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생각해 보니 그럴듯하긴 했다.
“그렇죠? 인맥이라고 말하기 어렵긴 하지만 도움을 많이 받는 걸 보면 나도 희한하긴 합니다.”
“과장님은 앞으로 환자에게만 신경 써 주십시오. 진상미 씨와 국회의원에 이어 어떤 인연을 또 만들지 누가 알겠습니까? 할 일만 하면 된다니 부럽습니다.”
결과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많은 의사들이 똑같은 열정을 갖고 똑같은 일을 하는데 운이 대단히 좋다는 말 이외에 설명할 길도 없었다. 국회의원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인연으로만 여기는 덕인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시계를 보며 서둘렀다.
“어휴! 늦었네요. 회진 올라가야겠습니다.”
“일 보시죠. 그럼 이만!”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내가 먼저 나갈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깝네. 저렇게 폼 나게 일어나는 모습도 상당히 괜찮아 보여. 난 언제나 민 부원장에게 그럼 이만이라는 소리를 할 수 있을까?’
별게 다 아까운 김지훈이었다.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서정호와 정훈철을 굳게 믿고 있었지만 진상미로 인해 새로운 활력을 얻은 덕분이었다. 진상건은 자신도 아비처럼 집안사람으로 인해 몰락을 재촉할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회진을 마친 김지훈이 톡톡 머리를 쳤다.
무사히 깨어나 가벼운 통증만을 호소하며 자신을 반겨 준 정유미와 정덕순 의원을 보는 순간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상미 씨가 온 이유 중 하나는 복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내가 집중해야 할 일은 상신개발이 아니라 진상미 씨가 겪는 복통의 원인을 찾는 것이다.’
더욱이 환자가 호소하는 고통의 미묘한 차이를 무시해서 좋을 일이 없었다. 대부분 의사의 판단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가끔은 환자의 표현 속에 진단과 치료의 결정적인 실마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원인이 될 만한 질환을 생각했다.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단순 장염일까? 라파로로 수술했다고 흉이 안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장 유착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지. 장을 옥죄는 끈이 또 생겼든, 유착이든 수술은 피했으면 좋겠다.’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 몸에 칼 대서 좋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진상미가 고통받은 원인이 워낙 특수했던 경우라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적절한 시기를 놓치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머릿속에 담아 두어야 할 일이었지만 다음 주 일이었다. 당장은 수술이 예정된 환자들에게 집중하는 것이 마땅했다. 해도 해도 어려운 간 이식 수술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야 좋은 일이 이어질 것이다.
***
주말이다.
간만에 가족 나들이가 잡혔다.
손일석 부부도 함께할 것이다.
복잡한 일 모두 잊고 신나게 휴일을 즐겨 지난 일주일의 피로를 씻을 때였다. 물론 주말 집담회라는 커다란 산을 넘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제는 답하는 입장이 아니라 질문을 하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한 주 동안 시행된 수술을 살피며 특히 정유미 환자 케이스에 신경 썼다.
‘혈관 기형에 대한 대처가 쟁점이 될 거야. 어떤 질문을 해야 핵심을 짚을 수 있을까?’
점점 생각이 깊어지는 순간 신현수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아 진상미와 상신개발 때문일 것이라 미루어 짐작했다.
“얼굴이 왜 그래? 상신개발 건이라면 좋은 일이잖아. 혹시 민 부원장에게 못 들었어?”
“들었어. 문제는 그게 아니야. 다음 주 주말에 재단 이사회를 연다는 연락을 받았어.”
“일주일밖에 안 남았네? 안건이 뭔데?”
“준비를 거의 다 끝냈는지 서울 병원 확장과 천안 병원 이전을 안건으로 올렸어. 이런 사안은 몇 차례에 걸쳐 논의하고 결정하는 것이 원칙인데, 분위기를 보니까 단번에 밀어붙일 것 같아.”
발등에 불 떨어졌다.
서정호의 조사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진상미로 인해 시간을 단축한다고 해도, 남은 일주일 안에 직접적인 수사에 나서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연기할 방법이 없을까?”
“현재로서는 없어.”
“그럼 안건 통과를 막지 못한다는 거네. 근데 이렇게 중요한 일을 병원 관계자들과 논의도 안 하고 이사들만 모여 결정할 수 있는 거야?”
“당연히 논의하겠지만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할 수도 있어. 진상건은 물론 이사들이 반박하지 못할 이유를 들이대야 연기시킬 가능성이 있겠지.”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애초 논리와 논리의 대결이었다면 걱정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사실 공간이 부족한 서울 병원의 확장과 낡아 가는 천안 병원의 이전 및 신축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검은 속은 차치하고 진상건의 계획이 충분할 정도로 현실적이고, 재정에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면 깨끗이 승복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그놈의 명분에 지면 병원이 망하게 생겼는데 명분이 아무리 좋으면 뭐 해?’
“우리가 독립채산제이긴 하지만 같은 재단 산하 병원으로서 재정 문제를 적극 거론하는 수밖에 없잖아? 최소 원장단은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도 의사지만 의사를 너무 믿지 마. 펠로우 건과는 차원이 달라. 이해득실을 따지는 데는 예외가 없어. 자신의 재임 기간 중에 확장이나 이전이 결정된다면 그게 바로 업적이나 공로가 돼. 더욱이 진상건에게 잘 보이면 연임에 도움이 될 테고, 은퇴 후에도 상당 기간 명예직 자리까지 유지할 수 있어.”
“후우! 빤히 보이는 일이지만 잘못 거론했다가는 역효과만 단단히 날 텐데 난감하네. 현수야, 통과를 막지 못해도 실무적인 일을 진행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잖아? 그때까지는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진상건이 틈을 보일 리가 없지. 절대 되돌릴 수 없도록 빠르게 움직일 거야. 아무리 비관적이어도 손 놓고 당할 수는 없지. 당장 대책 회의를 하자.”
“지금?”
“그럼 언제 해?”
“주말 집담회는 어쩌고?”
“펠로우 선생들은 우리가 빠지길 더 바랄지도 모르고, 과장님 아니어도 잘 돌아갑니다. 민 부원장실로 와.”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신현수의 말이 맞을지 모르지만 외과의 전통이자 이론 실력을 배양시킬 수 있는 무척 중요한 기회라고 할 수 있는 주말 집담회였다.
‘이렇게 한두 번 빠지다 보면 습관이 될 수도 있는데 큰일이네. 언제나 마음 편히 살까? 진상건만 해결하면 되겠지? 반드시 그래야 돼. 반드시.’
김지훈, 신현수, 민정호가 모였다.
주말 집담회가 서서히 달아오를 때쯤이었다.
민정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물리적으로 저지할 방법은 없습니다. 가능하다고 해도 빌미만 줄 뿐입니다.”
“재정 부실 문제가 먹힐까요?”
“지금껏 재단의 투자 사례를 검토한 결과 반반입니다. 사소한 투자를 빼면 단 한 번도 전액 자체 자금으로 시행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전체 투자 중 채무가 50퍼센트를 넘은 적도 있더군요.”
신현수가 콧등을 찡그렸다.
“이번 사안도 그런 논리를 가져오면 우리 주장의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말이군요.”
“규모 자체가 다르지만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현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면 원장단 일부라도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겠습니까? 병원 관계자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이사회 안건에 올라간 이상 공론화된 것은 기정사실이고, 주요 관계자들이 한목소리로 반대한다면 원하는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하기에 부담이 따르겠죠. 당장 필요한 건 시간인데 서정호 형님과는 연락이 됐습니까?”
“상신개발에 대한 추가 정보는 전해 드렸습니다. 조심스럽게 진행 상황을 물었지만 기다리라는 말만 하셨습니다.”
“이사 중 우리와 뜻이 같은 분은 두 명에 불과하고, 결정권이 없는 원장단 반응에 기대야 한다니 참 안 풀리네요.”
잠자코 듣기만 하며 여러 상황을 고민해 보던 김지훈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지만, 진상건도 원장단의 반발에 대비하고 있을 게 분명해.’
“신 교수, 해결책을 말하지 못해 미안한데, 더 암담한 상황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아.”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이 있어?”
“내게 원장단을 믿지 말라고 했지? 진상건은 원장단을 믿을까? 펠로우 건을 경험한 이상 십중팔구 미리 수를 썼을 가능성이 높아.”
“어떤 수?”
진상건의 속을 누가 알까?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비슷하게 유추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그냥 내 생각인데, 만일 재정 부실을 우려해 반대가 있다고 치자. 나 같으면 둘 중의 하나를 택하게 할 거야.”
“둘 중의 하나라니?”
“정 재정을 걱정하면 확장을 포기하든지, 이전을 포기하든지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느 병원 원장이라고 해도 순순히 양보하지는 않을 것 같다.”
신현수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원장단끼리 싸움이 붙으면 결국 양측 의견 모두 수용하지 않아도 되겠네. 어느 병원도 포기하지 않을 테니 백지화는 더더욱 물 건너간 일이 될 테고. 그래서 대안은?”
김지훈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뾰족한 대책은 없어. 다만 원장단을 비난하거나 적으로 돌리는 일만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어느 한 병원에만 투자해도 공멸할 수 있다고 설득하면 가장 좋지 않을까? 이전이 훨씬 큰일이지만 확장에 드는 비용도 결코 만만치 않잖아?”
민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이사님들에게만 집중했는데 원장단을 적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씀 정말 예리한 지적입니다. 솔직히 이런 성격의 회의는 전쟁과 다르지 않습니다. 피아가 확실하지 않으면 이길 방법이 없죠.”
“김 과장, 설득할 방법이 공멸뿐일까?”
“내 머리로 더 이상은 한계야. 다만 이사들도 중요하지만, 신 교수든 민 부원장이든 원장단과 미리 접촉했으면 좋겠어. 내가 진상건이라면 사전에 솔깃한 제안을 던져 반대하는 목소리 자체를 막을 것 같아.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을 돌려 해석하면 김지훈의 말에 충분한 일리가 있었다. 진상건의 생각과 행동을 예측해 대비한다면 최소 헛수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사회 개최를 저지할 방법은 없고, 일단 열리면 안건 통과는 확실하다고 봐야 했다. 결국 목표는 안건이 실제 실행되는 순간을 최대한 미루는 것이었다.
서정호가 움직일 때까지 말이다.
내부 반발이 가장 강력할 것이다.
신현수가 결정을 내렸다.
“좋아. 민 부원장님은 월요일 아침까지 재정에 관한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제출해 주세요. 의사들이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김지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난 이사님들과 원장단을 맡아야 하니까, 당분간 김 과장은 내가 맡았던 병원 내 업무를 담당해 줘.”
“원장님과 부원장님이 계시잖아. 정말 좋은 분들이지만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실지도 몰라.”
“원장님과 같이 가야지, 나 혼자 가면 말발이 통하겠어? 김진호 선생님도 임상에 관한 업무로 바쁘시다는 거 잘 알면서 왜 이래? 부원장님이나 민 부원장이 해야 할 일과는 또 달라. 운영이사 괜히 맡긴 거 아니다.”
명확한 한계를 안은 채 전문 병원을 꾸려 나갈지, 아니면 보다 큰 무대를 만들지 중대 기로에 선 마당이었다. 원치 않는 행정적 업무를 떠안아야 했지만 눈살 찌푸릴 일이 아니었다.
“알았어. 그렇다고 너무 병원을 비우지 마. 수술도 해야 하잖아.”
“말 잘했다. 공여자 수술은 안호석 선생에게 맡기면 되니까, 다음 주 내 수술 김 과장이 대신 해 줘.”
“내가?”
“느낌이 안 좋아서 두 건만 잡았어. 환자와 보호자에게 잘 설명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사실 김 과장이 한다면 더 좋아할 수도 있어.”
“어후! 골치 아파. 진상건 정말 민폐덩어리네. 수술 두 건은 뭐야?”
“위암 환자 두 명이야. 간암에만 집중하려고 해도 오는 환자 막을 수는 없잖아? 이경석 선생님도 심심치 않게 대장암 수술을 하는 이유와 똑같아.”
과장으로서 매일 다음 날 수술 스케줄을 조정해 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대형 병원이 없는 지역 현실과 전문 병원이지만 간암, 췌장암 등 악성 질환을 수술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했다.
‘이래저래 안주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네.’
“후우! 정말 간만에 하는 위암 수술인데 잘할 수 있을까? 응급 환자 수술이 큰 도움이 되겠지?”
“엄살은? 아뻬 수술한 지 십 년 넘었다고 잊어 먹겠어? 김 과장 실력이면 위암도 똑같아.”
“말만으로도 고맙다. 다음 주는 신 교수 수술 때문에 외래 환자에게까지 양해를 구해야 하니까 죽었네.”
“잘 끝나면 술 살게.”
“잘 끝나면?”
“잘못되면 술이 술이겠어? 그때는 김 과장 좋아하는 소주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양주 산다.”
농담으로 마무리를 지었지만 답답한 자리였다. 어느새 주말 집담회도 끝날 시간이 지났다. 심란한 기분인 데다 이런 일로 눈치 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단 셋이었다.
고경아, 이준영 교수, 손일석.
‘경아 씨는 근무 중이고, 이 자식은 어디 간 거야?’
한 사람 남았다.
이준영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하하하! 호호호!”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는 병원 일로 죽을 맛인데 누구는 세상모르고 즐거워하다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전문 병원 설립을 주도한 이상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웃음소리야.’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들어간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손일석, 이혁원, 강은미가 함께 있었다. 이준영 교수는 무뚝뚝했고, 이혁원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손일석과 강은미는 거의 무장 해제 수준이었다.
감히 이준영 교수 앞에서?
커피에 과자 향까지 진하게 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