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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71화 (1,171/1,329)

17화

이준영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편히 말해. 아버지로서 들으마.”

비록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란 말이 이렇게 가슴을 시리게 할 줄은 몰랐다. 한 잔의 커피까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는 아버지였다.

이혁원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인사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아버지, 강은미 선생과 정식으로 교제하고 있습니다. 무척 빠르다는 것은 알지만 결혼하고 싶습니다.”

“결혼?”

“예. 강은미 선생을 사랑합니다.”

강은미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이준영 교수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너무 빠른 결정이었지만 순간의 감정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나이가 아니었다. 무조건 든든한 지원군이 될 엄마보다 훨씬 대하기 어려운 아버지에게 먼저 말했다는 것은 그만큼 확고하다는 의미였다.

“강은미 선생은?”

“학교 다닐 때 느꼈던 감정을 이제야 확인했습니다. 이혁원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만남이기도 해. 너희들의 결정이나 어느 한쪽의 생각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잘 알고 있지?”

순간 이혁원과 강은미가 당황했다.

반대, 혹은 조건을 다는지도 몰랐다.

사랑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는 일생의 중대사다. 하기에 축복받지 못한 결혼만큼 평생의 멍에로 남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혁원, 강은미 선생 부모님에게 정식으로 인사드린 후 허락받고 와. 그게 순서다.”

“아버지, 허락하신 겁니까?”

“엄마가 무척 좋아할 거다.”

이혁원이 주먹을 불끈 쥐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할 일이 아니야. 강은미 선생, 부모님께 허락받은 후 엄마와 함께 다시 보자. 그 전에 이혁원이 어떤 놈인지 잘 살펴.”

“예, 선생님.”

홀로 남은 이준영 교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 해 준 것도 없는데 벌써 품을 떠나려 하는구나. 강은미 선생, 내 아들을 사랑해 줘서 고맙다.’

이혁원도 마찬가지였다.

사이가 좋아도 결혼에 한해서는 완고한 부모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조마조마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사뭇 긴장했던 이혁원이 넥타이를 풀다 말고 돌연 크게 웃었다.

“왜 웃어요?”

“말투로 이미 답을 주셨는데 왜 몰랐을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도 긴장 많이 했구나. 커피도 그렇고, 네게 말씀하실 때 평소 말투와 크게 다르다는 생각 안 들었어? 기회 되면 김지훈 선생님하고 고경아 선생님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봐. 세상에서 제일 무뚝뚝한 우리 아버지가 강은미 선생을 엄청 마음에 들어 하시네. 빨리 날짜 잡자.”

“무슨 날짜를 벌써 잡아요?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이에요?”

“장인어른, 장모님 되실 분들께 인사드리러 가서 허락받는 즉시 상견례하고 결정하면 되잖아. 그리고 빨리하면 안 돼? 섭섭하다.”

강은미도 웃었다.

평소 모습을 보면 이혁원 역시 살가운 사람이 아닌 쪽에 가까웠지만 자신과 있을 때는 달랐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서로를 닮았는지도 몰랐다.

“얘기 나올 때마다 친형 같다고 하면서 과장님께는 언제 말씀드릴 거예요?”

“부모님들에게 허락을 받은 후에 해야 되지 않나? 어? 설마 과장님께 신경을 쓰고 있는 거야? 신혼여행도 가야 하니까 빨리 말은 해야겠지만 지금부터 그럴 필요는 없어.”

“어쩌다 하는 데이트 내내 툭하면 옛날 일까지 꺼내면서 과장님 얘기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죠. 나도 잘 보여서 나쁠 일 없고요.”

“음흉한 거야? 처세술이 뛰어난 거야?”

“호텔만 보면 눈이 벌게지는 사람보다 더 음흉하겠어요? 오프 때마다 외박하면 소문나기 십상인데 조심하자고요.”

“그러게. 진우하고 종진이가 문제야. 우리 집 비밀번호를 왜 알려 줬을까?”

김지훈과는 진도 나가는 속도가 완전히 달랐지만 비밀번호 바꿀 생각은 못하는 이혁원이었다. 총각 사는 방의 처참함과 어지러움을 이미 본 강은미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수술을 깔끔하게 한다고 해서 방까지 깨끗하게 치우고 사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시간, 김지훈은 환자를 만나고 있었다.

결코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시도기에 복강경 수술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설명했다.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기에 불안해하면서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배를 열어야 하나요? 다른 사람은 다 하는데 왜 저는 안 될까요?”

“모든 사람이 같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개복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면 복강경으로 시도해 보겠습니다.”

환자와 보호자가 깜짝 놀랐다.

“예? 정말이에요?”

“시도가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알고 있고, 혈관 기형을 가진 사람이 환자분만이 아니기에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정유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극구 강조해도 시도 자체를 성공으로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당연한 기대였고, 의사가 짊어져야 할 부담이었다.

실제 문제만 남았다.

김지훈이 수술 일정을 확인했다.

‘최소 두세 시간 정도는 있어야 된다.’

예약이 밀려 있다고 해서 수술하는 날마다 꽉 차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운이 좋은 건지 다음 주 금요일 오후가 비어 있었다.

“이때가 아니면 상당 기간 기다려야 합니다. 급한 수술은 아니니까 충분히 생각해 보시고 결정하세요.”

복강경이란 하나의 산을 넘었다.

검사상 용종 등의 양성 종물이라는 판정을 받았지만 어느 의사도 단언하지 않았다. 암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사라질 리 없었다.

“다음 주로 잡아 주세요.”

또 하나의 도전이자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수술 중 하나기에 내심 김지훈도 마음이 급했다.

“알겠습니다. 필요한 검사가 있으니까 이틀 전에 입원해야 합니다. 혹시 마음이 바뀌시면 바로 연락해 주십시오.”

“말씀하신 날 바로 입원하겠습니다.”

처음으로 미소를 보인 환자를 보던 김지훈이 입원장을 발부하고 서도훈을 찾았다. 휘플 라파로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는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확인하고 싶은 사안도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간 이식 수술이 도움이 돼?”

“췌장 주변의 다양한 혈관 분포와 조직을 파악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간접적이라도 경험을 쌓는다는 면은 말할 것도 없고요.”

“다행이다. 역시 간담췌 분야의 모든 부분을 망라한 수술이긴 해. 그건 그렇고, 다음 주 금요일 오후에 수술 잡힌 거 있어?”

애초 환자가 많은 파트가 아닌 데다 김지훈과 수술을 나누고 있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서도훈이었다.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없습니다. 특별한 수술이라도 있습니까?”

“나하고 수술 하나 하자. 라파로로 할 예정이니까 이 환자 기록 살펴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봐. 나하고 경쟁하는 중이니까 집도는 꿈도 꾸지 마.”

“웬만큼 어려운 수술이 아니면 절 부르지도 않으셨겠죠. 퍼스트로 만족합니다.”

기분 좋게 대답한 서도훈이 차트와 검사 결과를 들고 부리나케 사라졌다. 홀로 남은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중대한 사실을 잊었다.

‘수술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도훈이하고 먼저 상의했어야 했어. 최고의 수술 팀 역시 판단 기준으로 삼았어야 했는데, 그 점을 간과하다니 실수야.’

각자 자신의 길을 걷고 있지만 또한 공동운명체였다. 추구하는 목표까지 같은 이상 사소해 보이는 일까지 상의하는 것이 마땅했다.

절대 반복해서는 안 될 실수였다.

시간을 꽤 잡아먹어 회진이 늦었다.

서둘러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려던 김지훈이 병원을 나서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민정호가 강력한 항의의 눈빛을 보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 수술이 결정되면 바로 알려 주기로 했었지?’

“과장님!”

“미안합니다. 일단 라파로로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성공을 장담할 수 없으니까 혹시 보호자나 최태우 의원이 따로 연락하면 아주 잘하는 방식으로 대답해 주세요.”

“잘하는 방식이라니요?”

“비밀 엄수! 입 꾹 다물기!”

“뒤끝이 있으시네요. 지금 말씀드릴 건 수술이 아니라 저녁 약속을 하나 잡았기 때문입니다.”

착각이었다.

“저녁 약속이라니요?”

“정유미 환자 부친 되시는 동료 의원과 최태우 의원님의 친분이 보통 아닌 모양입니다. 아니면 서로에게 굉장히 중요한 인물일 수도 있고요. 동료 의원도 보호자로서 과장님을 만날 겸, 겸사겸사 수술 전에 만나 보길 원하십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신 교수님과 함께하기로 했는데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

“내가요? 그런 자리는 적성에 안 맞아서.”

민정호가 정색을 했다.

“설마 과장님이나 제 얼굴을 보기 위해 의원 두 명이 온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죠? 딸 수술도 핑계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비밀리에 만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회동하면 도리어 곧바로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이해가 걸린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지켜보는 눈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동생과 딸 핑계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만든다 이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참석할 이유가……. 아니네. 주치의를 만나는 자리에서 중요한 얘기를 할 리가 없으니까 상황만 잘 이용하면 오히려 더 은밀하게 접촉할 수 있다?”

“맞습니다.”

그럴듯했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재앙이니 뭐니 하면서 기대를 하는 거예요?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비밀스러운 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맞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보가 아니더라도 도움이 될 힌트는 어디서든 얻을 수 있습니다. 일종의 대화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무표정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면서 필요한 정보를 빼낸다고? 나 같으면 하고 싶던 말도 안 하겠다. 민 부원장도 사람 따라 다르게 행동하나?’

불현듯 가장 총애하고도 남을 자신이나 이혁원에게는 평생 무뚝뚝할 테지만 고경아를 대할 때면 사람이 달라지는 것 같은 이준영 교수가 스쳤다. 당연히 김지훈은 예외였지만 솔직히 깊이 숨겨 둔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일 수도 있었다.

민정호는 어떨까?

‘하긴 민 부원장도 스승님처럼 표현을 안 한다는 생각이 들지, 날 싫어한다는 느낌을 받진 않네.’

확신은 금물이었다.

두고 볼 일이었다.

***

어느새 주말 집담회가 다가왔다.

집중적으로 표적이 될 펠로우들과 고경철이 김지훈이 던진 희망찬 주제에 한껏 고조됐던 긴장을 일시 풀었다.

혈관 기형이 동반된 복강경 수술!

하루 전 김지훈과 실전적이면서도 심도 있는 논의를 한 서도훈이 환자와 질환에 대해 설명한 후 곧바로 토론에 들어갔다.

“서도훈 선생, 혈관 기형이 문제라면 혈관조영술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담낭 동맥을 확인하기 어려울뿐더러 핵심인 간 동맥 기형은 CT로도 충분히 주행 방향과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불필요한 검사로 판단됩니다.”

“간 동맥, 간 문맥, 췌장 동맥과 담도와 담낭에 연결되는 혈관이 손바닥 사분의 일 정도에 불과한 공간에 몰려 있거나 지나갈 텐데, 어떤 방식으로 안전을 담보할 겁니까?”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위험만 더 가중시킵니다. 따라서 각 혈관의 예상 위치를 사전에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간담췌에 있어서 이미 권위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진충기 교수가 본격적으로 나섰다. 점점 대답하기 힘든 질문에 식은땀을 흘리던 서도훈이 이준영 교수의 질문이 이어지는 순간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말았다.

“간 동맥이 아니더라도 분지들을 건드리면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데, 라파로 직후 출혈이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할 거지?”

지극히 실전적인 문제였다.

“만일 혈관에 손상이 유발됐다면 어떤 장기에 무슨 영향을 끼칠지 어떻게 확인할 거야? 장기 손상에 대한 평가는 가능하겠어?”

막상 집도를 맡은 김지훈은 무슨 생각인지 서도훈에게 모든 대답을 맡겼다. 순간순간 말이 끊기자 펠로우들도 불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특히 간 이식 파트이자 췌장 파트인 모찬우와 한수영은 한가운데서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땀이 맺힐 틈이 없었다.

그대로 타들어 갔다.

단지 태우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교수로서, 펠로우로서 자질과 능력을 향상시키는 과정이기에 불만이 끼어들 공간은 없었다.

오래간만에 활기찼던 집담회가 끝났다.

손일석이 고경철의 등을 툭 쳤다.

“운 좋은 놈! 삼 년 차만 됐어도 내 손으로 죽일 수 있었는데 아깝네. 오늘 저녁에 식구들끼리 밥 먹기로 한 거 알지? 오프라고 새면 진짜 죽는다.”

“예, 선생님. 근데 과장님은 못 오신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에휴! 일이 웬수지. 너는 이런 일에 휘말리지 마라. 아니다. 우리가 잘해야 하는구나. 신경 쓰지 마.”

손일석이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았다.

병원 일 혼자 짊어진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김지훈이 개입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파이팅이다! 정훈이 클 때까지만 참아 다오.’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김지훈이 먼저 가라는 손짓을 하며 웃었다. 조카 보러 가는 자리에 참석 못해 미안하다는 눈빛을 한껏 보내며 말이다.

그날 저녁, 약속된 자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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