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72화 (1,172/1,329)

18화

신현수, 민정호와 함께 최태우 의원을 기다리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동료 의원인 정덕순만이 아니라 권철 위원까지 차례차례 들어왔다. 환자 때문에 모였다고 보기에는 면면이 너무 화려했다.

민정호의 말이 스쳤다.

‘우리는 정말 핑계인 모양이네.’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은 후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간 이식을 받은 동생과 총상으로 사경을 헤맸던 병사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었다.

“총상 후유증이 만만치가 않아 지금도 많이 힘들어하지만, 김 과장님이 수술을 잘해 주셔서 차츰 건강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모든 병사들이 잠재적 위험에 노출돼 있습니다.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사고 후 책임을 절대 외면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합니다. 최 의원님과 정 의원님께서도 장병들의 복지와 처우 개선에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누구보다 군인들의 고충을 잘 아시니 국방위원으로 모신 것 아니겠습니까? 경청할 테니 조언을 아끼지 말아 주십시오. 분야는 다르지만 청와대의 의중이 어떤지 알려 주시면 더욱 고맙고요.”

김지훈이 귀를 활짝 열었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예편했지만 정권 실세들과 상당한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참군인이라 불린 사람들의 말년을 생각하면 의외라 할 수 있었다.

‘환자 얘기 속에 다른 일이 뒤섞이네. 청와대의 의중 이런 것이 민 부원장이 말하는 힌트일까?’

“정 의원님, 제 동생도 김 과장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따님 수술도 순조롭게 끝나 곧 건강을 되찾을 겁니다. 김 과장님, 안 그렇습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허! 인사가 늦었습니다. 뒤늦게 본 아이라 아비로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 큰데 잘 부탁드립니다. 간과 관련된 분야에서는 최고라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젊은 나이에 대단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렇게 젊지도 않고요.”

“사십 대면 한창 일할 나이 아닙니까?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벌써 뒷방 신세를 졌어야 합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허허허! 최 의원님께서 소개해 주셨을 때 살짝 못 미더운 마음이 있었는데, 직접 얼굴을 보니 딸아이를 맡겨도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덕분에 평소 만나기 힘든 분들과 좋은 자리도 갖게 됐군요. 한 잔 받으세요.”

술 몇 잔이 오고 갔다.

신현수와 민정호는 연신 술잔을 비웠지만 김지훈은 예의가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조절했다. 내심 손일석 부부와의 가족 모임에도 정신이 가 있는 탓이었다.

‘정훈이가 있는데 술 냄새 팍팍 풍길 수는 없지. 민 부원장도 술 잘 마시네. 저러면서 한 번도 밥조차 안 먹어?’

슬슬 술기운이 돌았다.

주로 환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개인적인 관심사지만 국회의원으로서 갖는 의문이 아니었다. 이렇게 끝나면 친분은 얻어도 아무 소득이 없을 자리였다. 외부 인사와 접촉할 일이 많은 신현수나 민정호에겐 그 자체로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정치판에 나갈 생각이 아닌 이상 김지훈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대화의 기술은 어디 간 거야?’

속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민정호가 최태우 의원에게 술을 따르며 넌지시 말했다.

“병원 문제에도 신경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얼마 전 브로커들 때문에 곤욕을 치렀습니다. 어디나 불법적인 일이 없을 수 없지만 환자 진료부터 치료까지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허어! 노력은 하는데 건강한 곳을 찾기 어려워 참 문제야. 다 우리 잘못이라는 점 인정해. 하지만 큰 줄기부터 잡아 가면 곧 좋아지지 않겠어?”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의원님, 이왕이면 땅값도 확 잡아 주십시오.”

“신 교수는 또 무슨 일이야?”

‘야! 현수에게도 자연스럽게 말을 놓네. 도대체 둘이 뭘 하고 다닌 거야? 재주도 좋아.’

“병원 뒤편에 재단 소유 부지가 있습니다. 종합 병원을 짓기 위해 예전에 사 놓은 땅인데, 일부 부지가 확보가 안 돼 추가 구입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땅값이 올라도 너무 올랐습니다. 기존에 예상했던 예산으로는 턱도 없을 정도입니다.”

“병원 건립 예정 부지까지 널뛴다? 이놈의 투기 세력들 때문에 망조가 들 판이네. 정 의원님, 부작용을 걱정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실정인 이상…….”

최태우 의원이 말을 하다 말고 헛기침을 하며 신현수를 보았다. 무척 중대한 일인지 하마터면 실언을 했을 수도 있다는 표정이었다.

예감이 맞았다.

“신 교수, 민 부원장, 얼추 식사 다 했으면 끝내지. 간만에 정치판을 기웃거리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니 좋네. 김 과장님, 바쁜 시간 뺏어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그럼 이만 일어납시다. 정 의원님, 권 위원님, 가는 방향도 같은데 못다 한 얘기도 나눌 겸 함께 가시죠. 아예 한 잔 더 하실까요?”

“그게 좋지 않겠습니까? 외과의들 술이 말술이라는데, 식사만 하고 가 김 과장님께 미안합니다. 딸아이 수술 끝나면 다시 한번 자리 마련해 보죠.”

데면데면한 사람에게 흔히 하는 시간 되면 밥 한 끼 하자는 말과 똑같았다. 보호자가 국회의원이라고 기대하면 우스운 모양새만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예의는 예의다.

“감사합니다.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원들의 차량이 사라지자 마지막까지 정성을 다해 마무리한 민정호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신현수도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과장님, 우리도 이 차 가시죠.”

“이 차요?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해는 항상 동쪽에서 뜹니다. 간단하게 맥주 한잔하면서 할 말이 있습니다.”

“할 말이 없다는 게 아니라 자리를 옮길 줄은 몰랐네요. 조용한 호프집 있으니까 그리 가죠.”

노가리 안주에 피처 하나 시켰다.

다들 목만 축이는 정도로 마셨다.

“민 부원장님, 평소 누구나 할 수 있는 말만 오갔는데 원하는 정보를 얻었어요?”

“얻었습니다.”

“정말이요? 뭐예요?”

“정권 차원에서 부동산 투기꾼들을 잡으려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정치권 인사들과 관련된 데다 하도 비밀을 강조해 상당히 위력적이고 강력한 정보인 줄 알았는데 항상 듣던 내용이었다.

“투기꾼 안 잡는다는 정권 있었나요? 솔직히 말만 번지르르하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더하잖아요? 모르긴 몰라도 국회의원 중에도 투기를 하는 사람이 꽤 있을 겁니다. 잡혀도 결국 흐지부지 잘도 빠져나가고요.”

“이번은 다를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제가 비밀을 강조한 이유는 예전과 달리 유난스러울 정도로 보안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 부원장님이 정책을 다루는 사람도 아닌데 이미 보안이 깨진 거 아닙니까? 그 말이 맞는다면 진상건은 벌써 몸을 사렸을 텐데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버젓이 진행하고 있잖아요. 확신할 수 있어요?”

민정호가 눈빛을 굳혔다.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확신합니다. 진상건 이사장의 행동 역시 강력한 증거일 수 있습니다. 모든 정권이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일상적인 투기 단속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번 역시 다를 것이 없다는 선에서 정보가 샌 것 같고요.”

“막연한 추측 같은데요.”

“땅 문제가 나왔을 때 최태우 의원의 입이 왜 막혔겠습니까? 사소한 실수 하나마저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게다가 정 의원님은 부작용을 우려한다고 했습니다. 기존과 다를 바 없는 단속이라면 그런 말 자체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더군다나 청와대와 선이 닿아 있는 권 위원님과 함께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같은 말을 들었는데 해석이 완전히 달랐다.

민정호 말대로라면 정권의 명운을 걸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병원 문제가 아니더라도 내심 바라는 일이었고, 제대로 진행된다면 진상건 같은 거물도 빠져나가기 힘들지 몰랐다.

“신 교수, 같은 생각이야? 일부 부지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말은 왜 한 거야? 만에 하나 거짓말인 걸 들키면 뒷감당을 할 수 있겠어?”

“거짓말? 우리가 처한 현실이야. 진상건이 이사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한 거짓말이 될 수 없어. 민 부원장님, 처음 들었을 때는 나도 믿기 힘들었지만 최태우 의원을 보며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확신이 섰어요. 이제 마지막 확인과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바로 실행하죠.”

김지훈이 눈만 멀뚱거렸다.

“신 교수도 이미 알고 있었어?”

“얼마 전에 들었어. 정유미 환자 때문에 정신없어 보여 말 못한 것은 미안하다.”

“야! 이거 완전히 허수아비였네. 기분이 살짝 안 좋다. 어쨌든 마지막 확인이라는 건 또 뭐야?”

민정호가 말없이 휴대폰을 꺼냈다.

“형님, 민정호입니다. 다음 주에 만나 뵙고 할 말이 있는데 시간 되십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요새 바빠서 집에도 못 들어가.)

“수천억대 땅 투기가 벌어지고 있는데 관심 없으십니까? 배임과 횡령까지 걸려 있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근거는 있는 거야?)

“제가 모은 정보를 보고 판단하시는 게 가장 빠르지 않겠습니까? 지금 하시는 일과 관련이 깊을 텐데요. 제대로 성과를 낼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관련이 깊다니, 뭘 알고 하는 소리야?)

“최태우 의원님, 정덕순 의원님, 권철 위원님을 만났습니다. 확실한 말은 못 들었지만 심상치 않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하게 받았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공한다는 정보가 신빙성이 있는 거야? 확실하지 않으면 각오해야 할 거야.)

“불행히도 현재 우리 병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확신합니다. 이왕이면 잔챙이보다 거물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아. 내일 보자.)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김지훈이 몇 번을 전화해도 시간을 내지 않았던 서정호였다. 국회의원들을 거론했기 때문인지, 민정호의 말이 현실성이 있기 때문인지 몰라도 바로 약속을 잡았다.

‘막대한 이득이 걸린 투기라면 사회적 파장이 엄청날 텐데 평상시라도 관심을 주지 않을 수 없잖아?’

생각이 무색하게 정훈철도 다르지 않았다. 서정호와 함께 만나자는 말에 숨도 안 쉬고 시간과 장소를 물었다. 전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에서 강한 흥분이 느껴졌다.

‘야! 이거 정말 뭔가 있긴 있네.’

민정호가 잔을 비웠다.

“서정호 형님의 반응을 볼 때 대검에서 이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정권 차원에서 진행하는 일이라는 강한 반증입니다. 운 좋게도 서정호 형님이 핵심 역할을 맡으신 모양입니다.”

“훈철 형님도 냄새를 맡고 움직이신 것 같죠? 이제 민 부원장님이 모은 정보에 달렸네요.”

“실망스러운 일은 없을 겁니다.”

강한 확신을 보였다.

나직한 대화가 이어졌다.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한 김지훈도 한껏 기대를 품었다. 진상건이 재산상 손실을 넘어 구속까지 된다면 몰락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불법을 저지른 대가를 톡톡히 치를 테고, 병원 문제는 일사천리로 해결될 것이다.

때문인지 은근히 초조했다.

‘잘돼야 할 텐데. 후우! 이런 일을 알고 있어도 아무 일조차 할 수 없어 정말 힘드네.’

“다들 고생했는데 한 일이 없어 미안하네요.”

“왜 한 일이 없습니까? 앞선 두 건의 수술에 이어 정유미 환자까지 수술하기로 결정한 덕분에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제 제안을 보다 신중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할 말이 없지만 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제안을 몇 번을 하든 제 결정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원칙에 운이 작용했다는 말씀이군요.”

신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운이라고 보기에는 들인 노력이 너무 많죠. 김 과장과 민 부원장님 모두 자신의 일에 확고한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얻은 희망입니다.”

“신 교수님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쨌든 민 부원장님 말대로 김 과장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네요.”

“무슨 소리야? 난 수술 말고 한 일이 없어.”

기분 좋은 웃음이 터졌다.

공치사여도 좋았다.

더욱이 환자를 보며 자연스럽게 도움이 됐다는 사실에 묘한 흥분까지 느꼈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 대가치고는 너무 과분한지도 몰랐다.

한편으로 강한 기대감이 다가왔다.

여러모로 비범하지만 민간인의 한계를 넘지 못할 텐데 민정호는 어떤 증거를 내밀까?

대검 검사인 서정호와 유력한 방송국의 언론인인 정훈철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전문 병원의 미래가 달린 하루 뒤 만남에서 결판이 날 것이다.

‘왠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다.’

김지훈이 바람을 담은 주문을 외쳤다.

카르페 디엠!

그 시간, 진상건이 김병오 이사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못 심각한 기색을 보여 무엇인가 발목을 잡은 것이 분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