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68화 (1,168/1,329)

14화

‘평생 근무했던 H 병원에서 그토록 원했던 일을 여기서 이루다니, 세상일 참 모르겠네.’

“진 교수, 믿는다.”

“손 교수와 함께 잘 이끌어 주십시오. 서도진 선생과 강병옥 선생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 잘 아시죠? 파트장이 되신 것을 알리는 일도 선생님 몫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술이라도 한잔해야 하는 날이었지만 일이 있을 때마다 술을 마시면 거의 매일 마셔야 할 것이다. 김지훈이 아쉬움을 달래며 자리를 끝냈다.

“늦었습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끝내죠. 선생님,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고했다.”

딱 한마디만 던졌다.

이준영 교수가 곧바로 퇴근했다.

젊은 사람끼리 한잔하라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성격은 정말 변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손일석이 웃었다.

“원장님 같았으면 일장 연설에 무한 반복을 하셨을 텐데, 참 안 변하시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인가?”

“그런가 보네. 일석아, 서운한 건 아니지?”

“수신제가평천하라는 말 몰라? 현재 수신은 되는데 제가가 안 되네. 아들하고 보낼 시간이 필요해. 희연이하고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잖아. 진충기 선생님, 내일 뵙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일간 술 살게.”

“짧고 굵게 부탁드립니다.”

김지훈이 가슴을 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의료진과 자신의 업무에 충실한 직원들의 마음까지 하나가 된다면 어떤 목표도 이룰 수 있을 것이란 자신이 생겼다.

‘같은 진씨인데 참 다르네.’

진상건이 지랄발광을 해도 말이다.

진충기 교수의 능력은 대단했다.

업무가 손에 익을 시간 따위는 필요도 없는 것처럼 빠르게 간 이식 파트를 이끌어 나갔다. 서도진과 강병옥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새로운 활력의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세상사 뜻대로만 되지 않았다.

같은 일을 두고 보는 시각이 같을 수도 없었다.

새로운 파트장을 정해 활력을 일으켰지만 간 이식 수술 팀을 늘려 달라는 민정호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졌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할 때마다 이를 인정하면서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내심 무엇 때문인지 짐작이 됐다.

신현수와 함께 모였다.

“민 부원장님, 왜 이렇게 초조해 보여요? 설마 또 다른 문제가 생긴 겁니까?”

“서울 병원 부분 확장은 이미 확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천안 병원 이전까지 거론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전이요?”

김지훈이 끙 소리를 내고 말았다.

개원한 지 오래된 병원이었다.

건물도 낡았지만 진입로까지 좁고 복잡해 예전부터 이전의 필요성이 대두되곤 했었다. 자금 사정이 좋고, 병원 유지에 문제가 없다면 누구나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현재 병원 전체 상황을 보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서울 병원 부분 확장에 천안 병원 이전까지 하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할 텐데 가능한 일입니까? 신 교수, 천안 병원 상황도 좋지 않다며?”

“그게 핵심이야. 재정 상황이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는데 무리하게 추진하다간 산하 병원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어. 지금으로서는 절대 시도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결국 그 돈도 재단에서 나와야 할 텐데, 이사장을 맡고 있는 사람에게 이득이 되나? 빚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진상건이 원하는 땅을 얻어도 손에 쥐는 게 없는 거 아니야?”

민정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득이 되고도 남습니다. 땅이라는 게 한정된 재화기 때문에 개발이나 대규모 구입 소문만 나도 크게 오르기 마련입이다. 민간사업은 변동 폭이 훨씬 더 큽니다. 당연히 비밀리에 추진해야 하는데 이미 말이 샜습니다. 제 귀에까지 들렸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까요?”

“그래서요?”

“여기서 바로 투기가 발생하게 됩니다. 사전에 정보를 얻은 사람이 무엇을 할까요? 본인이 사기 힘들면 친척이든 뭐든 차명을 이용해서라도 미리 땅을 사 두는 거죠.”

“진상건이 예정 부지의 땅을 매입했다, 이겁니까?”

“돈에 관해서는 정말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사람입니다. 거의 100퍼센트라고 봅니다.”

“미리 싸게 산 후 비싼 값에 재단에 팔아넘긴다면 결국 재단 자금을 빼돌리는 일인데 당장 고소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차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진상건 이사장이 누구 이름을 이용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중 삼중으로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겼을 겁니다. 게다가 구입 시점도 문제입니다. 만일 이사장 취임 전부터 계획했다면…….”

민정호마저 말끝을 흐렸다.

답답한 한숨이 터졌다.

진상건의 의도가 눈에 빤히 보였다.

토지 구입 계획을 세운다.

사전에 확보 가능한 땅을 비밀리에 사들인다.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바로 땅값이 뛸 테고, 재단이 공식적으로 계획을 확정하는 순간 더 상승하게 된다. 따라서 구입 직전까지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마땅하건만 이미 소문이 퍼졌다.

이미 땅을 샀다는 말이었다.

이후의 일은 불을 보듯 명확했다.

미리 사 둔 땅을 오를 대로 오른 값으로 팔면 재단 재정은 휘청휘청 흔들리게 되지만 진상건은 도리어 이득을 얻게 될 것이다. 이를 기회로 재단 소유인 전문 병원의 애초 부지를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면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다.

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병원과 직원들의 생존을 위해 적립한 재단의 돈을 이용해 엄청난 돈을 손에 쥐는 것이다. 단 한 명, 혹은 그에게 동조하는 몇몇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김지훈이 이마를 닦았다.

‘호사다마라더니, 지금이 딱 그 꼴이네.’

끝을 모르는 인간의 욕심 앞에 분노보다 두려움이 느껴져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최선의 방법은 사전에 방지하는 것뿐이었다.

“신 교수, 이사회에 위험성을 알리면 무리한 확장 반대에 동조하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 펠로우 문제도 그렇게 해결했잖아.”

“꾸준히 접촉하고 있는데 이번은 경우가 달라. 막대한 돈 앞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구나 찬반 동수가 나온다면 이사장이 전결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정관까지 개정한 상태야.”

“진상건이 이사의 반만 확보하면 된다는 말이네. 두 눈 멀쩡히 뜨고 당해야 하는 거야? 정관 개정처럼 중요한 일을 두고 그동안 뭐 했어?”

애꿎은 타박이었다.

“이사 전원이 참석해야 가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기존 정관에 위배된 결정도 아니었어. 나도 답답하다.”

민정호가 눈가를 굳혔다.

티가 날 정도였다.

“우리가 불리하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재단 이사 문제는 신 교수님이 끝까지 담당해 설두해 주십시오. 무엇보다 우리 병원이 가진 자금이 없으면 막을 수 있는 일도 막지 못합니다. 과장님은 병원 능력이 허용하는 선까지 최대한 수입을 늘려 주셔야 합니다.”

“이미 하고 있는 일입니다. 누차 얘기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아요. 다른 대책은 없습니까?”

민정호의 눈이 번쩍였다.

“완벽한 계획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 역시 비용 부분을 최대한 아끼는 일에 전념해야 하지만 당분간 외부 활동이 많아질 것 같습니다. 혹시 병원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지더라도 양해해 주십시오.”

행정 부분이 상당히 안정된 이상 일반적인 경우라면 민정호의 일시 부재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무엇을 할지 알아야 했다.

“진상건에 대한 정보를 더 얻을 생각입니까?”

“필요한 정보는 모두 모아야죠. 진상건의 계획에 가세한 사람이 많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야 잡을 수 있는 단서가 많을 테니까요. 혹시 몰라 하는 말인데, 김 과장님께서 하셔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말만 하세요.”

“정훈철 국장님, 서정호 검사님과 자주 연락을 취해 주십시오. 분위기가 괜찮다면 진상건 이사장에 대해 언급해 주면 더 좋습니다.”

사회적 영향력이 막대한 언론과 검찰에 밑밥을 깔아 달라는 말이었다. 단순히 분위기를 띄우는 정도라면 예전부터 가능한 일이었다.

절대 근거 없이 움직일 민정호가 아니었다.

‘뭔가 확실한 한 방이 있는 건가?’

김지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현수도 안경을 고쳐 썼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확실하게 알아야 했다.

“언론과 검찰에 알릴 정도면 이미 상당한 정보를 얻었다는 말 아닙니까? 우리 사이에 비밀이 있어 좋을 일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갖고 있는 정보가 적지 않습니다만, 문제는 진위입니다. 진상건 이사장은 적이 많은 사람입니다. 악의적인 소문이나 낭설로 의심돼도 다 수집한 탓에 어떤 내용이 결정적인지 판단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 문제는 검찰이 확인해야 할 일 아닙니까?”

“김 과장님, 신 교수님, 진상건 이사장이 왜 지금까지 건재할까요? 병원 재단 이사장을 넘어선 거물이자 무척 용의주도한 사람입니다. 더욱이 배임이나 횡령 같은 혐의는 노련한 검사도 입증하기 어려운 범죄입니다. 웬만한 정보로는 막강한 변호인단을 동원해 구속은커녕 소환 조사도 어려울 수 있습니다.”

흔히 보는 일이었다.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나 거대한 법률 사무소를 이용해 무죄방면을 받거나, 유죄로 인정돼도 집행유예 따위로 실형을 면하는 광경을 숱하게 보았다.

물론 법과 국민감정 사이의 괴리, 혹은 애매모호하거나 무리하게 혐의를 적용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공연히 나온 것도 아니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민 부원장님, 능력이나 인맥이 아무리 막강해도 정보 수집부터 한계가 있을 텐데, 그 말대로라면 정보를 줘도 소용없다는 말이잖아요?”

“지금까지 벌어져 온 일들을 보면 누가 봐도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정보가 없는 한 진상건 이사장을 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은 항상 유동적이죠. 오늘은 무죄여도 내일은 유죄가 될 수 있습니다.”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시기가 관건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법 집행 의지가 강해진다면 범죄자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더욱 좁아지지 않겠습니까? 반대라면 도리어 제보자가 위험해질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김지훈이 인상을 썼다.

“설마 서정호 검사님의 의지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겠죠? 누구보다 강직한 분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말씀드린 거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한계라니요?”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을 수사할 때 외부와 내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검사 한 명의 의지와 검찰 전체의 의지 중 어느 것이 더 강력하겠습니까?”

점점 더 오리무중이었다.

민정호에게 검찰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이나 배경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 정도 권력을 가진 자는 정치권 최상부에 있는 이들뿐이었다.

그것도 집권 세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순간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인맥을 입에 달고 사는 민정호에게 정치권 인사는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생각까지 스쳤다. 아마도 끈을 유지하게 위해 더욱 공을 들였을 것이다. 동시에 무엇인가 파급력이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최태우 의원?”

“맞습니다. 필요하다면 이젠 집권 여당의 국방위원이신 권철 장군님까지 만나야 합니다.”

“권철 장군은 누구예요?”

“그분은 김 과장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계시던데, 총기 사고로 옷을 벗으신 분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여하튼 두 분 모두 도움이 될 분들입니다.”

“청탁이라도 하겠다는 말입니까?”

민정호가 눈가를 문질렀다.

“청탁이 가능할 정도로 강한 인맥이길 바랍니다만, 아쉽게도 가끔 찾아봬 인사만 드리는 관계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두 분의 입에서 은연중 나오는 정보죠.”

김지훈과 신현수가 동시에 입을 벌렸다.

아무리 인맥을 중시해도 동생, 그리고 휘하 병사가 수술한 병원의 행정부원장이란 인연밖에 없는 상황에서 거물 정치인들과 교류를 지속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어쩌면 민정호의 능력이 상상 이상이거나 감추고 있는 비밀이 있는지도 몰랐다.

‘사적인 일은 입에 담지도 않는 이유가 따로 있었나? 그래도 그렇지,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의문이 꼬리를 이었다.

“얻고자 하는 정보가 뭐죠?”

“두 분을 믿지만 절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제 입을 의심하게 될 일이 벌어지면 가장 중요한 인맥을 잃는 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진상건 이사장의 귀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아야 하고요.”

“우리를 믿는다면 앞뒤가 안 맞잖아요?”

“만일 사실로 확인되면 사회적 파장이 대단할 겁니다. 그런 정보를 발설했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누가 뒷감당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머릿속에만 담아 놓고, 은밀하게 대비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결정적인 부분에서 턱 막혔다.

답답해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민정호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당장 주어진 일을 하며, 변동 사항이 생기는 즉시 자리를 갖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럼 이만!”

민정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동시에 눈가를 좁혔다.

언젠가 때가 온다는 말이 스쳤다.

한편으로 민정호가 전문 병원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만일 진상건과의 계약이 파기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복잡한 감정이 방 안을 맴돌았지만 결코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의료 외적인 일임에도 김지훈과 신현수 모두 일정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었다.

희망은 여전히 유효한 단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