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161화 (1,161/1,329)

7화

김지훈과 신현수가 바삐 움직였다.

까닭 모를 한숨이 터질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개원 후 한가한 날이 거의 없었다. 불미스러운 일도 한몫했지만 전문 병원의 특성과 애초 상정했던 목표 때문이었다.

간 이식과 복강경 수술 자체가 가진 복잡함 및 다른 과와의 연계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해 궤도에 오르면 오를수록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전문 병원은 현실적인 타협이자 고육지책이었을 뿐 선대 이사장의 유지가 담긴 종합 병원 건립이 최종 목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일이 없으려야 없을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신 교수, 본원 허가는 떨어졌어?”

“소아과 과장님과는 얘기가 됐고, 원장단 승인만 남은 상태야. 혹시 몰라서 재단 이사님들께도 충분히 설명했어.”

“진상건에게 동조하는 이사들이 건재한데 반대하는 기미는 없어?”

“항상 그게 걱정이지만, 요새 서울 병원과 천안 병원의 분위기가 슬슬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진료 부분만이 아니라 행정 쪽까지 불만이 쌓이고 있어.”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진상건을 밀어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도 있지만 좋은 일만은 아니네. 본연의 업무를 두고 엉뚱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이잖아?”

“어쩔 수 없지. 다른 의미에서 보면 위기가 더 가까워졌다는 말일 수도 있어. 진상건 체제의 한계가 의도된 것이라면 오히려 경각심을 갖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신현수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아직은 나하고 민 부원장에게 맡기면 돼. 그건 그렇고, 펠로우를 과장으로 임명한다고 말은 없어?”

‘아직은? 현수야, 지금도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항상 네 편에 서서 힘이 돼 주겠지만 이런 일은 쭉 맡는 것이 순리다.’

김지훈이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은근슬쩍 속마음을 내비칠 뿐이었다.

“내부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승인만 떨어지면 바로 진행시킬 테니 걱정 마. 각자 강한 영역이 있으니까 재단 일도 민 부원장하고 둘이 잘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미진한 부분을 확인하고 자리를 끝낸 김지훈이 신현수를 보다 말고 피식 웃었다.

‘한때는 반드시 이겨야 할 라이벌이라고 여기면서 참 껄끄러운 관계였는데 이제는 얼굴을 제일 많이 보네. 무슨 얘기를 해도 편하다는 것도 정말 즐겁고, 고맙다.’

“왜 웃어?”

“아무것도 아니야. 좋아서 그래.”

“너도 이런 일을 즐기면서 말할 수 있다니 나도 좋다. 이렇게 쭉 서로 도와 가면서 살자.”

‘그게 아니야!’

김지훈이 눈만 껌벅거렸다.

다행히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강은미가 전문 병원의 소아과 과장으로 정식 근무를 시작했다. 이혁원은 티를 내지 않았지만 유달리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사소한 일에도 아주 쉽게 웃었다.

‘좋을 때다.’

병원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고, 특별한 일도 없건만 김지훈에겐 초조한 일이 또 하나 생겼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의 미래였다.

드디어 간호과 교수 면접을 보았다.

시간 강사라 해도 의미가 대단했다.

그동안 쏟은 땀의 결과이자 새로운 인생의 첫걸음이었다. 한편으로 간 이식 수술 팀도 중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 달에 몇 번이나 강의를 나갈까요? 거의 매일 간 이식이 있는데 경아 씨가 없으면 잘 돌아갈까요?”

“아직 발표 나려면 멀었어요. 그리고 나보다 뛰어난 선생들 많으니까 걱정 마세요.”

“간호 부장님은 별말 없어요?”

“도리어 강사 선발하는 대학을 소개시켜 주셨고, 강의를 하게 되면 시간을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지까지 알려 주시면서 도움을 많이 주고 계세요.”

심보가 고약해 사사건건 아랫사람의 앞을 가로막는 상사도 있지만 적극적으로 끌어 주는 사람 역시 상당히 많은 세상이었다. 이미 출강을 하고 있는 간호 부장은 정말 고맙게도 고경아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간호 부장님 시간 되시면 바로 식사 한번 하죠.”

“발표 후예요?”

“합격은 당연한 거고, 시간 되는 대로 바로.”

며칠 후 간호 부장과 식사를 했다.

“고경아 선생만큼 임상 쪽에 강점이 있는 사람도 드물어요. 그런 점을 강조했으니까 좋은 결과 있을 거예요. 내가 강의 나가는 학교라 그런지 꼭 붙었으면 좋겠네요. 호호호!”

간호과 라인인가!

합격 전이라도 반드시 알려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희연이를 자식처럼 여기는 손일석, 고경희와 만나 지원 사실을 알리자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처형! 드디어 학사 무림으로 나가는 겁니까?”

“학사 무림이요?”

“아! 마이 미스테잌! 대학 교수!”

다들 합격은 따 놓은 당상인 것처럼 말했지만 김지훈에게도 정말 초조한 하루하루였다. 고경아는 툭하면 식욕을 잃을 정도였다.

“경아 씨, 걱정 말아요.”

결과에 상관없이 분명 한 걸음 올라섰다.

남편으로서 응당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카르페 디엠!

발표를 기다리며 날짜를 꼽던 김지훈이 돌연 화들짝 놀랐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반드시 챙겨야 할 일이 있는 법이었다.

어느덧 개원 일주년이 다가온 것이다.

거창한 기념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한 세상이었다.

김지훈이 병원 상황을 점검했다.

한수영을 비롯해 군 복무를 마친 펠로우들이 모두 합류했다. 전공의 파견도 계속 이어져 이제 이 년 차인 고경철이 한결 써전다운 모습으로 두 번째 근무를 시작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바로 서도진과 강병옥이 드디어 독자적인 간 이식 수술 팀을 꾸렸다는 사실이었다. 이로써 주당 다섯 건의 수술이 시행되기 시작했고, 의미하는 바가 지대했다.

단지 전문 병원이 애초 목표를 달성해 본궤도에 올랐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의료보험이 적용되고, 생체 간 이식이 활성화되며 연간 천여 건에 육박한 간 이식 수술 중 무려 삼분의 일을 담당한다는 점이 가장 의미가 컸다.

규모로는 비교도 되지 않는 병원이 유수한 대학 병원, 종합 병원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솔직히 그 이상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급격한 수술 증가가 초래하는 문제가 적지 않았지만 다행히 신관 건립이 끝나면 대부분 해소될 사안들이었다. 게다가 든든하게 뒤를 받쳐 줄 행정 직원까지 추가로 뽑았다.

노심초사 목표를 향해 달렸던 김지훈의 입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과장이 아닌 수술을 하는 의사 입장에서도 개선해야 할 사항들이 만만치 않아 바쁘긴 매한가지였지만 어깨에 걸린 짐은 확실히 가벼워졌다.

‘이제 개원 때 정했던 일차 목표의 90퍼센트 이상 이룬 건가? 아직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차차 해결될 테고, 다들 열심히 하는 이상 발전하는 일만 남았다.’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실사 이후 진상건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 상태로 간다면 보다 원대한 목표를 향해 달려도 좋았다.

바로 종합 병원 건립이었다.

비약적인 발전을 토대로 한 도약이었다.

‘의료진과 직원 선발은 문제없을 것 같은데, 결국 돈과 땅이 관건이네. 진상건이 수작을 부리기 전에 확 말뚝을 박아 땅부터 확보해야 하는데 가능할까? 민 부원장이 말하는 그놈의 때는 언제지?’

즐거우면서도 답답한 생각에 묘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신현수와 민정호를 만났다. 깊은 대화가 오갔고, 한 가지 제안에 민정호가 난색을 표했지만 김지훈은 강경하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 병원의 미래를 위한 일입니다. 난 적당히 타협할 생각이 없어요. 신 교수, 운영이사로서 제안한 사안이야. 사람을 가장 중시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또 있겠어?”

결국 김지훈의 요구가 관철됐다.

실무적인 준비가 진행되는 사이 일주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마침 매달 열리는 운영 회의가 열리는 날이 겹쳐 김지훈이 서둘러 회의실로 향했다.

송재덕 교수, 김진호 교수, 신현수를 중심으로 각 과 과장이 모두 모였다. 간호과를 대표한 간호 부장과 고경아의 얼굴도 보였다. 또한 민정호의 강력한 요청으로 몇몇 행정직 간부까지 참석해 인원이 적지 않았다.

김지훈이 살그머니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민 부원장, 실적 발표 시작하세요. 좋은 결과 기대합니다.”

정해진 순서였다.

초반에 있었던 의료진의 반감은 희석되다 못해 이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단지 월급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흘린 피땀이 병원 발전의 초석이 된다는 사실을 똑똑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여기까지는 전적으로 운영진의 논리였다.

김지훈처럼 설립 단계부터 관여한 의사들에게나 통할 수 있는 말이었고, 대부분의 병원이 비슷하다지만 대다수 직원들에게 업무가 과중한 직장임은 분명했다.

신생 병원이라 해서 희생이 당연한 일이 아니기에 당연히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여러 이유로 잠자고 있을 뿐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익숙해졌을 뿐 찜찜하긴 마찬가지겠지. 사실 나도 실적 얘기가 나올 때마다 부담스럽고, 때론 기분이 안 좋기도 한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얼굴만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민정호가 실적 자료를 배포했다. 개인적으로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주된 이유일 텐데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각 과 실적이 공개됐다.

상당한 수입이 발생했다.

초반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회의 때마다 닦달을 하던 민정호의 태도도 살짝 변해 목소리 속 매서움이 다소 사라졌다.

“아시다시피 병원 재정이 흑자로 전환된 지 삼 개월이 지났습니다. 이번 달은 신관 건설에 투자해야 하는 비용이 많이 줄었고, 각 과는 물론 간 이식 수술까지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 흑자 폭이 더욱 커졌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안주하며 투자를 소홀히 하는 순간 도태되기 마련입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무거운 한숨이 터졌다.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면서 여기서 더 열심히 하라고? 지금도 툭하면 늦게 퇴근하는 거 빤히 알면서 도태라는 말까지 해야 하나?’

형식적인 말에 불과해도 누구나 품고 있던 은근한 불만을 툭 건드렸다. 지속적으로 함께하려면 달콤한 열매를 나눠야 하는데도 말이다.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도 한몫했다.

은연중 분위기 가라앉았다.

운영진 중 직원들과 제일 가까웠고, 실제 불만 해결에 가장 적극적인 김지훈에게 눈길이 쏠렸다. 한마디 해 달라는 눈빛을 받으면서도 당연하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가진 송재덕 교수와 김진호 교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임상 쪽 사람들의 얼굴이 특히 안 좋았다.

‘흑자가 이어져도 계속 밀어붙이는데 한마디 해야 되는 거 아니야? 펠로우와 직원을 보강했다는 것으로 끝내겠다는 거야? 김지훈 과장도 변했나?’

김지훈은 결국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입을 연 사람은 신현수였다.

운영이사도 의견을 내지 않는데 재단 이사이자 전문 병원의 오너가 할 말은 빤했다. 어느 팔이어도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분들이 힘들게 일하시고 있다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병원 내 복지 부분을 강화하려고 합니다만, 재원의 효율적인 배분은 물론 고질적인 인원 부족과 맞물려 현실적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럼 그렇지.’

“따라서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운영진으로서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개선해야 할 점을 적극 개진해 주시길 바랍니다.”

말로는 무엇을 못할까?

결국 누군가 정식으로 불만을 제기하려 했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원 후 처우는 같고, 업무는 과중해지기만 했는데 불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지.’

신현수가 재빨리 양해를 구하며 민정호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나직한 불만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자 송재덕 교수가 나서 잠시 기다려 달라는 행동을 취했다.

민정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도 신 교수님과 함께 최대한 불편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울러 운영진에서 한 가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전 직원에게 성과급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연봉은 직급이나 근속 기간에 따라 결정되는 사항이니 논외로 하겠습니다.”

다들 깜짝 놀라 웅성거렸다.

아무리 큰 병원이라도 성과급을 지급했다는 소리를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내심 돈이 아니라 적극적인 근무 조건 개선을 바라고 있던 참이었다.

심지어 당황하는 기색까지 보였다.

이내 입이 귀에 걸렸다.

그래, 뭐니 뭐니 해도 돈이다.

얼마가 됐든 기대하지도 못한 가욋돈이 생긴다는 사실 자체로 행복할 수 있었다. 사실 죽도록 일한 사람에게 보람이나 꿈만 운운하며 현실을 어렵게 만든다면 공염불을 넘어 사기에 가까울 수 있었다. 물론 적자 혹은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면 인내와 이해를 요구할 수밖에 없지만 흑자가 이어진 마당이었다.

슬슬 불만 대신 기대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때 민정호가 단서를 달 조짐을 보였다.

“단.”

일순 조용해졌다.

조건이 달리면 손에 쥔 돈이 내 돈이 아닐 수 있었다. 급격하게 기대감 대신 불안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만일 추가 업무를 요구한다면 최악이라 할 수 있었다.

민정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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