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80화 (1,180/1,329)

6화

김지훈의 시선이 유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위암은 전이 때문이라도 위와 십이지장 연결부인 유문까지 모두 제거해야 하지만 췌장암에서도 반드시 그래야 하는 걸까?’

췌장암이나 담도암에서 시행하는 휘플이 뇌리를 스쳤다. 전통적인 방식은 위 하부와 십이지장을 모두 제거하고 소장과 연결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십이지장을 살리지 못하는 탓이지만, 직접적인 전이가 아니라면 암이 퍼질 장기가 아닌데도 말이다.

‘기능적인 면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유문(Pylorus)은 일종의 관문이다.

식도와 위의 경계처럼 일종의 괄약근이 존재해 내용물의 역류를 막는다. 어떤 이유로든 유문을 제거하면 특히 담즙 역류가 심해져 심각한 위염까지 초래하게 된다. 수술 후 상당수 환자가 기능성 장애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위액이 역류할 때의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하루 종일 지속된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유문을 보전할 시 기대되는 이득이 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복강경으로 휘플을 시행할 경우 수술의 어려움까지 상당 부분 덜 수 있었다.

밑이 뻥 뚫린 큰 상자에 가느다란 파이프를 연결한 후 전체를 단단히 막아야 하는 과정과, 직경이 거의 비슷한 파이프와 파이프를 연결하는 일 중 어느 쪽이 수월할지는 자명했다.

‘유문을 보존하면 한결 수월해지겠지만, 십이지장 상부와 소장을 연결해야 하는데 그에 따른 위험성은 얼마나 될까? 어차피 담즙과 췌장액이 나오는 통로가 있는 십이지장 중간부를 제거하기 때문에 괜찮을까?’

복잡한 문제였다.

정답처럼 오랫동안 사용해 온 방식과 틀을 벗어나는 일이 쉬울 리도 없었다. 더구나 누누이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사람의 몸이었다.

신현수의 조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위암이 아닌 양성 질환에서 위 절제를 시행해야 한다면 시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잠깐의 상념이었다.

반면 복강경을 이용한 휘플을 주저하게 만드는 수많은 요인들 중 하나의 돌파구를 찾았는지도 몰랐다. 역시 중요하지 않은 수술이 없었고, 모든 수술이 서로 관련됐다는 말 틀리지 않았다.

“선생님, 왜 그러십니까? 제가 보기엔 별문제 없는데 잘못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야. 위암이 아니라면 유문을 살릴 수 없을까 생각해 봤어. 자세한 얘기는 수술 끝나고 하자. 장 겸자!”

따르륵! 따가각!

유문을 포함해 위 하부를 잘랐다.

암 덩어리가 잠식한 위를 제거했다.

뻥 뚫린 십이지장을 막은 후, 위 절단면과 소장을 연결했다. 기본적으로 많은 횟수의 봉합이 필요한 데다 이중으로 강화해야 하기 때문에 적잖은 시간이 소요됐다.

애초 자신의 수술이 아닌 탓에 끝까지 긴장을 감추지 못한 덕인지 깔끔하게 잘 끝났다. 김지훈의 눈에도 만족스럽게 보였다.

“송진우 선생, 마무리해도 되겠지?”

“예.”

끝까지 기구 들고 있으면 펠로우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상대적이지만 고경철도 경험 풍부한 이 년 차인 이상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드레인 넣고 끝내자.”

뒤로 물러난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라파로에 사용하는 문합용 스테플러가 있다고 해도 여러 부분에서 봉합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모두 라파로용 기구로 해야 한다면 어떤 써전도 실수를 피하기 어렵다. 유문을 보존할 수 있다면 실패할 확률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뜻하지 않은 소득이었다.

신현수, 서도훈을 비롯해 관련이 있는 모든 써전의 의견을 구해야 할 때였다. 문득 복강경을 이용한 휘플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현수야, 고맙다.’

마무리까지 끝났다.

환자가 회복되길 기다리며 피로를 씻던 김지훈에겐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진상미가 다시 복통을 호소한다는 연락에 곧바로 일어나야 했다.

진상미를 살핀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반복되는 진찰을 통해 애매모호했던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의사로서 반가운 일이었지만 환자에겐 불행한 일이었다.

하기에 더욱 신중해야 했다.

“내일까지 경과 지켜보죠.”

시간이 꽤 지났다.

오후 회진을 돌았다.

거의 끝날 무렵 신현수가 보였다.

“내 환자 때문에 늦었구나. 미안해.”

“아니야. 안 그래도 도움 많이 됐고, 꼭 너하고 상의할 일까지 생겼어. 이번 주는 이사회 대비로 정신없을 테니까, 다음 주쯤 자리 한번 만들자.”

“간단한 일이면 오늘 말해. 어차피 민 부원장과 함께 얘기할 게 있어. 원장님들 만났는데 네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이 자꾸 꼬이네.’

즉시 민정호를 찾았다.

물론 예기치 못한 일이기에 고경아의 허락과 양해는 필수 조건이었다. 하해와 같은 마님의 마음 덕에 김지훈이 마음 편히 자리를 가졌다.

내용은 무척 불편했다.

“서울 병원과 천안 병원 모두 확장이나 이전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재정 문제는 어차피 피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우선순위도 각자 자신들의 입장만 내세울 뿐이었어. 감정적인 골까지 작용하는 것 같아.”

원장단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서울 병원은 대표 병원이라는 위상을 지키고 싶어 했고, 더 많은 수익을 내는 병원에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는 천안 병원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

또한 어느 병원이나 마찬가지지만 병원 간 서열을 두고 자존심 싸움을 하기 마련이었다. 이런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첨예한 대립을 유발한 것이다.

“전부가 아니면 다 같이 빈손인 것이 낫다는 말이네. 대학 병원이라고 해서 부도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데, 망해도 자신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솔직히 많은 의사들이 불안해하겠지만 정작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거야. 다른 직업에 비해 이직이 훨씬 쉬운데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고 생각하겠어? 이름이 알려진 의사면 더 좋은 조건으로 병원을 옮길 수도 있고 말이야.”

최악의 경우 개업을 해도 되는 직업의 특수성 때문에 개별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했다. 그렇다고 직장에 대한 책임과 애정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으로 이해는 되지만 아쉽다. 민 부원장님, 이렇게 되면 이사회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재정 문제를 강조해 결국 모든 병원이 피해를 입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서정호 형님이 마지막 희망이지만 제때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민정호의 어깨가 처져 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지만 내부의 동의조차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낙담한 것처럼 보였다. 사실 외부의 힘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만큼 무기력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민 부원장마저 이러면 안 되는데.’

김지훈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실망하긴 일러요. 절대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서정호 형님이 정식으로 조사를 한다고 해도 그 전에 일이 추진된다면 막대한 손실을 피할 수 없잖아요. 진상건이 대가를 치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든 병원을 지켜야 합니다.”

“김 과장, 일단 재정이 투여되기 시작하면 되돌린다고 해도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시기가 문제라는 것도 잘 알아. 하지만 우리 힘으로 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서정호 형님이 약속한 시간과의 차이는 일주일이야. 단 한 번만 연기시키면 끝장을 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어떻게?”

“찾아야지. 국회도 필리버스터라는 방식을 통해 반대하는 안건의 통과를 저지하잖아. 우리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어떻게든 일주일만 시간을 벌면 돼.”

가능할까?

민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진상건 이사장이 죗값을 치르는 것과 병원을 지키는 일은 별개일 수도 있습니다. 감옥에 간다고 해서 이미 지출된 돈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니까요.”

김지훈과 신현수가 귀를 활짝 열었다.

“김 과장님, 송재덕 선생님, 김진호 선생님과 함께 이사회에 참석해 이번 안건의 위험성과 무모함을 확실하게 주장하셔야 합니다.”

“신 교수가 나서야 효과가 더 크지 않겠습니까?”

“진상건 이사장과 적대 관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감정적인 대응이란 생각을 하게 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겁니다.”

“각 병원 원장님과 부원장님만 참석하게 돼 있습니다. 운영이사라고 해도 전문 병원 자체 직함인데 진상건이나 이사들이 인정할까요?”

민정호가 신현수를 보았다.

“이 문제는 신 교수님이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원장님과 부원장님께 일일이 보고를 드렸지만, 김 과장님만큼 현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분이 없지 않습니까?”

“기본적인 규칙을 어기면 우리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울 겁니다. 한 명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봐야죠. 알겠습니다. 김 과장과 함께 해결하겠습니다.”

김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점 일이 늘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미적거리거나 뒤로 뺄 상황이 아니었다. 주어진 역할이 있다면 모든 것을 걸고 실행해야 마땅했다.

신현수가 눈가를 굳혔다.

“사흘 남았습니다.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합시다. 민 부원장님, 결과를 떠나 고맙습니다.”

“계약…….”

“그 말은 더 이상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만에 하나 병원을 떠나 다른 일을 하더라도 내게는 영원한 친구이자 동료입니다. 감사합니다.”

전문 병원의 식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기에 별말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민정호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었다.

김지훈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민 부원장님, 다음 주에 단둘이 술 한잔합시다. 신 교수도 부르지 말고 딱 단둘이.”

“개인적인…….”

“더 이상 그런 말을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잖아요? 날 아직 친구이자 동료로 생각하지 않으면 이번 기회에 만들어 갑시다.”

민정호가 입을 열지 않았다.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해 속마음이 어떤지 모르지만 딱 잘라 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쩌면 친구라는 말 때문일지도 몰랐다.

신현수가 딱딱 손뼉을 쳤다.

“자! 지금은 쉴 틈이 없어요. 움직입시다.”

김진호 교수를 찾았다.

다행히 퇴근 전이었다.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했다.

“이사회 참석은 두 명만 가능한데 김 과장이 꼭 있어야 한단 말이지? 흠! 원장님이 빠질 수도 없으니까 결론 나왔네. 위임장 써 줄 테니까 김 과장이 내 대신 참석해.”

“죄송합니다.”

“지금도 이 자리는 이준영 선생님 자리야. 제자가 스승을 대신하는데 뭐가 미안해? 대충 알고 참석했다가 일 망칠까 봐 불안했는데 잘됐다.”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주변에 좋은 분들만 있는데 왜 이런 일로 다들 고민을 해야 할까? 진상건, 당신이 이사장인 이상 그러면 안 돼. 직원들을 배신해서 얻을 게 뭐가 있어?’

정중히 인사하고 나온 김지훈과 신현수의 표정이 복잡하면서도 미묘했다. 별다른 걱정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지 몰랐다.

“세상 참 어렵네.”

그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진상미가 또 복통을 호소했다.

‘퇴근 전이라 다행이네.’

신현수도 퇴근이 늦었지만 보아야 할 환자가 있는 데다 겸사겸사 할 말이 남았다며 스테이션에서 기다렸다.

김지훈이 즉시 병실을 찾아 진찰했다.

점점 예전 질환이 재발했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복통의 빈도도 예상외로 잦았고, 진상미의 불안이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더 이상 지켜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결정을 내렸다.

“환자분, 아무래도 복강경으로 배 속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예전 양상과 동일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네요.”

“확신하시나요?”

“그때 어떤 답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똑같은 대답을 했을 겁니다. 진단 및 치료를 위한 복강경 수술이 유일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진상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입원할 때 이미 각오했다고 해도 막상 전신 마취하에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울 것이다. 더구나 김지훈조차 정확한 진단명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장 믿는 의사의 결정이었다.

“결정에 따를게요.”

언제 하는 것이 좋을까?

어렵고 복잡한 수술이라면 정식으로 날짜를 잡는 것이 원칙이었다. 반면 예전과 동일한 원인이라면 어이없을 정도로 빨리 끝날 것이다. 장을 조이는 끈 하나 끊으면 될 테니 말이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한두 시간 내에 끝날 수술이다. 다른 환자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아닌데 굳이 뒤로 미룰 이유가 없겠지. 불안한 상태가 지속돼서 좋을 일이 없고, 솔직히 원인이 너무 궁금하네.’

“내일 하루 더 지켜보고 변동이 없다면 금요일에 수술하겠습니다. 수술이 밀려 오후 늦게 할 수밖에 없다는 점 양해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절대 특혜가 아니었다.

진상건과 관련됐다는 사실은 철저히 배제했고, 설령 찜찜하다 해도 응급 수술을 한다고 생각하면 되는 일이었다. 만일 상당한 수술 시간이 예상되고, 반드시 정규 수술로 잡아야 할 정도의 질환이었다면 단호하게 원칙을 따랐을 것이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결정을 내리고 나니 후련했지만 한편으로 성급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마침 조언을 주고도 남을 신현수가 있어 다행이었다.

막 진상미에 대해 말하려던 참이었다.

병실에 있어야 할 진상미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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