탄을 터트렸다. 자주 접하는 이경석이나 나종진의 수술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야! 똑같은 기구로 특별할 것도 없는 수술인데 이렇게 달라 보여도 되는 거야? 정말 수월하게 하시지만 선생님들 특성이 다 다르다는 게 이제야 보이네. 배워야 할 부분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겠지?’
펠로우는 선택일 뿐이었다.
대학에 남아 교수가 되는 유일한 길이지만 다른 길이 많았고, 육체적으로도 굉장히 힘든 위치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옳은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간 이식부터 복강경까지 사 년의 전공의 시절과는 확연히 다른 시각으로 배울 수 있었다. 결과를 떠나 실력 있는 써전이 되는 지름길임이 분명했다. 물론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뒤처진다는 말은 아니었다.
모찬우의 집중력이 높아졌다.
김지훈의 긴장도 줄어들지 않았다.
드디어 병변 부위를 확인했다.
아무 문제도 없길 바랐지만 끈처럼 만들어진 구조물이 소장 일부를 살짝 조이고 있었다. 복통을 유발한 원인이라고 100퍼센트 단언할 수 없었지만 장 유착이 동반돼 증상을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김지훈이 고민에 잠겼다.
‘재발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일까?’
극히 드문 원인을 가진 데다 체질적으로 다른 사람에 비해 복강 내 흉이 더 심하게 생기는 환자였다.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재발의 위험만 높일 것이다.
“모찬우 선생, 끈 구조 제거한 후 유착이나 흉을 유발할 부분만 깨끗하게 정리하고 끝내자.”
수술 목표를 정했다.
김지훈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깔끔하게 제거한 후 수술을 끝냈다. 수술 중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지만 개운한 수술이 아니었다.
비교도 되지 않는 수술이지만 악성 질환을 수술하고 난 후의 기분과 비슷했다. 밖으로 드러나는 상처가 새로 생기지 않았듯 배 속도 마찬가지이길 바랄 뿐이었다.
‘만족스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그러네. 하긴 수술만으로 모든 치료가 끝나는 질환이 몇 개나 될까?’
“끄응!”
진상미 환자가 신음을 흘렸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끝나 한 시간이 약간 더 걸린 상황이기에 회복에 어떤 문제도 없었다. 눈을 뜨고, 말을 알아듣길 기다린 김지훈이 부드럽게 말했다.
“수술 잘 끝났습니다.”
“고마워요.”
이로써 한 주의 수술이 모두 시행됐다.
남은 일은 이사회에 참석해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뿐이었다. 예측과 다른 행동을 보였을 때 진상건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했다.
‘높은 데서 떨어질수록 더 아프다지? 눈물 콧물 다 흘리도록 뒤통수 제대로 때렸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집담회를 또 빠져야 되네.’
불길에 휩싸이던 입장에서 불을 토해 내는 사람으로 입장이 바뀌었는데 도리어 참석할 기회가 줄어들고 있었다. 김지훈도 사람인지라 약간의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펠로우나 고경철에겐 운이라면 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