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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78화 (1,178/1,329)

4화

손일석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김 과장도 양반 되기는 틀렸네. 선생님, 안 그렇습니까?”

“김 과장, 앉아.”

“예. 무슨 얘기를 하던 중이셨습니까?”

이준영 교수가 힐끗 강은미를 보았다.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눈빛이었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마다 똑똑히 본 눈빛이기도 했다. 바로 고경아를 볼 때 보이던 얼굴과 감정이었다.

“강은미 선생을 딸 삼기로 했다.”

“딸이요?”

순간 무슨 말인지 몰라 강은미를 보던 김지훈이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이혁원은 머리를 긁적였고, 이준영 교수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혁원, 강은미 선생, 약속한 거야?”

“예, 선생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축하한다. 장가 못 가는 줄 알고 걱정 많이 했는데 드디어 가는구나. 강은미 선생, 노총각 구제해 줘서 고맙다.”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정말 아끼던 친동생이 결혼을 하는 것처럼 기뻐했다. 며느리가 아닌 딸이라 불러 부드러워질 대로 부드러워진 분위기가 더욱 좋아졌다.

‘야! 딸이라! 스승님께서 강은미 선생을 정말 좋아하시는구나. 그래도 그렇지, 커피에 과자까지 내오시고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김 과장, 이참에 서열 정리 한번 하자. 혁원이 눈에 선생님 다음이 나로 보이나 봐. 자식! 실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니 눈치 많이 빨라졌어. 하긴 그래야 이 험한 강호를 훌륭하게 헤쳐 나갈 수 있겠지.”

“어쩌다 벌어진 일 갖고 확대 해석하지 마라. 혁원이는 영원한 내 동생이야. 강은미 선생도 아마 날 더 좋아할걸? 평생 하오문인지 뭔지를 외치면서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르면 어떻게 해?”

농담 마다할 때가 아니었다.

김지훈이 답답한 일 모두 잊고 맞장구를 쳤다.

“어라? 이게 무슨 망발이야? 이혁원, 강은미, 솔직하게 말해. 누가 더 존경스럽고, 더 좋아? 말 잘하자.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

“선생님, 애들처럼 왜 이러세요?”

“애들? 김 과장 오니까 안면 싹 바꾸네. 이거 생각 달리해야겠어. 강호의 도의가 아니다. 신혼 때 일주일 내내 집에 못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체험 활동 한번 해 보실까? 죽음이지. 죽음. 강은미 선생의 선처만 바라야 할 거야.”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손일석 특유의 말에 이혁원이 어쩔 줄을 몰랐다.

“손일석 선생님, 시대가 많이 변한 거 아시죠? 정말 그러셨다간 선처를 받아야 할 사람이 따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후! 무섭다. 무서워.”

강은미가 당차게 대꾸하자, 이준영 교수는 은근슬쩍 강은미에게만 미소를 보이며 지켜보았다.

김지훈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세상 빡빡하고 힘든 일만 있는 건 아니네. 즐거운 일을 함께 나누면 행복이 배가 된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아. 강호 소리 해 대는 걸 보고만 계시고, 스승님도 많이 변하셨네.’

과자가 하나둘 사라졌다.

남녀를 불문하고 엄격한 의대 선후배란 사실도 잊고 티격태격 웃음이 끊이지 않는 모습을 즐기던 이준영 교수가 시계를 보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김지훈은 할 말이 있었다는 눈치였다.

“김 과장, 할 말이 있어서 온 거 아니야?”

병원 상황을 말할 시간이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분위기 깨 가며 재단 이사회 소식을 전하고, 상의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이혁원과 강은미까지 알아서 좋을 일이 아니었다.

“그냥 들렀습니다. 손 교수 때문에 인사가 늦었네요.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사모님께 인사 겸 안부 전해 주십시오.”

“고맙다. 다들 회진 돌고 퇴근해. 이혁원, 넌 너무 들떠서 실수하면 안 돼.”

무뚝뚝했다.

“강은미 선생, 상의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 부모님께 미흡한 아들 받고, 귀한 딸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대신 전해 줘.”

살랑살랑 따스한 바람이 불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서로를 보았다.

‘차별이야. 차별.’

이혁원은 오죽할까?

아니다.

사랑에 눈이 멀었으니 강은미를 대하는 아버지 모습에 좋아 죽을 것이다. 어쩌면 이준영 교수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마지막으로 연구실을 나왔다.

“가 보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십시오.”

“김 과장, 회진 끝나고 기다릴까?”

“아닙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하고 싶은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론 짐을 나누는 것보다 잠시라도 혼자 떠맡는 것이 더 좋을 때가 있는 법이었다.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맞는 휴식 시간을 즐겁게 보내길 바랐다.

‘현수도 내게 외부 일이 아닌 내부 일을 맡겼다. 지금 이 순간만은 내 일과 내 가족에게 충실하자.’

회진을 돌았다.

수술 전 큰 고민과 상당한 부담을 느끼게 했던 정유미 환자가 다른 환자와 똑같은 경과를 밟았다. 복강경으로 시행한 담낭 절제술에 있어서 혈관 기형은 결코 환자의 회복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아니었다.

“월요일에 퇴원하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집안 배경이 어떻든 결국 환자가 주는 기쁨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의사가 가난한 자와 부자인 자, 권력을 가진 자와 평범한 사람에 차이를 두면 안 되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놈은 예외로 둘 수밖에 없었다.

‘내 평생 그렇게 기분 나쁜 치료는 처음이었어. 그놈은 지금쯤 감방에 갇혀 있겠지? 형량은 얼마나 받았을까? 병원비는 다 냈나?’

민정호는 결코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소송을 포함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 받아 낼 것이다. 다른 사람 눈에서 피눈물 흘리게 만든 놈인 이상 반드시 그래야 했다. 무엇보다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사유로 감경을 받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자, 이제 주말을 즐기자.’

김지훈이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다.

***

펜션을 빌려 가는 여행이었다.

손일석이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나왔다.

돌도 안 된 아이와 여행을 가려면 각오해야 할 일이었다. 분유부터 기저귀에 갈아입을 옷까지 큰 가방 하나가 꽉 차기 마련이었다.

김지훈은 가볍게 짐을 실었다.

‘자식!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우리 희연이가 아주 효녀야. 효녀. 언제 다 키워?’

“출발합시다.”

“아빠, 나 이모 차 타고 갈래.”

“왜? 엄마, 아빠하고 같이 가야지.”

“정훈이하고 같이 갈 거야.”

좋은 말로 딸아이 이기기 쉽지 않다.

억지로 태웠다간 가는 내내 투정만 부릴 것이다.

김지훈이 입맛만 다셨다.

“알았어. 정훈이 잘 때 깨우면 안 돼.”

“이모!”

너무 즐겁게 손일석의 차를 탔다.

‘효녀 취소다. 취소.’

부르릉! 부르릉!

주말 나들이로 무척 혼잡한 영동 고속도로를 따라 달렸다. 희연이가 없는 틈을 타 김지훈과 고경아가 마치 연애 때처럼 손을 꼭 잡았다.

‘이건 좋네.’

여행 별거 아니다.

거창하든 소소하든, 생각이나 기대에 따라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이 통할 시대가 아니었다.

펜션의 이점을 누리자!

뭐니 뭐니 해도 별 보며 고기 구워 먹는 것이 최고다. 단, 날벌레만 보이면 호러 영화를 찍는 가족을 위해 모기향으로 철벽 방어망을 치고 시작해야 한다.

김지훈은 불 담당이었다.

번개탄 화력을 빌려 숯 잘 피웠다.

손일석이 소스를 꺼내 들었다.

“삼겹살인데 뭘 가져온 거야?”

“시중에서 파는 돼지갈비 양념 두 개에 소갈비 양념 하나 섞어 발라 구우면 별미라네. 양념 삼겹살 이거 괜찮대.”

홍천 고추장 삼겹살도 아니고, 다들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였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가져온 삼겹살을 성황리에 절찬 판매하고, 소주와 맥주까지 탈탈 털었다.

알딸딸한 술기운 속에 김지훈과 손일석이 나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희연이, 정훈이 얘기로 시작해서 병원과 진상건으로 끝냈다.

“도와줄 일 없어?”

“현수하고 민 부원장이 힘을 써야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

“괜히 미안해지네.”

“형님 두 분이 나섰으니까 잘될 거야.”

놀러 가서까지 일을 끌고 들어오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었다. 서둘러 가족들과 합류해 토요일 밤, 남은 시간을 즐겼다.

김지훈과 손일석의 여행 신조는 같았다.

먹는 게 남는 거다!

적당한 시간에 출발해 천서리 막국수 거리에 도착했다. 식당이 몰려 있어도 숨은 맛집이 있기 마련이지만 예외적인 곳이라 할 수 있었다.

가장 많은 사람이 최고로 꼽는 집에서 뜨거운 육수와 담백한 수육을 곁들인 막국수 한 그릇은 한 끼의 식사로 훌륭했다.

‘맛있네. 그러니까 사람이 바글바글하겠지? ‘ㅎ’으로 시작하는 집 꼭 기억해 두자.’

1박 2일이면 무릇 유명 관광지, 혹은 명승지 정도는 들러 주는 것이 예의였다. 천년 사찰 신륵사로 출발해 상고대 앞 강월헌에서 바라보는 남한강 풍경은 마음까지 시원하게 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입구에서 사찰까지 제법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어린아이 둘이면 한가할 것 같아도 체력적으로나 심적으로 소모하는 에너지가 만만치 않다. 더구나 이런 날 집에 가서 밥 먹으면 두고두고 아내들의 잔소리 들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메뉴였다.

이천 쌀밥 집이 당연한 선택이건만, 손일석이 뜻밖의 식당을 주장했다. 남이천 IC 근방의 외할머니 집이란 상호를 가진 식당이었다.

“이천 쌀밥은 워낙 유명해서 언제든 먹을 기회가 있지만 외할머니 집은 들르기 쉽지 않잖아. 결정적으로 환자가 추천해 준 식당인데 설마 맛이 없겠어? 음식값도 비슷하다니까 일단 날 믿고 가 보자고.”

“환자하고 별말을 다 하고 사는구나.”

“그만큼 라뽀가 강하다는 거지.”

이미 원 칼국수로 한 차례 공신력을 얻은 손일석의 제안이었다. 약간은 길을 돌아 도착한 외할머니 집 메뉴는 간단했다.

콩나물밥, 두부 요리, 도토리묵 등이 묶인 한 상 차림이었다. 네 명 기준 4만 원이 약간 넘는 수준이라 가격도 적당했고, 식구들 입맛에도 딱 맞았다.

일부러 찾아가기에 멀지만 근방에 갈 일이 있다면 한 끼 식사로는 정말 만족스러운 식당이었다. 벽에 걸린 연예인 사인이 장식만은 아니었다.

“잘 먹었어. 연속 안타를 때리네.”

“이 정도면 홈런 아니야?”

“구경 잘하고, 맛있는 밥 먹는 게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일인데 어제부터 오늘까지 다 따지면 홈런 맞다. 앞으로 가족 여행은 네가 전담해.”

“정보망 풀가동해서 제주도도 맛집 리스트 쫙 뽑아 놨는데 시간이 없네. 시간이.”

“제주도? 토요일 밤 비행기 타야 될 텐데 1박 2일로는 부족하지. 아! 우리는 언제나 마음 놓고 비행기 타 볼까?”

엄살만은 아니었다.

동료들이 아무리 믿음직해도 중환자실에 환자 한 명만 있으면 함부로 놀러 가지 못하는 의사가 일반외과 써전이었다. 간 이식을 하는 동안에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병원에서 전화 안 와 다행이야.”

“조마조마하긴 해.”

이래저래 쌓였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린 여행이었다. 생각해 보면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똑같을 테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든 이겨 내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진상건과 관련된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달복달 하루 종일 자신을 밀어붙여 해결될 일이었으면 벌써 발 뻗고 잤을 것이다. 쉴 때는 쉬되, 결정적인 때가 오면 무섭도록 집중해야 했다.

짧은 휴식이 끝났다.

고경아는 다음 주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가정, 직장, 강의까지 할 일이 태산이었지만 꿋꿋하게 주어진 일을 해내고 있었다. 김지훈에겐 고경아가 곧 힘이자 응원이었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일주일 후 있을 이사회에 각 병원 원장단이 모이는 이상 참석할 가능성이 높았다. 들러리에 불과할지라도 확장과 이전의 이면에 숨은 위험과 전횡을 알려야 했다.

‘파이팅!’

전의를 불태웠다.

결과를 떠나 할 말도 못해 보고 끌려 다니는 것만큼 무책임한 일이 없었다. 자신의 어깨에 수많은 동료들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각오로 임해야 했다.

‘아! 너무 잘 놀았나?’

일단 잠은 자자.

운명의 주가 밝았다.

일상은 변함없었지만 이사회 안건이 알려지면서 의견이 분분했다. 진상건의 야욕을 알고 있는 이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분노했지만, 적지 않은 직원들이 내막을 모른 채 환영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무작정 까발렸다간 역풍을 맞을 수도 있고, 지켜만 보자니 답답하고 진퇴양난이네.’

철저히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송재덕 교수, 김진호 교수와 민정호가 작성한 병원 재정 자료를 공유하며 머리를 싸맸다. 문득 야야야 소리가 떠올랐지만 감정에 호소할 안건이 아니었다.

‘현수하고 민 부원장이 잘해 줘야 할 텐데.’

그사이 진상미가 입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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