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76화 (1,176/1,329)

2화

김지훈이 보호자를 만났다.

“선생님, 잘 끝났습니까?”

활짝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정덕순 의원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른 사람은 별문제 없이 받는 수술이라고 들은 데다 딸아이라 그런지 마음을 많이 졸였습니다. 혈관 기형이 내 탓인 것 같기도 하고요. 과장님을 찾은 것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허허! 젊은 분이 참 겸손하시네. 모레 퇴원할 수 있다고요? 언제 또 오면 되겠습니까?”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일주일 후 실밥 뽑으러 오시면 됩니다. 가벼운 소화불량이 발생할 수 있지만 가까운 병원에서 치료받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혹,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힘닿는 선에서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려운 일이 왜 없을까?

마음 같아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상건을 응징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하는 법이었다.

‘이런 얘기 꺼냈다간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신경 써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허탈하게 웃었다.

‘힘 있는 국회의원에 전직 장성 출신을 알면 뭐 하나? 정작 부탁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네. 하긴 부탁할 일이 아예 없는 게 제일 좋겠지.’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없지만 최소 법을 지키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어쩌면 법보다 순리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더 바람직할지도 몰랐다.

‘우리만이라도!’

이제 회진만 돌면 하루 일과가 끝난다.

우습게도 때아니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원장님이 안 보이시네. 이 정도 수술은 당연히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반복되는 칭찬 한 번 들어야 하는데 아쉽네. 스승님은 안 오셨나?’

중견임에도 가끔은 스승의 칭찬에 춤을 추는 어린 제자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두리번두리번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를 찾던 김지훈이 땀에 젖은 수술복을 벗고 재빨리 샤워를 했다. 수술 방을 막 나가려는 순간 수술 방 간호사가 전한 연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래에 과장님을 만나러 온 분이 계시대요.”

“저를요? 진료하는 날이 아닌데.”

“이름을 들으면 아실 거라고 했대요.”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진상미?’

원인 모를 복통으로 시달렸던 진상미와의 인연을 생각해 보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당연한 일일 뿐이었고, 되려 진평호와 금경태의 전횡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 은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래전 일이었다.

그 이후 얼굴 한번 본 적이 없었다.

‘상황이 많이 달라졌겠지?’

진상건이 진평호의 아들이고, 서로가 친척지간이지만 원수처럼 변했을 테니 진씨 일가와 관련된 일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한두 해 전에 있었던 일이 아닌 이상 도움이 될 정보가 있을 턱이 없었다. 새삼 그런 일로 찾아올 이유도 없고 말이다.

‘무슨 일이지? 또 원인 모를 복통이 생겼나? 아니지. 진료가 필요했다면 정식으로 예약하면 되는 일이잖아?’

김지훈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외래에 들어서는 순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세월을 따라 잔주름만 늘었을 뿐 예전 얼굴 그대로였다. 자기 관리 잘하며 건강하게 지냈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평생 잊기 힘든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진상미가 무척 반가워했다.

“안녕하세요.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어이쿠! 저보고 하실 말씀이 아닙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어디 아파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요즘 들어 조금씩 배가 아파서요. 개인 의원에서는 단순 장염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느꼈던 복통과 비슷한 느낌도 들고요.”

“그래요? 아니길 바라지만 만에 하나 재발했다면 복강경으로 진단해야지, 초음파나 CT로 확인할 방법이 없는데 큰일이네요. 일단 정식으로 외래 예약을 하고 검사해 보죠.”

“선생님, 아니 이젠 과장님 앞으로요?”

전문 병원 체계상 이경석이나 신현수가 맡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그보다 우선인 기준이 있었다. 수술한 환자가 같은 상황으로 다시 오면 집도의였던 의사가 먼저 보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한편으로 찜찜하긴 했다.

아직 진료 예약조차 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외래를 찾은 꼴이었다. 각별한 인연을 가졌다고 순서나 절차를 무시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내심 진상미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특혜를 받으려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경우가 없는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네. 어쨌든 워낙 고생을 많이 했고, 신세진 것도 사실이니까 무안해할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다음 주에 제 앞으로 예약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진상건 이사장과는 별문제 없으신가요? 얼핏 이 병원도 원래 종합 병원을 만들기로 했는데 재단 때문에 무산됐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예?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긴 한데, 진상미 씨에게 들으니까 솔직히 의외네요. 아직도 그쪽과 교류를 하십니까?”

“일가친척 중 상당수가 그 집안과 등을 돌렸어요. 이젠 친척이 아니라 원수보다 못한 사이인데 그럴 리가 있나요?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웃어야 하는 사람도 제법 있지만요. 세상 참 안 변하네요.”

순간 촉이 왔다.

눈치 못 채면 바보 천치다.

분명 복통 때문만이 아니었다.

만일 예전처럼 중대한 정보가 있는데 혼자 듣고 해결하려 하다간 얻고도 남을 정보까지 놓치기 마련이었다. 성급한 판단일 수도 있어 일단 진상미의 의중을 떠봐야 했다.

김지훈이 넌지시 물었다.

“우리 병원 상황을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신현수 이사님과 전문 병원이 진상건에겐 눈엣가시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어요. 들은 말뿐이지만 진상건이 개처럼 부려 먹는 사람이 한 말이니까 틀리진 않을 거예요. 남들 앞에선 점잖은 체하지만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준 수모가 어느 정도였겠어요?”

개처럼 부려 먹는다?

찍소리 못하게 돈을 주지만 인격과 자존심을 모두 깔아뭉갰다는 말이었다. 한풀이라 할지라도 그런 대우를 받은 사람의 말이라면 어떤 내용이 됐든 충분한 근거가 있을 것이다.

“돈과 권력이 전부가 아닌데, 그게 모든 것인 것처럼 구는 사람들을 어쩌겠습니까? 씁쓸하네요. 그런데 그분이 뭐라고 했습니까?”

“상신개발이란 회사가 있어요. 명색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데, 최근 땅 거래 때문에 반대되는 의견 하나 말했다가 입에 담지 못할 소리까지 들은 모양이에요.”

김지훈의 귀가 번쩍 뜨였다.

상신개발이라면 천안 병원 이전 부지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였다. 민정호는 진상건과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감추지 않았다.

“무슨 의견이요?”

“의견이라기보다 몸을 사렸다는 말이 정확하겠네요. 잘되면 큰돈을 얻지만 문제가 생기는 순간 옴팡 뒤집어쓰게 생겼는데 누군들 겁이 안 나겠어요?”

“구체적인 내용을 아십니까?”

“저도 자세하게는 몰라요.”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대략적인 내용에서 핵심을 뽑아내는 재주는 역시 민정호가 최고였다. 더구나 환자가 아닌 기업에 관한 내용이니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진상미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했다.

무턱대고 민정호를 부를 수는 없었다.

“제게 이런 말을 하시는 이유가…….”

“애초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일을 한 잘못도 있지만, 내 인생의 앞길을 막은 사람들이에요. 한 번 망신을 당했으면 생각이라도 고쳐야 하는데 진상건 역시 진평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요. 다시는 나 같은 꼴을 당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요.”

진상미의 의중이 명확해졌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시대 상황이 만든 말일 뿐 사실 여자와 남자를 가릴 일이 아니었다.

복통을 핑계로 한 복수였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 혼자 듣고 판단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죄송하지만 다른 분에게 상신개발에 대해 아는 것을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요.”

곧바로 민정호에게 연락했다.

상신개발이란 소리에 마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나타났다. 몸은 바람처럼 빨랐지만 결코 냉철함을 잃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행정부원장을 맡고 있는 민정호입니다. 이렇게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상미예요.”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알고 계신다고요? 실례지만 먼저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민정호가 진상미의 신상에 대해 물었다.

서로가 초면이었다.

자칫 의심하는 기색을 보여 분위기를 망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치 이것이 가장 깔끔한 시작이라는 듯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기분 나쁠 정도로 너무 냉정하네.’

김지훈을 불안케 한 시간이 끝났다.

“진상건 이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면 제가 왜 이러는지 충분히 이해하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무례한 말이 있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김 과장님 곁에 무척 믿음직한 분이 계셨네요. 입장이 바뀌었다면 저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진상미도 만만치 않았다.

‘예전에도 당찬 사람이었는데 또 달라졌네.’

“이런! 마실 것도 없었네요. 늦은 시간이지만 커피 한 잔 어떠십니까? 마침 제게 꽤 좋은 커피가 있습니다. 마음에 드실 겁니다.”

“한 잔 주세요.”

“자리를 옮기려면 번거로우실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식지 않게 가져오겠습니다.”

민정호가 직접 원두커피를 내려왔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한시라도 빨리 상신개발에 대해 듣고 싶을 텐데 보온병에 담아 올 정도로 여유를 부렸다. 사실 시작은 환자로 왔으니 커피를 대접할 일이 없었지만 화제가 바뀌는 순간 음료수 정도는 내왔어야 했다.

센스와 순발력 모두 부족했다.

‘이게 바로 사회생활이겠지? 지나치기 쉬운 일까지 빠짐없이 챙겨야 인맥을 쌓을 수 있구나. 역시 기본기가 제일 중요해.’

커피 향은 왜 이렇게 고소한지 모를 일이었다.

민정호와 진상미의 대화가 이어졌다.

이런 대화를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하필이면 회진 시간이 임박해 급히 병동과 중환자실에 전화해 뒤로 미뤘다.

규모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김지훈의 눈에 민정호는 기업 경영에 관한 한 선수였고, 진상건의 수법도 상당 부분 꿰차고 있었다.

애매모호하거나 흐릿한 말을 들으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여전히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분명 무엇인가 잡아내고 있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상황을 보니 상신개발 대표이사분은 직접 만날 방법은 없겠군요.”

“가끔 연락하는 정도지만 하필이면 그때 불만이 너무 심해져 들을 수 있던 말이에요. 아무리 목이 묶여 있어도 돈 앞에 장사 없다는 소리 틀리지 않아요.”

“맞는 말씀입니다만, 때론 자존심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때도 있는 법이지요. 실례지만 회계 법인에서 근무한다고 하셨는데, 혹시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조그만 회사고, 회계사도 아니지만 일반 사무직이나 단순 보조는 아니에요.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과장님은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김지훈도 나름 궁금한 점이 있었지만 진상미 앞에서 할 말이 아니었다. 반면 기본적으로 의사로서 환자를 대한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었다. 내심 진짜 진료를 받을 생각이 있는지 의문스럽기도 했다.

“아직 회진을 못 돌아서 시간이 없네요. 진상미 씨, 진료받으실 거죠?”

“꼭 받아야 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진단적 복강경을 다시 해야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 진료 때 뵙겠습니다. 아! 바로 검사를 하는 게 좋으니까 금식하고 오세요.”

“예.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물끄러미 진상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지훈이 민정호에게 물었다.

“도움이 될 것 같습니까?”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서정호 형님께 다시 연락을 해야겠습니다.”

“그 정도예요? 그런데 진상미 씨 말대로라면 상신개발 대표이사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바지사장이라고 해서 책임을 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이나 진상미 씨가 모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대표이사와 친척이라 부담이 크다고 해도, 진상건 이사장의 불법적인 행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겠죠. 피해자가 워낙 많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이든 복수심이었든 진평호와 당당히 맞선 이후 근본적인 가치관이 변했다면 환영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정당하게 돈을 버는 기쁨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직업은 왜 물어봤어요?”

“여기저기 더 알아봤겠지만 대표이사라는 사람이 한 말을 듣고 유추해 낸 내용이 상당히 전문적이었습니다. 능력이 상당한 사람이네요. 그런데 과장님은 진상미 씨와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겁니까?”

“인연이라면 인연이지만 굳이 내게 말할 이유가 없긴 해요. 단순히 의사와 환자로 만났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같은 목표를 갖고 있더라고요.”

예전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민정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과장님만 특별한 환자를 보는 것이 아닐 텐데, 남들은 아무리 만들고 싶어도 못 만들 인맥을 자연스럽게 만드시다니 희한하네요.”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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