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73화 (1,173/1,329)

19화

모든 계획을 세운 당사자이자 최대 수혜자인 데다 인맥이 훨씬 넓은 진상건이었다. 김병오 이사 역시 민정호가 입수한 정보를 모를 리 없었다.

“이사장님,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항상 나오는 말입니다. 언제 투기를 잡겠다는 수사가 중단된 적이 있습니까? 더군다나 지지율이 떨어지는 추세니까 여론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을 겁니다.”

“소나기는 피해 가라고 여기저기에서 말이 나오는데 조심해서 나쁠 일이 없습니다.”

“이 정권에 그 정도 의지가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병원 발전을 위해 투자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점을 명심하세요.”

“당연히 그렇지만 일부 이사들의 행동이 다소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투자와 투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알 만한 양반들이! 쯧! 매사 깔끔해야 한다고 넌지시 주의를 주세요. 문제가 될 부분은 없지만 꼬투리 잡으려면 뭘 못하겠습니까? 오해 사지 않도록 이번 기회에 서류도 깨끗하게 정리하세요.”

말과는 달리 진상건도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디까지 밀어붙일 셈이지?’

전과 다른 기류가 흐르는 것은 사실이었다.

내심 걱정이 앞서 선이 닿아 있는 정관계 인사들의 최근 행적을 은밀하게 살폈다. 일부는 대비하고 있었지만 막연한 두려움에 가까웠고, 대다수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 놈과 아닌 놈, 능력이 있는 놈과 없는 놈의 차이겠지. 보험용으로 건넨 돈이 만만치 않은 이상 정보를 숨겨 가며 혼자 살겠다고 발버둥 쳐 봐야 소용도 없을 테고.’

무엇보다 들인 돈이 너무 많았다.

또한 이런 일은 타이밍이 가장 중요한 법이었다.

금융 규제 하나 때문에 단 며칠 차이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기도, 잃기도 하는 세상이었다. 하기에 정확하게 판단해야 했다.

문득 김병오 이사가 눈에 들어왔다.

재단 내에서만 행세할 뿐 대외적인 능력은 한참 아래였다. 그런 사람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면 이미 많은 사람이 눈치를 챘다는 말이었다.

‘고급 정보에 접근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알고 있다면 더 이상 비밀도, 고급 정보도 아니지.’

핵폭탄급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두려움에 떠는 놈은 서둘러 발을 떼겠지만 잔챙이들이나 할 선택이었다. 사실 일반 국민 절대다수가 이런 정보를 접하지도 못할 것이다. 생각보다 사안이 심각해져도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아파트 한두 채 가지고 노는 놈들만 잡아들일 공산이 높았다.

경험이 말해 주고 있었다.

진상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악의 경우라도 이사 몇몇을 잃을 뿐 내가 빠져나갈 구멍은 충분하다. 어쨌든 서둘러야겠어.’

“이사회는 언제 열 수 있겠습니까?”

“상신개발과 협상이 진행 중인 데다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제법 있어 이 주 정도 필요합니다.”

“좋습니다. 이 주 후에 이사회를 열겠습니다. 그때까지 차질 없이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합니다.”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질 경우 대비책은 있으신 겁니까? 이사들도 아예 모르는 눈치가 아닙니다.”

“설마 내가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진행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난 돈만 잃으면 되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은 인생 전체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자들은 절대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합니다.”

“알겠습니다.”

진상건이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본보기가 필요했거나 정권 차원의 일이었다면 벌써 사달이 났겠지. 이번 역시 잔챙이들을 잡아들이는 것으로 끝날 일이다. 투기에 관해서는 거물 하나 잡는 것보다 요란하게 벌이는 것이 도리어 표가 되잖아?’

똑같은 정보를 얻었지만 민정호와 완전히 반대의 판단을 내렸다. 찻잔 속 태풍일지, 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폭풍일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결과를 알려 줄 것이다.

***

다음 날.

김지훈, 신현수, 민정호, 서정호, 정훈철.

색안경을 끼고 보아도 다른 일로 만났다고 보기 힘든 사람들이 모였다. 자세한 이야기부터 나누고 싶었던 김지훈의 바람과 달리 서정호가 무척 서둘렀다. 결코 서먹한 사이가 아님에도 정훈철에게 무척 신경을 쓰는 것 같기도 했다.

“민 부원장, 어디서 어떤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내 입장에서는 편한 자리가 아니야. 제공한다는 정보부터 보자.”

민정호가 두툼한 보따리 두 개를 건넸다.

서정호의 전문 수사 분야가 경제 쪽인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를 자료를 빠르게 살폈다. 김지훈에겐 검으면 글씨요, 하야면 바탕일 뿐이었다.

“세 개 병원과 주변 지역의 토지대장과 등기부등본이라! 너무 방대하네. 빨간색으로 표시한 건 뭐야?”

“직간접적으로 진상건 이사장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추정이지만 그들의 이름으로 땅을 구입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동명이인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알았어?”

“진상건 이사장과 직접 계약을 한 것은 처음이지만 병원 일로 처음 접한 것이 아닙니다. 돈 될 만한 일은 문어발식으로 관여한 사람이니까요. 그때부터 주변 인물들을 알아 두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같이 일을 했다? 이 정도면 진상건 이사장도 민 부원장이 어떤 일을 하고 다니는지 알았을 것 같은데 아무런 대응을 안 하다니 신빙성이 있는 거야? 민 부원장의 추측에 불과한 거 아니야?”

민정호가 눈가를 굳혔다.

검사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의문이었다.

“진상건 이사장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도록 수족처럼 부리는 사람까지 철두철미하게 관리합니다. 심지어 같은 일을 해도 특정 부분에 종사하는 사람은 다른 부분을 절대 알 수 없게 만드는 거죠. 그 부분을 철저히 이용한 결과입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알지 못하게 한다, 이 말이지? 말은 쉬워도 실제로는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진상건 이사장의 능력이 대단하네. 빈틈을 파고든 민 부원장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서정호가 감탄을 터트렸다. 하지만 방대할 뿐 아무런 권한이 없는 민간인이 수집한 자료였다. 내심 정보의 출처, 내용의 신빙성, 사건의 본질 등을 의심하던 서정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자금 흐름까지 예측을 했네. 그런데 상신개발은 예전부터 이전 부지를 소유한 기업이라고 적시해 놓고, 실소유주가 진상건 이사장으로 의심된다니 근거가 있어?”

“최소의 비용으로 시세 차익을 최대한 얻기 위해 진상건 이사장이 자주 사용하는 수법입니다. 더구나 재정이 안 좋은 상태에서 병원 이전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진상건 이사장에겐 상당한 이득이 될 테고, 어쩌면 재단을 접수한 목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밀리에 병원 이전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도 어떤 상황인지 전혀 모를 겁니다.”

김지훈은 물론 신현수도 내심 무척 놀랐다.

민정호가 과거 어떤 일을 했는지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진상건과 가까운 곳에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더구나 철두철미하다는 진상건의 비리나 수법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좋은 감정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했고, 전문 병원 행정을 맡은 것 역시 외도한 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사람 속 모른다더니, 이번 일이 아니었어도 기어코 진상건을 몰락시킬 사람이었네. 왜 말을 안 했을까?’

다소 섭섭했지만 돌이켜 보면 감정만 격앙시킬 뿐 김지훈과 신현수에게 실제적 도움이 되는 사실은 아니었다. 사실 지금 이 자리에서 듣는 것으로 충분했다.

무엇보다 당사자가 아니어도 상당 부분 납득이 가는 상황이었다. 노련한 검사인 서정호는 이미 머릿속에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서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 부원장 말이 맞는다면 질이 무척 안 좋은 사람이네. 반드시 잡아들이고 싶은 마음도 생겨. 하지만 모두 추정에 불과해. 법적 구속력을 갖는 구체적인 증거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수사에 착수할 수 없어.”

“알고 있습니다. 확인만 해 주십시오.”

“좋아. 몇 가지 눈에 띄는 정보부터 확인해 볼게. 장담할 수 없는 일인 데다 만에 하나 수사에 착수해도 진행 상황은 알려 줄 수 없어.”

원칙에 입각한 말이었다.

다들 보다 자세하게 말해 주길 바랐지만 이것으로 얘기 끝났다는 듯 서정호가 자료를 꽁꽁 싸맸다. 정훈철에겐 또 다른 관점에서 하나의 당부를 전했다.

“형님, 민 부원장이 이 자리에 왜 불렀고, 왜 오셨는지 짐작이 갑니다만, 진상건 이사장에 대한 건은 추측성 보도라도 절대 안 됩니다. 진위 여부를 떠나 덩어리가 너무 크네요.”

“내가 뭘 알아야지?”

“민 부원장이 제게만 자료를 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계실 겁니다. 부탁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지켜 주셔야 할 일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분위기가 안 좋다고 짐작은 하고 있지만, 때 되면 벌어지는 일이잖아? 우리 쪽에서 파악한 것보다 더 엄중해?”

“각자 판단하기 나름이겠죠. 형님을 믿고 전과 다르다는 사실 정도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입 벙긋 잘못하면 제 목이 달아날 수도 있습니다.”

섬뜩한 말이었다.

정훈철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서 검사 말대로 진상건 이사장 건은 결코 사소하지 않아. 의혹이라도 이런 거물이 관련된 사건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게 우리 책임이고, 의무야. 평범한 사람하고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어.”

“정식으로 엠바고를 요청합니다.”

직접적인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상황은 점점 구체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검사가 옷을 벗어야 하는 일, 언론에 엠바고를 요청해야 할 일이 흔할 리 없었다.

“기한은?”

“최소 삼 주.”

언론 입장에서는 무척 긴 시간이었다. 더구나 특종에 목을 매야 하는 직업 특성상 다른 언론사에서 먼저 터트리는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길어. 우리만 뛰는 게 아니야.”

“의혹만 가지고 정식으로 수사 팀을 꾸릴 수 없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잘못하면 역공을 당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만 망하는 게 아니라 병원 몇 개 분해될지도 모릅니다.”

정훈철이 한동안 뜸을 들였다.

“좋아. 엠바고는 반드시 지킬 테니까 대신 수사 상황을 가장 먼저 알려 줘. 이런 특종 놓치면 나도 잘린다.”

“합의한 겁니다.”

서정호와 정훈철이 악수로 약속했다.

이제야 시선을 돌렸다.

“김 과장, 신 교수, 당사자니까 믿어도 되겠지? 진상건 이사장은 우리도 상대하기 버거운 거물이야. 조사를 시작했다는 말만 나와도 수사가 종결될 수 있어.”

“알겠습니다.”

“확실하게 조사할 테니까 믿고 기다려. 참! 민 부원장, 하나만 물어보자.”

“말씀하십시오.”

“어떤 권한도 없는 사람이 이런 자료를 모았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야. 몇몇 부분은 너무 구체적이라 나도 상당히 놀랐어. 게다가 행정부원장을 하기 전의 일까지 언급돼 있던데 이유가 뭐야?”

“이유라니요?”

“김 과장이나 신 교수는 어떨지 모르지만 단지 병원을 위한 일이라고 믿을 사람이 있을까? 계약이란 말로 피해 가지 말고 말해 봐.”

김지훈이나 신현수도 무척 궁금해했던 일이었고, 민정호에겐 상당히 곤란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숨도 쉬지 않고 되물었다.

“수사에 필요한 사안입니까?”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그래.”

“사적인 문제는 피해 주십시오.”

“맺힌 게 많구나. 개인적인 일을 결부시킬 필요도, 이유도 없지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남의 눈에 피눈물 흐르게 만들고도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가는 놈만큼 나쁜 놈이 없으니까 말이야. 형님, 전 먼저 일어나야겠습니다. 더 계실 겁니까?”

“나도 일어나야지. 하는 일 없이 바빠.”

결국 김지훈과 신현수는 몇 마디 말도 못한 채 자리가 끝났다. 하지만 대단한 성과를 얻었다. 삼 주 혹은 진척에 따라 더 빠른 시점에 진상건은 대가를 치를 것이라 믿었다.

김지훈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신 교수, 우리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야. 사건 한복판에 휘말린 것 같은 느낌까지 들어 은근히 긴장된다.”

“지은 죄가 없으면 긴장할 일이 없겠지.”

“야! 교통신호 한 번 어기지 않은 사람처럼 말하면 편해? 어쨌든 다들 대단하고, 고맙네. 역시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멋있어.”

“너도 마찬가지야. 중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결과적으로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정유미 수술에 바짝 신경 써.”

“아픈 사람 치료할 뿐인데 이리저리 얽혀 있는 걸 보면 세상 단순하지 않아.”

신현수가 피식 웃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복잡할 것도 없어. 해야 할 일을 하고, 필요한 것을 얻는 것뿐이야.”

“내가 아는 신현수는 단순하게 살지 않는데.”

“진상건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최대한 단순하게 살고 싶다.”

김지훈도 따라 웃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던 일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한 덕만은 아니었다. 새삼 인연이라는 두 글자가 감사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두 분 형님부터 민 부원장까지 정말 소중한 인연이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인연을 깨닫지 못하고 지나쳤을까?’

앞으로 잘할 일이었다.

귀중한 주말 대부분을 가족과 지내지 못했지만 가슴이 꽉 찬 이틀이었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남았다.

정유미 수술을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국회의원 위세를 이용할 생각은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분명히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집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진상건, 병원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을 했단 말이지? 어쩌냐? 넌 이제 죽었어.’

카르페 디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