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평범한 사람을 결코 평범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말이 가슴 깊숙이 다가왔다. 사인방이라 불리며 전문 병원의 핵심 축인 이경석이 무한한 믿음을 주는데 스스로를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나종진이 웃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일 것이다.
신세 한탄이나 하며 제자리에 머무는 사람과 한 발이라도 내디디려 노력하는 사람이 각기 만들 수 있는 결과가 어떨지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노력이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실패한 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오뚝이 같은 인생 결코 지나가는 말만은 아닐 것이다.
기쁜 일이 연이어 터졌다.
드디어 국제 학회에 논문이 실렸다.
자랑스러운 일이기에 오히려 더욱 큰 짐이 어깨에 걸렸다. 결코 일회성으로 끝낼 수 없는 일이었고, 후배들과 함께 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었다.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얼마든지 제공할 테니까, 내년에는 각자 한 편씩 올릴 수 있도록 다들 노력하자.”
무엇보다 반가운 일은 정식으로 조카 한 명이 더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수술해 건강을 되찾은 조카를 보는 김지훈의 눈빛이 유달리 애틋했다.
“이름이 정훈이라고?”
“바를 정(正) 자 썼다. 건강은 우리 김 과장이 책임질 거니까 정직하고, 매사 당당한 아이로 키워야지.”
“밤에 안 울어?”
“와이프 품이 좋은지, 원래 순한 건지 몰라도 잘 자. 그동안 못 먹어서 그런지 엄청 먹어. 체중 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정도야.”
손일석의 얼굴이 무척 편해 보였다.
문득 존경할 수밖에 없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양부터 시작해 선천성 질환까지 이유야 널리고 널렸지만 웬만한 사람은 어느 하나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희연이가 정훈이 보고 싶다고 떼쓰는 거 알지? 나도 시간 나면 놀러 갈 테니까 자주 놀러 와.”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우리가? 와이프들끼리 얘기가 돼야지.”
맞는 말이었다.
고경아와 고경희를 믿으면 되는 일이었다.
즐겁고 기쁜 일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나 온갖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었다. 이기고 지고는 결국 자신에게 달렸고, 능동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전문 병원의 발전은 멈추지 않았다.
복강경 수술과 췌장 부분은 수도권 서부 지역을 대표하는 병원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특히 간 질환 및 간 이식 파트의 성장은 눈부실 정도였다.
한 주 내내 수술실이 붐비지 않는 날이 없었지만 예약 환자 수나 대기 기간은 줄어들지 않았다. 제때 신관 건립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진료 공간마저 부족한 상황에 이르렀을 것이다.
모든 의료진과 직원이 흘린 땀의 결과였다.
가히 폭풍적인 외형의 성장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숨은 질적 변화는 상상 이상이었고, 외형적 성장의 기반이자 결과이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는 예정된 일이었다.
우선 대가라 불리는 이준영 교수가 있다.
부원장직을 내려놓은 후 간암과 공여자 수술에 더욱 집중해 환자와의 접촉을 크게 늘렸다. 오래전부터 명의로 알려졌기에 환자가 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병원 운영까지 맡고 있건만 신현수의 야심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누구보다 먼저 대가로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현수야, 살살 하자.’
두 번째로 김지훈은 이미 검증된 써전이었다.
간 이식과 췌장에 집중하는 한편 학회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아,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료계와 환자들 사이에 상당한 명성을 쌓았다.
무엇보다 세 번째 요소가 중요했다.
어떤 분야도 한두 사람의 힘에 의존하면 결국 한계를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가장 핵심적인 이유일 수도 있었다.
바로 손일석, 서도진, 강병옥을 비롯해 어느 병원보다 강하고 능력 있는 써전들의 존재였다. 더구나 개원 초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숙련돼 웬만한 병원이었다면 간 이식 주임 교수를 맡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덕분에 여유까지 얻어 정말 고맙다.’
여기에 기폭제마저 터졌다.
방송의 힘은 언제나 무서웠다.
정훈철은 약속을 확실하게 지켰다.
선천성 질환을 가진 아이들의 특집 방송이 방영되며 자연스럽게 전문 병원의 존재를 전국에 알렸다. 우연이자 필연일 수밖에 없는 이혁원과 강은미의 소아 외과 개설이 겹치며 강한 상승효과까지 유발했다.
‘고맙지 않은 사람이 없네.’
“형님, 감사합니다.”
(계약대로 하는 것뿐이야. 남은 기간 동안 마음 변하지 말고 아이들 책임져. 아! 그리고 앞으로 이혁원 선생에게 수술 맡길 생각이야?)
“확실한 써전이고, 어려운 수술은 제가 함께할 겁니다. 설마 엉뚱한 말이 나오는 건 아니죠?”
(벌써부터 보호자 사이에서 무지하게 좋은 선생님이라고 말이 나왔단다. 시간 되는 대로 이준영 선생님과 식사 함께하자.)
김지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보호자들의 반응이 기쁘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이혁원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폭제는 하나가 아니었다.
마치 마지막 카드처럼 전문 병원에 합류한 진충기 교수 역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애초 S 병원에 김지훈이 있다면 H 병원에는 진충기가 있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존재감을 갖고 있던 써전이었다.
그런 써전이 대가인 이준영 교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김지훈과 한 병원에서 같은 수술을 하니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지는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진충기 선생님 같은 써전은 어느 병원에서도 보기 힘들다. 직원들 사이의 평판도 무척 좋고, 이젠 우리나 선생님이나 서로 매사를 논의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처음부터 같이한 사람처럼 전문 병원에 녹아든 진충기 교수를 보며 김지훈이 고민에 빠졌다. 스스로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한 명의 의사, 아빠, 이모부, 사위, 선배 등 인간관계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었다. 과장이자 운영이사라는 직함은 시간이 흐른다 해서 가벼워질 수도 없었다.
고민 끝에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상당 시간 대화를 나눴다.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결정했으면 동의한다. 휘플 라파로 준비는 잘되고 있어?”
“아무래도 서도훈 선생에게 술을 얻어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름 노력하는데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저도 스승님처럼 환자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넌 나와 모든 것이 달라. 아직 일러.”
이준영 교수는 단호했다.
‘그 마음 절대 잊지 말기를 바란다.’
의사의 기본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겠지만 요구되는 능력은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문 병원의 상황은 김지훈을 대체할 사람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한동안 접어야 할 생각이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오늘도 시간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각자 따로 상의해야 할 일이지만 스승님 앞에서 같이 논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입장 곤란해질 수도 있는데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어. 스승님도 이 정도 일은 하셔야지. 도와주세요. 하하하!’
“스승님, 진충기 선생과 손일석 선생을 부르겠습니다. 당장 결론이 안 나더라도 스승님이 계신 자리에서 함께 상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너희끼리 상의해도 될 일이야.”
“스승님이 부원장을 그만두신 이후로 일이 더 많아져서 각각 만나 얘기할 정도로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외과 내부의 일과 부원장이 무슨 상관일까?
얼토당토않은 말에 이준영 교수가 움찔거리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들어 김지훈과 커피 한 잔 같이할 시간조차 없었다. 다들 바쁘니 당연한 일이지만 가끔은 이런 일을 핑계로 함께해도 좋을 것이다.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가 들어왔다.
“다들 앉아.”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이준영 교수가 눈길을 주었다.
김지훈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간 이식 파트 확장 이후 환자가 더 늘어 굉장히 중요한 시기인데 과장에 운영이사까지 맡아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두 분 중 한 분이 간 이식 파트장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파트장을요?”
진충기 교수가 깜짝 놀랐다.
파트장은 절대 형식적인 직함이 아니었다.
구성원 전체를 이끌어 조율하고, 환자 배분과 수술 일정까지 맡아 사실상 가장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였다. 오히려 외과 전체 문제에 관여하는 과장보다 영향력이 더 클 수도 있었다.
“그렇습니다.”
김지훈은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자리 욕심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탐나는 제안이었다. 더욱이 다른 파트도 아닌 전문 병원을 대표하는 간 이식 파트의 장은 명예까지 보장하는 자리였다.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후보가 될 두 사람을 동시에 부른 이유가 있었다. 서로를 굴러 들어온 돌과 이미 박혀 있는 돌로 보며 자신의 입장만 내세우면 그보다 꼴사나운 일도 없을 것이다.
진충기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제가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 적응을 한 상태고, 오늘도 손 교수에게 혈관 수술 배웠습니다. 어느 면으로 봐도 손 교수가 적임자입니다.”
“어이쿠! 무슨 말씀이세요? 도리어 제가 배우고 있습니다. 전 안 됩니다. 김 과장, 알잖아? 지금은 집안일에 바짝 신경 써야 할 때야. 우리 아들 인생이 걸렸어.”
“손 교수, 사정은 알지만 능력이 되는데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야. 누구는 집안일 없어?”
“왜 이러세요? H 병원에서 과장까지 하셨으면서 이러시면 안 되죠. 툭하면 아들 걱정을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파트장을 합니까?”
“설마 나이 때문에 그러는 거야?”
“이경석 선생님한테도 양보할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전 못합니다. 선생님이 먼저 하세요.”
김지훈이 살짝 당황했다.
서로 안 하겠다고 목소리까지 높였다. 먼저 나서기 계면쩍어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자연스럽게 말을 올리고 낮추는 것으로 보아 인간적으로 친해진 지 꽤 된 모양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친해 보여?’
아무리 넉살 좋은 손일석이라지만 진충기 교수가 마음을 열지 않았거나, 열었다 해도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의미에서 보면 대단히 잘된 일이었다. 껄끄러움이나 앙금을 남기지 않기 위해 동시에 둘을 부른 일도 기우에 불과했다.
“둘 다 그만하시죠. 선생님, 어떠십니까?”
“내 의견은 이미 말했다.”
‘과장으로서 네가 정하면 돼.’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스승님, 도와달라는 말이잖아요. 왜 스승님과 같이 만나는지 이유를 정말 모르세요? 이 상황이 얼마나 곤란한지 잘 아시잖아요?’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스승이 정리를 해 줄 것이란 기대가 무참히 무너졌다. 둘 다 자격이 차고 넘치는 데다 과장이라지만 모든 조건이 비슷비슷해 지명을 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미루면 영영 결정하지 못할 것이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그럼 과장으로서 결정하면 되겠습니까? 어떤 결정을 해도 이의 없겠죠?”
“과장님이 결정하는 것이 맞습니다.”
“김 과장, 나도 동의해.”
심각한 와중에 웃음이 터졌다.
‘진충기 선생님은 존댓말, 일석이는 반말. 내가 위야, 아래야? 오창도 선생님도 그렇고, H 병원 출신 선생님들만 있으면 족보가 꼬이네.’
덕분에 부담을 줄였다.
신중하게 고민했다.
각자 처한 상황이 아니라 누가 더 적임자인지만 생각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지만 어쩌면 이미 결정하고 불렀는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진충기 교수를 보았다.
“파트장을 맡아 주십시오.”
“제가요?”
“저나 손 교수는 S 병원의 체계만 알고 있습니다. 전문 병원도 크게 다르지 않고요. 선생님께서 그동안 쌓아 온 경험을 얻고 싶습니다.”
“아! 그러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으려면 넓은 세상으로 나가거나, 외부 피를 수혈하는 게 맞지. 김 과장, 탁월한 선택이야.”
진충기 교수가 머뭇거렸다.
하루라도 빨리 전문 병원의 일원이 되기를 바랐고, 처지에 맞게 행동해 왔지만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간 이식의 두 번째 수술 팀을 맡게 됐을 때도 당황스럽긴 했다. 이번 일로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인정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손 교수, 괜찮겠어?”
“당연한 결정입니다. 하지만 방심하지 마세요. 간 이식 파트장과 과장 자리를 모두 노리고 있습니다.”
“손 교수, 고마워. 긴장 풀지 않을게. 과장님, 이준영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로써 새로운 간 이식 파트장이 결정됐다.
권한보다 더 큰 책임이 주어질 뿐 명패를 주는 것도 월급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었지만, 진충기 교수가 간 이식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