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66화 (1,166/1,329)

12화

순조로운 나날이었다.

아이는 빠르게 회복됐다.

물에 이어 분유를 시작한 후 변까지 보았다. 아마도 태어나 처음으로 다른 아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고통 없이 변을 보았을 것이다.

“으앙! 으앙!”

“처제, 귀청이 떨어질 것 같다. 이제는 품에서 떨어지질 않네. 힘찬 건 좋은데 고생 좀 하겠어.”

고경희의 얼굴도 많이 편해졌다.

모처럼 식구 대부분이 모여 주말을 함께했다. 고경희가 빠져 서운했지만 다음에는 식구 한 명이 더 늘 테니 즐거움도 배가 될 것이다.

월요일 아침.

김지훈이 장인어른의 날카로운 눈길 속에 간 이식 수술을 시작했다. 도중 몇 번이나 자리를 비웠지만 결국 열 시간 내내 수술을 지켜보았다.

대단한 체력이자 열정이었다.

김지훈에겐 상당히 뿌듯한 날이었다.

보고 배울 수 있는 어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자신만의 세계, 혹은 어려서부터 머리에 박힌 가치가 모든 것인 양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면 어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런 면에서 손일석과 고경희에게도 배울 점이 많았다. 어쩌면 김지훈도 틀에 박힌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잘 키워. 이젠 며칠만 더 지나면 너희 집에서 조카를 보겠네.’

한 아이로 인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 날들이었다.

그 즈음, 진상건과 김병오 이사가 만났다.

뭔가 찜찜한 듯 불안한 구석에 어딘지 모르게 만족해하는 기색이 뒤섞였다. 여러 일을 벌이고 있는 탓이었지만 같은 목적으로 만났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었다.

진상건이 김병오 이사를 보았다.

“연속 흑자를 내다니 전문 병원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군요.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브로커까지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썼는데 대응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민정호도 문제지만 의료진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이 병원을 관리하신 경력을 믿고 맡겼는데 김 이사님의 능력을 벗어났다는 말입니까? 실망입니다.”

김병오 이사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걸림돌이 될 신현수의 동태는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이사들의 생각까지 더욱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피아를 확실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실수가 아니라 어리석은 겁니다. 중요한 일을 같이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진상건의 눈이 가늘어졌다.

“두고 보겠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신현수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면 안 됩니다. 전문 병원이 신경 쓸 수밖에 없는 문제를 계속 만들어 던지세요. 그건 그렇고, 진행 상황은 어떻습니까?”

“간접적인 부분까지 합하면 서울 병원 확장 대상 부지의 70퍼센트를 확보했습니다. 취임하신 직후부터 차근차근 준비했기 때문에 처음 책정했던 예산 범위를 넘지 않았습니다.”

‘취임 직후? 그때 시작했으면 이미 늦었지. 능력은 그저 그래도 시류는 읽을 줄 알았는데 별반 차이가 없군. 그래서 내가 당신을 이용하기 좋아.’

“잘됐군요. 이런 일일수록 깔끔해야 합니다. 우리 이사님들 몫은 확실하게 보장했겠죠?”

“말씀하신 대로 정확하게 배분했습니다. 대부분 못 이기는 척하며 구입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문제는 천안 병원 이전 부지입니다. 시유지 30퍼센트를 더해도 절반 정도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땅은 상신개발이란 회사가 대부분 소유하고 있는데, 자체 개발 계획을 갖고 있어 협상이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진상건이 눈가를 찌푸렸다.

“상신개발이란 회사가 절반 가까운 땅을 소유하고 있다고요? 예정 부지를 바꿀 수는 없습니까?”

“이미 구입을 한 땅도 문제지만 그만한 입지를 가진 땅이 없습니다. 다른 부지를 제안하면 이사회를 통과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알량한 자존심이겠지만 무시하기 어려운 감정이긴 합니다. 어쨌든 들어 본 적이 없는 회사인 걸 보니 규모가 크지 않을 테지만 의외의 변수군요. 골치 아프게 됐지만 그쪽 방면에 잘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관계자들과 연락해 연결시켜 드릴 테니 상의한 후 적당한 선에서 합의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동안 전 시 관계자들과 만나 최대한 지원을 이끌어 내겠습니다. 지역 개발 차원까지 강조하면 큰 무리 없을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김 이사님이 제일 고생 많으십니다. 고맙기도 하고, 확장과 이전 모두 병원 발전을 위한 일이자 일종의 투자인데 함께 득을 봐야죠. 기존 약속 이외에 특별히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김병오 이사가 입을 열지 않았다.

진상건의 입가가 말렸다.

‘이미 챙길 건 다 챙겼군. 한 번 발을 들인 이상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겠지?’

불법적인 일일수록 빠져나갈 구멍을 확실하게 만들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대신 책임질 바지 사장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바로 김병오 이사가 적임자였다.

물론 제 이름으로 땅을 산 바보는 없겠지만, 세세한 구입 정보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상 발을 들인 이사들의 목줄까지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가 무르익기 직전이었다.

“이렇게 되면 곧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부지 확보를 시작해도 되겠군요. 그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가 움직인 이후지만 서울 병원 확장 정보를 유출한 직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 명이 아닌 것 같더군요. 반드시 색출해야 합니다.”

“계속 알아보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변수는 어디나 있기 마련이고, 꼭 불리한 일도 아닙니다. 만에 하나 불상사가 생기면 우리 대신 책임을 지어야 할 인간이 필요하니까요. 무슨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그자들이야말로 재단에 손실을 끼친 인간이 아닙니까?”

“당연한 말씀입니다.”

어느 순간 정보가 새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한 이유였다. 어차피 100퍼센트 비밀이 지켜질 일이 아니었지만 책임을 질 사람이 더 생긴다면 그만한 안전장치도 없었다.

‘책임질 놈들 죄는 법과 변호사가 알아서 만들 테고, 이제 남은 일은 공식적인 결정뿐이군.’

“이사회는 언제 개최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확장 부지 내 땅값이 들썩이고 있습니다. 명분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가급적 빠르게 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어느 일이나 적절한 때가 가장 중요한 법입니다. 재단 재정으로 얼마나 충당할 수 있겠어요?”

“상신개발의 태도에 달려 있지만, 총 소요 비용의 30퍼센트 정도 가능하고, 나머지는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야 합니다. 전문 병원에 붙어 있는 부지는 당연히 제외하겠습니다.”

진상건이 만족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땅을 담보로 한 돈은 내 주머니에서 나가야지. 경매까지 가는 것이 제일 좋지만, 노리는 놈이 한둘이 아닌 이상 그 정도 손해는 감수할 수밖에.’

돈과 권력을 동시에 가진 자의 좋은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더 열심히 뛰는 인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뒷짐 지고 여유롭게 상황을 관망하며, 필요한 때만 개입하면 되는 것이다.

“좋습니다. 하지만 상신개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불확실한 예측에 불과해집니다. 먼저 해결한 후 이사회를 열겠습니다. 그동안 천안 병원 이전은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불미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남은 이사님들 설득에 전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미 가세한 인원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명분이란 놈은 쌓으면 쌓을수록 부작용이 없는 법이었다. 최소 이사장의 최종 권한을 동원해야 하는 사태는 막아야 했다.

‘설마 저번처럼 반기를 드는 놈이 절반을 넘진 않겠지. 펠로우 따위의 일과 돈을 비교할 수도 없고 말이야.’

진상건이 돌연 인상을 썼다.

“다시 강조하지만 특히 신현수를 예의주시하세요. 돈은 잃어도 되지만 명예는 절대 잃을 수 없습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잘 아시죠?”

“감정을 너무 앞세우면 위험합니다.”

“그래서 내게 김 이사님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가끔 이성을 잃는 때가 있어서 걱정입니다.”

김병오 이사에게 나가 보라는 눈짓을 한 진상건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말 몇 마디로 찜찜한 얼굴을 보였던 김병오 이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대신 책임질 사람을 언급한 덕이겠지만, 이미 이권을 나눈 이상 자기 자신을 첫 번째 책임질 대상으로 꼽고 있다는 속내는 절대 모를 것이다.

스스로 수족처럼 움직여 줘 더욱 수월해졌다. 희희낙락 앞장선 결과, 서류의 서명부터 공식 석상에서의 발언까지 진상건 자신의 흔적이 무척 희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김병오 이사는 마지막 순간에 묘한 눈빛을 보였다. 마치 막대한 이권을 앞에 두고 복수를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의 허점을 본 것처럼 야릇했다.

‘됐어. 상황 판단도 제대로 못하면서 내 허점을 이용해 먹으려는 시도도 좋고, 자잘한 돈은 주는 게 맞아.’

진상건이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나가야 할 돈과 들어올 돈이 그려졌다.

절로 미소가 나올 정도로 어마어마한 액수가 될 것이다. 더불어 산하 병원 전체가 치명타를 입게 된다면 미련 없이 신현수에게 이사장 자리를 넘기면 그만이었다.

껍데기만 남은 병원.

선친의 유지를 놓지 못할 신현수와 윤서연.

아울러 동조하는 김지훈이나 민정호까지.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질 것이다.

그만한 복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진상건 이사장이 갑자기 대소를 터트렸다.

이사장실이 쩌렁쩌렁 울렸다.

“하하하하!”

‘복수? 김병오 이사까지 내가 그따위 시시껄렁한 목적으로 재단을 인수했다고 믿는 멍청한 놈들뿐이군. 처음부터 끝까지 돈은 부수적인 수입일 뿐, 신씨와 윤씨 일가의 몰락이 주목적이라는 인상을 보여야 해.’

진상건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상신개발에 예정대로 움직이라고 전해.”

이제 장기판의 말들을 모두 쓸 때가 됐다.

갑자기 나타나 판을 흔든 김지훈, 악착같이 버티는 신현수, 졸(卒)에 불과했고, 지금도 졸일 수밖에 없는 민정호까지 몇몇 꼴도 보기 싫은 인간들 때문에 예상을 벗어났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돈 앞에 무력한 자가 훨씬 많은 덕이었다.

***

항상 뺑뺑이를 도는 것처럼 똑같은 일상으로 보이지만 단 하루도 똑같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같은 질환으로 치료받는다 해서 같은 사람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무난한 회복과 의사도 환자도 원치 않는 합병증을 막기 위해 긴장과 집중은 필수였다. 과장이자 간 이식 파트장인 김지훈의 열정 역시 변함이 없었고, 모든 파트에 지속적이고도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혁원, 송진우, 모찬우, 한수영은 펠로우 연차와 무관하게 서로를 자극했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렸다. 두 번째 파견 근무를 하고 있는 고경철은 단 한 명의 전공의라는 현실이 주는 극명한 장단점 속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힘들어?”

“수술을 받으면 날아갈 것 같은데 킵이 너무 많긴 합니다. 오프를 제때 주시지만 펠로우 선생님들도 집에 잘 못 가시는 상황이라 부담도 크고요.”

“너도 밟아야 할 길이고, 지금 배우는 것이 평생을 가니까 힘들어도 최선을 다해. 아버님이 지금도 수술을 보고 배우시려 하는 이유도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스스로 배우고 익혀야 모든 지식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지만, 진지하게 조언을 해 주는 선배의 존재 또한 무척 중요했다.

이경석과 나종진의 관계도 다르지 않았다.

“종진아, 요새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 무슨 일 있어?”

“특별한 일은 없는데, 전임 강사 임용까지 일 년도 남지 않아 그런지 조금 불안합니다.”

“왜? 안 될 것 같아?”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듭니다. 혁원이나 진우를 보면 둘 다 나보다 뛰어나고, 심지어 펠로우 일 년 차들에게도 밀리는 것 같아요. 써전도 타고난 재능이 필요한 걸까요?”

이경석이 피식 웃었다.

“재능이라! 맞아. 똑같이 수련을 받았고,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손에 차이가 나는 걸 보면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일지도 몰라. 당장 김 과장, 신 교수, 손 교수와 나를 비교해 보면 답이 나오지?”

“선생님이요?”

“왜? 난 예외인 것 같아?”

“라파로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나시지 않습니까? 다른 선생님들도 다들 인정하시고요.”

툭 어깨를 쳤다.

“김 과장이 라파로에 전념해도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자존심 상하지만 전공의 때부터 모든 면에서 확실히 앞서간 써전이야.”

“예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여기까지 오신 게 중요한 거 아닙니까?”

“당연하지. 사실 나도 얼마 전까지 너하고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이유가 뭘까?”

나종진이 눈가를 찡그렸다.

꼽을 수 있는 이유는 많았지만 정작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말하기 힘들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신감 저하 때문이었다.

“난 이미 오래전에 내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끗하게 인정했어. 그래서 나보다 뛰어난 써전이면 선배, 후배를 가리지 않고 배우려 애썼어. 배울 점이 엄청나게 많더라.”

“지금 제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됐어. 결국 깨달은 것은 타고난 손이 아니라 노력, 열정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이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을 결코 평범하게 만들지 않는다고나 할까? 솔직히 김 과장도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더 노력한 결과지, 노력하지 않았으면 지금 위치에 절대 서 있을 수 없었을 거야. 타고난 손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손이라는 말이야.”

“노력만이 답입니까?”

“설마 그거 하나뿐이겠어? 종진아, 네가 가진 장점은 어마어마하게 많아. 지금보다 훨씬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찾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야. 자신감을 잃지 마.”

누구나 우울해질 때가 있다.

다들 비슷한 고민을 했고, 어느 누구도 쉽게 넘을 수 없는 고비건만 유난히 높게 느껴지면 하루하루가 힘들어지기 마련이었다.

도움이 됐을까?

이경석은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나종진은 한껏 기대해도 좋은 써전이었고, 오늘의 고민 역시 발전을 위한 진통일 뿐이었다.

“난 나종진을 믿는다. 내 파트를 지원했을 때 정말 기뻤다. 지금도 나와 함께 라파로 파트를 이끌어 갈 써전이라는 사실 하나는 확실해.”

뜨거운 신뢰를 보냈다.

“솔직히 우리가 아는 써전 중에 약간은 비범할지 모르지만 천재는 없어. 다들 뼈를 깎는 노력으로 대가가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야. 종진아, 함께 가자.”

나종진이 훅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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