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김지훈이 은근한 기대를 가졌다.
‘진상미 씨라도 며칠 사이에 새로운 정보를 얻기에는 너무 빠르겠지? 어후! 이런 생각 하다간 실수한다. 아무리 특수한 경우라도 환자와 병원 일을 결부시키면 안 되지.’
본연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검사는 받아 보셨죠?”
“혹시 재발했을까 봐 걱정이 돼서 다른 병원에서 초음파하고 CT를 찍었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나왔어요.”
“현재 느끼는 증상은요?”
“처방받은 약을 꾸준히 먹었지만 예전에 아팠던 부분의 통증이 사라지지 않아요. 전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은데 정확하게 어느 부분이 어떻게 아픈지 설명하기 힘드네요. 끈 같은 것이 또 생긴 걸까요?”
“배제할 수 없습니다. 복강경을 한 경우에도 아주 드물지만 장 유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잘 모른다는 거네요.”
“검사가 만능은 아니니까요. CT는 추가로 검사할 필요가 없고, 초음파만 다시 해 보겠습니다. 일단 제가 먼저 한 후 방사선과에서 다시 검사할 겁니다.”
진상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병명을 찾지 못해 온갖 검사를 받았었다. 일반외과 의사인 김지훈이 초음파를 한다는 사실도 이상했지만 하루에 두 번을 한다는 것 역시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웃었다.
“불편하시겠지만 집도를 한 사람이 정확하게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용은 한 번 한 것으로 치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아 참! 갑자기 입원한 상황인데 직장과는 얘기 잘된 거죠?”
“휴가를 당겨 받았어요.”
“다행이네요.”
의사에겐 사소한 일이지만 환자에겐 무척 중요한 일일 수 있었다. 실제 많은 직장인들이 근무 여건 때문에 진료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초음파실로 향하던 진상미가 미소를 머금었다.
‘오길 잘했어.’
반면 김지훈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특별한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초음파를 하며 압박을 가하면 병변 부위에서 통증을 느끼기 마련이었지만 그런 징후마저 보이지 않았다.
방사선과 교수도 같은 소견이었다.
한마디로 막막한 상황이었다.
“역시 특별한 이상을 찾을 수가 없네요.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많이 불편하세요?”
“그런 건 아닌데 불안해요. 이러다 갑자기 나빠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혹시 나쁜 병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돼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다른 환자였다면 상세히 설명한 후 지켜보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면 끝이었다. 하지만 진상미는 원인 모를 통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던 환자였다. 김지훈의 제안대로 진단적 복강경을 시행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고통받았을지 알 수 없었다.
“지장이 있다는 말이네요. 이번 역시 방법을 찾는다면 복강경으로 직접 배 속을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만, 의사로서 권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다시 하면 위험한가요?”
“마취와 수술의 위험성은 다른 환자와 똑같지만 쉽게 선택할 방법이 아닙니다. 환자분에게 정말 필요한지 판단하기 어렵네요.”
“선생님이 모르시면 어떻게 해요?”
“그러게 말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진상미 씨처럼 진단이 애매모호하고, 특수한 과거력이 있는 환자는 피하고 싶어요. 의사의 한계가 너무 절실하게 느껴지거든요.”
진상미가 입술을 모았다.
“제가 그렇게 어려운 환자인가요?”
“어렵죠. 제 입장에서는 진단을 위해 전신 마취를 한다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입니다. 만일 이번에 진단적 복강경을 하게 된다면 두 번째 경험입니다. 그것도 모두 환자분의 경우입니다. 얼마나 드문 일인지 아시겠죠?”
“듣고 보니 저도 답답하네요. 그래도 선생님밖에 믿을 분이 없어요.”
“수요일과 금요일이 제가 수술하는 날입니다. 증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지켜볼 겸 늦어도 목요일까지는 결정을 내릴 테니 진상미 씨도 충분히 생각해 보세요. 수술을 했던 의사가 이런 말씀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의사로서 무척 미안하고,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환자가 느끼는 두려움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기에 지금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김지훈이 병실을 나가며 눈가를 문질렀다.
‘에휴! 미안해 죽겠네.’
기본적인 책임도 지지 못한 상황인 탓에 진상건과 관련된 일은 싹 잊었다. 설령 도움이 되는 정보가 또 있다고 해도 의사와 환자로 마주한 이상 아예 말도 꺼내지 않는 것이 지당했다.
먼저 말해 주면 감사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는 줄 알았다.
그날 밤!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막 잠이 들었을 때였다.
(나종진입니다. 진상미 환자가 복통을 호소하는데 진통제나 진경제를 투여해도 되는지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특별한 오더가 없는 한 통상 당직의가 해결하지만 다들 어떤 과거력을 가진 환자인지 알고 있었다.
“복통이 심해?”
(지켜봐도 충분한 상황이지만 진단 자체가 애매모호한 데다 예전에 같은 증상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던 환자라고 들었습니다.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지훈이 잠깐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이불 속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종진의 판단이라면 믿어도 좋았고, 예민해졌을 진상미를 충분히 안정시킬 수 있는 의사였다. 하지만 진단을 내리지 못한 이상 직접 보는 것이 마땅했다.
‘후우! 지금 봐야 어떤 결정을 내려도 환자가 동의할 수 있다. 날 믿고 왔는데 아픈 정도를 떠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절대 안 돼.’
병원으로 향했다.
1박 2일 동안 신나게 논 탓인지, 간 이식 수술을 한 다음 날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제법 피로가 쌓여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머! 선생님!”
진상미 환자가 무척 놀랐다.
과장까지 된 김지훈이 직접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한마디 말과 눈빛 사이로 흐르는 고마움과 신뢰를 느끼는 순간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만 남았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세요?”
신중하게 진찰했다.
나종진도 진지한 얼굴로 곁을 지켰다.
“정말 애매모호하네요. 나종진 선생, 어떻게 판단해?”
“단순 장염일 가능성이 제일 큽니다만, 끈 같은 구조가 다시 생겼거나 수술 후 유착이어도 일부분만 막힌 양상이라면 이런 양상으로 통증을 호소할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진단 폭이 너무 넓다.”
“사실 과거력이 아니었으면 입원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어떻게 할까요?”
차트를 확실하게 읽은 모양이었다.
“일단 진경제부터 투여해 보자. 환자분, 대략이나마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주사 하나를 놔 드릴 겁니다. 통증이 사라지는지 지켜보죠.”
정확한 결과를 알려면 병원에 있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연구실에 있기 뭐해 스테이션 의자에 잠시 몸을 맡겼다.
한밤임에도 간호사들은 쉬지 못했다.
김지훈 때문인지 필요한 조치를 취한 나종진도 스테이션을 떠나지 않았다.
“나종진 선생, 들어가 쉬어.”
“아닙니다.”
“당직이잖아? 언제 수술 뜰지 모르고, 내일 일하려면 시간 날 때 자 둬. 내 눈치 보지 마. 펠로우 삼 년 차인데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이경석 선생님이 당직이시라 괜찮습니다. 환자 반응이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저 환자 수술은 어떻게 하게 되셨어요? 손일석 선생님께 들으니까 이혁민 선생님도 꽤 고민하셨다면서요?”
“운이 좋았어.”
두런두런 옛이야기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환자에게만 집중했던 시절, 하나하나 배워 가며 가슴 벅찬 성취감을 느꼈던 시절이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왔다.
“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없는 것 같다.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인데 어떤 때는 참 그리워. 물론 다시 하라고 하면 죽어도 못하겠지?”
“당연하죠. 그래도 희망이 있어서 하루하루 버티는 거 아니겠습니까?”
‘교수! 내 진짜 희망은 무엇일까? 최고의 수술 팀과 함께 최고의 써전이 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일까?’
불현듯 애매모호한 진상미의 병명만큼 알쏭달쏭해졌다. 가족의 미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희연이의 장래, 병원의 앞날까지 바라는 것이 너무 많았다.
무엇 하나 놓칠 수 없었다.
상념이 이어지는 순간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한 시간 정도 경과됐으니 주사 효과가 나올 때가 됐다. 만류해도 따라오는 나종진과 함께 병실로 향했다.
증상의 변화가 없었다.
‘확실히 뭔가 있긴 하네.’
“선생님, 통증이 그대로인데 장 병변을 배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초음파나 CT에는 문제가 없어.”
“먹는 약과 주사제의 효과가 없는데 증상이 지속된다면 오히려 장 쪽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의미일까요?”
반복해 진찰을 한 김지훈이 입을 열지 못했다. 약한 복통 하나가 이렇게 골치 아플 수도 있다는 사실만 새삼 깨달았을 뿐이었다.
“환자분, 아침에 다시 보죠. 무턱대고 복강경을 하는 것만큼 나쁜 선택도 없습니다. 배가 아플 때마다 확인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부탁드려요.”
김지훈이 병실을 나갔다.
새벽 세 시가 넘었다.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네.’
진상미의 표정이 묘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진상미 환자를 첫 번째로 진찰한 김지훈이 나종진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나종진 선생, 오늘 수술 많아? 오전에 내 수술 끝내고 오후에 신 교수 위암 수술을 해야 돼서 시간이 없네. 혹시 수술 중에 복통을 호소하면 나종진 선생이 봐줬으면 좋겠는데, 가능하겠어?”
“수술 중만 아니면 직접 가 보겠습니다. 사실 저도 배 속에 뭐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부탁해. 고맙다.”
바쁜 일과가 시작됐다.
간 이식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중환자실은 항상 신경이 곤두서는 곳이었다. 하지만 진충기 교수 덕분에 갈수록 부담이 줄고 있었다.
오늘도 진충기 교수는 자신이 수술한 환자를 포함한 모든 환자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각 집도의들과 함께 치료에 필요한 부분을 철저하게 확인하고 있었다.
“서도진 선생, 환자 병실로 올릴 수 있겠어?”
“미열이 잡히질 않네요. 이삼 일 정도 더 중환자실에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케이! 병상 조정해 놓을 테니까 좋아지면 바로 연락해 줘. 강병옥 선생, 잠깐 나 좀 봐.”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는 일이 결코 달가울 리 없건만, 동작 하나 말 한마디에 힘이 넘쳤다. 의무나 책임만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즐기기에 가능할 것이다.
진충기 교수의 표정이 맞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도 진충기 선생님처럼 즐겁게 일하고 있나? 혹시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눈가에 힘을 주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고개를 휘휘 돌렸다. 행여 짜증을 냈는지 몰라도 동료들의 열정 덕분에 심기일전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오전 수술 내내 진상미는 복통을 호소하지 않았다. 딱 수술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병동에서 연락이 왔을 뿐이었다.
환자의 회복을 확인한 김지훈이 부리나케 병실로 가 진찰을 시행했다. 통증을 느끼는 부분이 동일하다는 소득을 얻었지만 반갑기보다 불안했다.
‘예전하고 거의 같은 증상이다. 정말 라파로로 진단을 하는 수밖에 없나? 신중해야 돼.’
편한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환자에게 진단을 위한 복강경을 할지 말지 선택하게 하면 간단했다. 그러나 이미 경험이 있는 진상미가 충분히 이해한다고 해도, 끝까지 고민해 최선의 방법을 도출해 내는 것이 의사의 책임이었다.
“조금 더 지켜보겠습니다.”
“선생님 결정에 따를게요.”
병실에서 나와서도 고민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김지훈이 배를 문지르며 입맛을 다셨다.
오늘도 점심을 못 먹었다.
곧바로 오후 수술을 시작해야 했다.
환자 앞에 선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간만에 하는 위암 수술인 데다 원칙적으로 자신의 수술이 아니기에 상당한 부담을 느꼈다. 신현수 말대로 보호자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일단 수술 잘 끝내고, 별문제 없이 퇴원했을 때 이야기였다.
위암 수술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김 과장이 하는 위암 수술 정말 오래간만에 보네. 신 교수와는 또 다른 느낌이야. 자! 준비 끝났습니다.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김진호 교수의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수술이 시작됐다. 그동안 스케줄이 맞지 않아 오래간만에 김지훈과 수술을 하게 된 송진우와 고경철이 잔뜩 기대 섞인 눈초리를 보였다.
손을 놀리지 않는 한 어떤 수술도 몸에 익은 감각을 잊지 않기 마련이었다. 마치 위암 수술을 꾸준히 해 온 것처럼 김지훈의 손은 빠르고도 정확했다.
어느새 위 상부를 잘랐고, 십이지장과 연결된 하부를 막 절제하기 직전이었다.
김지훈이 돌연 손을 멈췄다.
송진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진행을 하지 않으시지?’
아무도 수술을 멈춘 이유를 몰랐고, 어떤 문제도 없었기에 그럴 만한 상황 자체가 아니었다.
김지훈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