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아내가 까닭 없이 울면 남편은 온갖 불안에 휩싸인다.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옛일부터 어제 일까지 상기하며 잘못한 일이 있는지 따져 보거나, 혹시 뭔가 기념할 날인데 잊었는지 모른다는 걱정에 허둥지둥 이유를 찾기 마련이었다.
김지훈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머릿속이 초고속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부 간이나 희연이와 관련된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남자, 여자를 공연히 화성과 금성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내게는 사소한데 경아 씨에게 중요한 일이 뭐가 있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전전긍긍!
“경아 씨, 왜 울어요? 무슨 일 있어요?”
고경아가 눈가를 닦으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흐릿한 조명 사이로 깨알 같은 글자가 보였다. 평소 각서 따위는 만들어 본 적이 없고, 부부 관계를 나쁘게 만든다고 여기기에 더욱 불안해졌다.
찬찬히 내용을 확인했다.
김지훈의 숨이 가빠졌다.
고경아의 손을 덥석 잡고는 꽉 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힘들기만 한 병원 업무를 마치고, 쉴 틈도 없이 희연이와 남편 뒷바라지를 한 후 밤늦은 시간까지 꿈을 이루려 노력해 온 고경아였다.
그동안 여러 번 도전해 실패를 맛보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더욱 노력한 결과 마침내 시간 강사 임용장을 손에 쥐었다.
김지훈이 고경아의 등을 쓰다듬었다.
“축하해요.”
“지훈 씨!”
너무 기쁘면 도리어 울음이 터진다더니, 급기야 고경아가 소리 내 울며 줄줄 눈물을 흘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희연이가 따라 울었다.
김지훈도 눈시울을 붉혔다.
속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남편이 이럴진대 본인의 마음은 오죽할까?
한참 동안 가족을 부둥켜안고 따스한 온기를 나누던 김지훈이 활짝 웃으며 일어났다. 이런 날을 눈물로 끝낸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희연아, 케이크 사러 가자.”
“아빠 미워. 엄마 울잖아.”
“엄마가 너무 좋아서 그래. 희연아, 진짜야. 엄마한테 물어봐. 생일 때처럼 축하해야 되는 일이니까, 촛불 켜고 노래해 주자.”
“엄마, 진짜야?”
고경아가 울먹울먹 고개를 끄덕였다.
희연이가 엉거주춤 김지훈을 따라나섰다.
반짝!
초 하나가 밝게 타올랐다.
“교수님, 축하합니다. 희연아!”
“엄마 교수님, 축하합니다.”
케이크를 사며 단단히 일러 둔 말을 잘도 따라 했다. 훅 불어온 숨을 따라 미래의 꿈을 담은 하얀 연기가 방 안 가득 퍼졌다.
행복했다.
딸기 케이크가 유난히 달았다.
“언제부터 강의 나가요?”
“다음 달부터 일주일에 두 시간씩이에요. 다행히 오전 강의고, 내가 담당해야 할 수술에도 지장이 없으니까 걱정 말아요.”
“잘됐네요. 강의 준비하려면 힘들 텐데 도울 일이 없을까요? 일단 최대한 일찍 들어와서 우리 예쁜 딸 희연이부터 챙겨야겠네요.”
두런두런 많은 대화를 나눴다.
간혹 손일석, 고경희와 입양 문제가 떠올랐지만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확실하지 않은 일을 두고 고민하느니 당장은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알고 있는 편이 나았다.
다음 날 아침,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어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뜻밖에도 고경아가 별달리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거의 결심을 한 것 같으니까 우린 그냥 옆에서 지켜보는 게 좋겠어요. 경희나 제부가 가장 고민스럽고, 힘들지 않겠어요?”
“알고 있었어요?”
“지훈 씨가 아는데 내가 어떻게 몰라요?”
“근데 왜 얘기 안 했어요?”
“에휴! 내가 전에 지켜보자고 분명히 말했는데 기억 안 나요? 술 먹고 들어와서 진지하게 먼저 입양 얘기를 꺼냈잖아요. 아! 술기운에 기억을 못하시는구나.”
고경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김지훈이 눈만 껌벅였다.
‘그랬던 것 같네.’
술이 웬수다!
약간의 찜찜함 말고는 걱정할 일이 없었고, 소식을 들은 사람들 모두 축하의 말을 건넸다. 가장 걱정이 많았던 수술실에서도 김지훈의 입이 찢어졌다.
“과장님, 소식 들었어요. 좋으시죠.”
“그럼요. 우리 간호 과장님께서 강의하는 날은 수술을 못 들어올 텐데 미안해서 어쩌죠? 많이 도와주세요.”
“호호호! 걱정 마세요.”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술 방 간호사들의 얼굴이 무척 밝았다. 평소 고경아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고도 남았지만 무조건 고마운 일이었다.
사소하지만 간식거리 거하게 쐈다.
“간호 부장님은 어디 계세요?”
마치 이준영 교수가 자신을 이끌어 주었듯 고경아에게 간호 부장은 같은 존재였다. 직장이라 해도 남편으로서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 했다. 총무과에 급히 부탁해 마련한 상품권을 건네자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런 거 받으면 안 돼요.”
“법이고 뭐고, 제 성의입니다. 액수가 얼마 안 되지만 무엇이 필요하신지 몰라 준비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스승에게 선물했던 와이셔츠 정도 살 액수였다.
뇌물이라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어 조심스러웠지만 결코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고경아는 물론 간호 부장 역시 실력으로 평가하고, 승부할 것이라 믿었다.
교수 부부!
생각만으로도 즐겁고 뿌듯했다.
카르페 디엠!
***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다.
개원 일주년 기념식이 조촐하게 열렸다.
수건 한 장이 직원들에게 주어진 선물의 다였지만, 마치 기점이라도 된 듯 그날 이후 병원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성과급 지급이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 분명했지만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특히 중간 직급 이하의 직원들의 사기가 상당히 높아져 같은 일을 해도 확실히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선순환의 출발점이었다.
이미 국내에서 가장 많은 수술 건수를 기록하고 있는 간 이식 분야는 최고 수준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외과를 중심으로 내과, 방사선과, 임상병리과, 마취과, 간호과의 협조는 완벽했고, 행정 지원은 원활하기 짝이 없었다.
다들 만족스러워했지만 민정호는 결코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단지 김지훈에게 포화를 집중시켜 다른 직원들이 모를 뿐이었다.
“과장님, 예약이 사 개월 이상 밀렸습니다. 기간을 단축시킬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미 다섯 팀을 풀로 돌리고 있습니다. 기간을 더 이상 줄일 여력이 없습니다.”
“연간 간 이식 수술 수가 곧 천 건을 넘을 것이라는 예측이 있더군요. 증가 추세에도 불구하고 우리 병원은 삼백 건 이상 시행하지 못한다는 말인데 곤란합니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주십시오.”
김지훈도 동의하는 바였다.
반면 가장 중요한 요소를 빠르게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돈을 무제한 쏟아붓는다면 모르지만, 수술 팀 확보부터 현실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신관 공사가 끝나면 공간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인력 충원은 단기간에 무리하게 추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기본 능력이 부족하면 간 이식 수준이 유지될 수 없으니까요.”
“그건 과장님께서 고민하셔야 할 문제입니다. 이경석 선생님과 신현수 선생님은 각자 발전 방안을 이미 세우고 계십니다. 행정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속도를 내주십시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어느 부분이나 고도의 전문성과 지식을 요구하지만, 간 이식은 다른 분야와 단순 비교가 불가능한 분야였다. 관련된 과가 많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일단 수술 자체가 평균 열 시간 가까이 걸리는 데다 수술 후 치료가 더욱 어렵기 때문이었다.
‘공여자 치료도 만만치 않지만 지금 상황에서도 중환자실이 수혜자로 꽉 찬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너무 밀어붙이네. 킵이 쉬워 보이나?’
그럴 리 없었다.
물론 김지훈도 여건만 된다면 더 시행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한 단계 더 도약하면 그야말로 어느 병원도 넘볼 수 없는 굴지의 병원이 될 것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급하면 체하는 법이었고, 간 이식 분야는 단순한 불편으로 끝날 수 없었다.
“모찬우 선생과 한수영 선생을 비롯해 신입 펠로우들 실력이 뛰어나고, 이혁원 선생이나 나종진 선생도 간 이식에 합류할 수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서로 사람을 빼 가지 않는 한 다른 병원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차근차근 진행해도 늦지 않을 텐데 왜 이렇게 급해요?”
민정호가 입술을 모았다.
“진상건 이사장의 의도가 먹히고 있는지 서울 병원과 천안 병원 재정에 문제가 생길 조짐이 보입니다. 지금은 유지하겠지만 경우에 따라 상당히 위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실을 기하며 투자를 해야 하는데 환자 수가 정체된 상황에서 서울 병원 부분 확장설이 나돌고 있어요. 서울 병원에 인접한 땅이 얼마나 비싼지 아시죠? 속된 말로 망하기 십상인 투자입니다.”
“빚더미에 올라설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저라면 생각지도 않을 방안입니다. 투자가 아니라 손해를 감수하는 투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진상건 이사장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징후로 보입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본원이 크게 흔들리면 산하 병원 전체로 위기가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당장은 진료와 무관한 재단의 자산을 매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자산이 어디에 있을까?
자연스럽게 병원 뒤편의 넓은 땅으로 시선이 갔다. 독립채산제라고 하지만 종합 병원을 목표로 하는 전문 병원도 예외일 수 없다는 말이었다.
“확실한 정보인가요?”
“확실합니다.”
“신 교수와 함께 관심을 두고 있는 건 알았지만, 진상건이 분명 대외비로 취급했을 텐데 어떻게 알았습니까?”
“배가 가라앉을 조짐을 보이면 어떤 사람은 탈출부터 생각하겠지만 누군가는 구멍을 막으려 할 겁니다. 본원에도 평생직장이라는 소속감을 가진 직원이 적지 않더군요. 그중에는 고급 정보를 취급하는 사람도 있고요.”
“자주 접촉하는 모양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든, 보다 큰 목표를 향해 매진하든 인맥이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없습니다. 어쨌든 발전 계획을 빨리 세워 달란 말씀을 드린 이유는 단돈 백만 원이라도 더 확보해야 할 시점이란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정호에게 계약은 신성한 약속이 분명했다.
애초 이 년을 기한으로 전문 병원을 반석 위에 올려놓기를 바랐지만, 그 이상의 목표인 종합 병원을 함께 꿈꾸고 있었다.
‘종합 병원 건립을 위해 노력한다는 문구 단 한 줄을 추가했을 뿐인데 이렇게 노력해 주다니 정말 고맙네. 그런데 우리 병원 수익이 늘어난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병원은 본원과 천안 병원의 규모와 비교할 수가 없는데 수익이 증가한다고 해서 위기 극복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예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만, 현실적인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잖아요.”
“액수로는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상건 이사장과 동조하는 이사들의 전횡을 막으려면 무엇보다 신 교수님의 입지가 강력해져야 합니다. 그 기반은 전문 병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발언권이 강해진다!”
“기반이 탄탄하면 어떤 제안을 해도 재단에서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 정확할 겁니다. 그렇게 돼야 진상건 이사장을 막을 시간적 여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부분 확장은 시작일 뿐입니다.”
환영해야 할 일이 악재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솔직히 김지훈 입장에서는 진료에 전념하며 겸사겸사 애초 마음먹었던 수술 팀 확대 계획을 세우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냥 주변 상황을 무시할 처지가 아닌 탓에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었다.
‘본원과 접촉할 일이 거의 없는 운영이사를 맡은 내가 이렇게 힘든데, 현수나 민 부원장은 정말 머리가 터지고도 남겠다.’
다시 한번 민정호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인지 문득 항상 묻고 싶었던 의문이 떠올랐다. 아무리 계약에 목을 매도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민 부원장님, 계약에 따른 일이라고 하지만 가끔 진상건과 사적인 이해관계? 아니, 은원이라고 해야 하나요? 뭐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사적 질문은 삼가 주시죠.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하실 말씀 없으면 가 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여전히 무표정했고, 행동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김지훈에게는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서두르는 모습에서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병원 부지를 지키면 진상건이 몰락하는 건 아니겠지만 상당한 타격을 받겠지? 다른 사람도 아닌 민정호에게 뒤통수를 맞는 꼴이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일종의 복수 아닌가?’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믿었던 사람에게 발등 찍히는 것만큼 아픈 일은 없을 것이다. 독립채산제를 승인하면서 전문 병원 운영을 맡길 만큼 민정호를 믿었다는 말일 테니 진상건에게는 치명적일 것이다.
‘뭘까? 정말 계약만일까?’
의문이 더욱 커졌지만 당장 급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간 이식 파트를 최대 어느 선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지 판단해야 하는 일도 급했고, 손일석은 아예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곧 이차 수술을 할 때가 됐기 때문이었다.
그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똑! 똑! 똑!
손일석이 찾아왔다.
한동안 침묵만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