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보면 볼수록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등을 졌으면 벌써 쪽박 찼겠어.”
“나도 우리와 한배를 탔다는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최태우 의원과 연락을 하는 것도 놀랍지만 지나가는 말에서 정보까지 빼낸다니 무섭다. 무서워.”
“전직 장군은 어떻고! 이쯤 되면 진상건 이사장에게 원한이라도 있는 것 같지 않아?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보다 더 절박하다는 생각까지 들어. 계약 하나로 저렇게 움직이다니 상황 설명이 안 되잖아?”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이 있는 게 확실해.”
“짐작 가는 게 있어? 뭔데?”
“모르지. 하지만 내가 몇 번 물어봤는데 그때마다 사적인 일이라는 말로 넘겼어. 민 부원장 성격상 아니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하지 않았겠어?”
“그러네. 딱 부러지는 사람이 대답을 회피한 거네. 다 같이 진상건이 망하기만 바라는데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말이야.”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과 신현수가 동시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상건과의 계약이 지속됐거나 새로운 계약을 맺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만 해도 섬뜩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엄청난 행운이자 탁월한 선택이었다.
“다 좋은데 마지막 정보가 뭘까?”
“큰 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답답하다.”
“최태우 의원 입에서 뭔가 구체적인 단서를 잡았으니까 검찰이 움직인다는 소리를 했겠지?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이 그때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지.”
“어후! 답답해. 분명 정부와 관계된 일일 텐데 끝까지 얘기 안 할 것 같은 불길한 느낌만 드네.”
모르는 놈들끼리 백날 머리 맞대 봐야 제자리만 돌 뿐이었다. 일단 구석으로 밀어 놓고 가급적 떠올리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았다.
김지훈이 탁탁 손뼉을 쳤다.
“할 일 하자고.”
“난 재단 이사들 만나 무리한 확장 시도를 막아 볼 테니까, 너도 훈철 형님, 정호 형님과 얘기 잘해. 이왕이면 형님들 감을 자극하면 더 좋고.”
‘자식! 나보다 더 친한 것 같네.’
김지훈이 입맛만 다셨다.
어쨌든 전문 병원을 비롯해 산하 병원이 회오리 속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당장은 막연하게 움직여야 하지만 목표는 명확했다.
재단과 병원을 사수해야 했다.
그것이 곧 생이 걸린 수많은 환자와 병원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의료진과 직원의 미래를 담보하는 길이었다.
퇴근을 한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고경아가 강의 준비에 열중하고 있었다.
희연이 밥 먹이고, 집안 정리까지 어느 정도 끝낸 후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희연아, 아빠하고 놀자.”
“조금 있으면 잘 시간인데 놀긴 뭘 놀아요?”
‘무슨 귀가 이렇게 밝아? 집중한 게 아니었나?’
흠칫 놀란 김지훈이 서둘러 남겨진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희연이와 침묵의 놀이를 시작했다. 재밌으면 무한 체력을 보이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였다. 급격하게 피곤해진 김지훈이 자자고 사정한 끝에야 누울 수 있었다.
희연이의 손이 따스했다.
손일석도 정훈이의 손을 잡고 있을 것이다.
‘자식! 너도 이럴 때가 제일 행복하지?’
복잡했던 머릿속이 단순해지며 행복한 기운이 마구마구 밀려왔다. 때론 불만도 있지만 가족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 분명했다.
툭하면 신현수의 퇴근 시간이 빨라졌다.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재단 이사들과의 접촉 때문이었다. 기분 좋게 출근하는 날보다 안색이 어두운 날이 훨씬 많아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우호적이었던 분들도 말이 안 통해?”
“진상건이 내세운 명분이 통하고 있어. 침체된 병원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부분 확장과 이전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데 동의하는 이사들이 많아.”
“문제는 진상건의 의도에 재정이잖아?”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는 분위기야. 이사장이 져야 하는 책임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믿는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알면서 말을 돌리는 건지 모르는 건지 구분하는 것조차 힘들어. 두 분 정도만 우리 생각과 같아.”
확실한 소수였다.
진상건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최소 세 명을 더 확보해야 했다. 순간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문 병원의 운영이사임을 내세워 재단 이사와 접촉을 시도했다간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었다.
주제 모른다는 소리만 들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심 지금도 화가 나는데 얼굴 보면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김지훈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이 부분만큼은 전적으로 신현수에게 달린 일이었다.
‘이사라는 사람들이 진상건의 의도를 모를 수 없을 텐데, 막말로 뭘 얼마나 받아 처먹은 거야? 나쁜 놈들! 현수 네가 정말 힘들겠다.’
“내가 도울 방법이 없을까?”
“너무 걱정하지 마. 부분 확장은 물론 이전까지 이미 물밑 작업이 시작됐다는 사실은 확실하지만 이사회 개최 날짜도 정해지지 않았어. 민 부원장과 내가 최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으니까 그때까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관건은 진상건의 계획이 결코 병원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증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동조하는 이사들이 찍소리도 못 내게 할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객관적 물증이 없다면 구체적 정황이라도 잡아내야 했다.
이 또한 김지훈의 일이 아니었다.
신현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런 일까지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다. 넌 일단 우리 병원 분위기 다잡아 주고, 진료에만 집중해.”
“미안하긴!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지. 난 형님들에게 다시 연락해 볼게. 요새 무슨 일이 있는지 통화하기 정말 힘드네.”
항상 원해 온 일이었지만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면 된다는 사실이 결코 편하지만은 않았다. 정훈철, 서정호의 목소리조차 듣기 힘들어 더욱 답답했다.
간신히 연결됐다.
(김 과장, 요즘 회사 내에 비상이 걸려서 시간을 내기 어렵다. 미안해.)
서정호와 몇 마디 나누지도 못했다.
(후우! 제수씨하고 희연이도 보고 싶은데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 이게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라서 당분간 만나기 힘들 것 같아. 선천성 질환 아이 치료는 담당 PD하고 잘 상의해서 진행하면 돼. 첫 방송 책임지고 깔끔하게 제작한 친구니까 걱정하지 마.)
정훈철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든든한 배경이자 진상건을 실질적으로 조사하거나 압박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상황조차 말하지 못했다. 당연히 신현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런데 민정호는 눈빛만 굳힐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일단 연락 오길 기다리시죠.”
“먼저 연락할 분위기가 아닌데요.”
“상황이 항상 똑같겠습니까? 짐작일 뿐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희망적일 수도 있습니다.”
‘통화도 하기 힘들 정도로 형님들 바쁜 거랑 희망하고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야?’
뜻 모를 소리뿐이었다.
째깍! 째깍!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금방이라도 열릴 것 같았던 재단 이사회 일정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진상건은 차근차근 계획을 실행하고 있을 것이다. 설상가상 신현수와 민정호도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해 불안이 가중됐다.
여느 때와 똑같은 하루였다.
김지훈이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뜻밖에도 최태우 의원이었다.
간 이식을 받은 동생을 정기적으로 진료하는 동안에도 사적으로 연락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별다른 문제가 없는 덕이겠지만 최태우 의원의 처신이나 자기 관리일 수도 있었다. 만에 하나 진상건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민정호와 먼저 통화했을 것이다.
“웬일이십니까?”
(바쁘실 텐데 미안합니다. 다름 아니라 동료 의원의 따님인데 쓸개에 혹이 있다고 해서 전화했습니다. 과장님 원칙은 잘 알지만 믿고 맡길 수 있는 의사가 꼭 필요하다고 하면서 어찌나 걱정을 하던지 과장님을 소개했습니다. 권철 위원님을 아시죠? 그분도 적극 추천하시더군요. 이름이 정유미라고 하니까 잘 봐주십시오.)
“질환명은 아십니까?”
(암은 아니라고 하는데 수술이 무척 어려운 상황이라고 들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시간 되시면 밥 한 끼 사겠습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민 부원장과 함께 보시죠.)
통화를 끝낸 김지훈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세상은 정말 얽히고설켰다.
정치인과의 인연이 이어질 줄은 몰랐다.
특별히 도움받을 일이 없는 직업이고, 청탁이나 부탁을 할 마음도 없었다. 반면 환자와 보호자를 차별해서는 안 되지만 유력한 정치인부터 강직한 장성 출신 군인까지 자신을 추천했다니 싫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무슨 이유인지 치료와 큰 관계가 없는 민정호까지 자연스럽게 언급했다.
‘민 부원장 말보다 친분이 더 깊나? 희한하네. 하지만 담낭 양성 종양이라면 경석이 형이 수술하는 게 맞잖아. 어쩌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 눈 딱 감고 내가 수술해. 아니야. 원칙을 깨면 결국 손해가 되기 마련이야. 후우! 한 번만 예외로?’
고민을 거듭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 나갔다.
환자를 보지도 않고 주변 상황부터 생각하다니, 정신 번쩍 나게 두들겨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누가 수술해야 하는지보다 담낭의 혹을 왜 수술하기 어려운지부터 고민하는 것이 마땅했다. 이름난 의사들이 많은데 추천을 받은 이유도 그 때문이 분명했다.
‘암이 아니라면 용종일 테고, 라파로로 담낭 절제술을 하면 간단하게 끝나는 수술인데 뭐가 어렵다는 걸까?’
의아함에 젖어드는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민정호였다.
김지훈의 성격과 환자를 대하는 태도를 잘 아는 최태우 의원이 안전장치 중 하나로 연락했을 것이다. 그만큼 친분이 있는 동료 의원이라는 말일 수도 있었다.
“전화받으셨습니까?”
“받았습니다.”
“과장님께서 직접 수술하셔야 합니다.”
단도직입적 말에 도리어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전화로 듣든 직접 듣든 누군가의 부탁이었고, 지극히 경계해야 할 일이 분명했다.
“질환이나 환자 상태에 따라 결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나 인연으로 다른 파트 수술까지 하다 보면 결국 내가 맡은 분야에 소홀해지게 될 겁니다. 환자의 믿음을 저버리는 꼴이고요.”
“항상 강조하셔서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번은 반드시 예외를 적용해야 합니다. 사소한 일로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데, 고급 정보를 쥐고 있는 최태우 의원님만이 아니라 다른 의원님과도 인연을 쌓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진상건 이사장 문제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병원을 위한 일이라고 믿고 있지만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겁니까? 내용은 지금도 비밀입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일개 병원 행정부원장이 입에 담을 정보가 아닙니다. 입 한 번 삐끗하면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재앙이라니? 도대체 무슨 정보기에 단 한마디도 못하는 거야?’
“도움이 된다고 확신합니까?”
“바랄 뿐입니다.”
김지훈이 날카로운 눈으로 민정호를 보았다.
틀린 말 아니었다.
인연이 쌓이면 쌓일수록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아지기 마련이었다. 사실 김지훈 자신이 수술한다면 무시하기 힘든 인연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환자 치료가 핵심인 이상 이경석이 수술한다고 해서 크게 불리할 것도 없었다.
원칙은 지킬 때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었다.
“난 인연보다 신뢰를 선택하겠습니다. 환자와 보호자가 정말 원하는 의사는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소개받은 의사가 아닌 자신의 병을 가장 잘 치료할 수 있는 전문가일 겁니다. 그렇게 믿고 날 찾아올 텐데 어느 쪽이 더 적절한 선택일까요?”
“과장님의 라파로 실력을 모르는 의료진은 없습니다. 같은 실력이라면 환자는 과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의사를 더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실력 평가는 우리가 합니다.”
민정호의 눈가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환자 문제에 있어서는 가히 철벽이라 할 만큼 원칙을 견지하는 김지훈이었고, 지금 역시 조금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경석 선생님의 분야가 확실하면 집도는 힘들지만 수술을 같이할 수는 있습니다.”
그나마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비록 한 번도 내색을 안 했지만 이런 면 때문에 김지훈을 존경하고,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내가 계약에 목을 매듯 과장님도 환자에 목을 매는 거겠지. 그래. 맞는 말이다. 자신의 원칙을 스스로 파기하기 시작하면 언젠가 실수하기 마련이다.’
민정호가 미련 없이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내일 오후에 진료 예약이 돼 있습니다. 어떤 분이 수술할지 결정되면 알려 주십시오. 아무런 문제 없이 치료가 끝나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만!”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고지식한 것은 아닐까?
꽉 막혀 도리어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여러 걱정이 스쳤지만 스승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지만 환자에게는 결코 적용할 수 없는 말이었다.
신뢰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가치였다.
우월한 지위나 권력, 돈을 가진 특정 환자나 보호자가 아닌 전문 병원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말이다.
다음 날 오후.
정유미 환자가 보호자와 함께 내원했다.
27살이었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엇이 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