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재수술로 인해 발생한 모든 문제는 결국 일반외과와 운영진의 어려움이었다. 의료 과실에 대한 경각심을 주었지만 다른 과 의료진에게 끼친 실제 영향은 미미했고,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도 아니었다.
펠로우만 근무하는 소아과도 마찬가지였다.
혼자라 해도 언제든 개업이 가능하고, 개인 종합 병원이었으면 과장으로 근무할 전문의인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고도의 치료를 요하는 아이들의 진료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선천성 질환으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을 차질 없이 진료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덕분인지 그 이후, 심각한 합병증은 발생하지 않았다. 민정호와 행정 직원들의 적극적인 대처하에 브로커로 의심되는 사람들도 자취를 감췄다.
보호자와 구분할 수 없어 완벽하지 않겠지만 소송도 불사하는 병원의 방침이 바뀌지 않는 한 발붙일 곳이 없을 것이다. 당연히 과실이나 실수가 아니라는 전제가 필요함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병원이 차차 평온을 되찾았다.
김지훈의 표정이 무척 밝아졌다.
‘몸만 힘든 것이 백배 낫네. 지금 추세로 가면 곧 일차 목표를 모두 달성할 수 있겠어. 이렇게 되면 직원들 사기를 더욱 진작시킬 때가 됐는데, 어떤 방법이 제일 좋을까?’
한참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이혁원이 강은미와 함께 면담을 요청했다. 신현수도 참석하기를 원해 갖은 의문이 다 들었다.
‘매일 얼굴 보는데 무슨 일로 정식 면담을 요청한 거야? 파견 기간은 아직 한 달 정도 남았고, 강은미 선생이나 소아과 문제라면 혁원이가 함께할 이유가 없는데 뭐지?’
강은미는 한 명의 당당한 직장인이었다.
자신의 문제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사람이 아니었다. 김지훈이나 신현수 역시 항상 열린 마음으로 후배 혹은 직원들의 고충을 들을 준비가 돼 있었다.
자리가 마련됐다.
“무슨 일 때문에 보자고 했어?”
“제가 먼저 말씀드려도 될까요?”
강은미가 먼저 나섰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한 말씀일 수도 있는데 종합 병원 건립이 최종 목표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사실인가요?”
신현수가 대답할 일이었다.
“사실이긴 하지만 아직은 요원한 일이야. 일이 년 안에 첫 삽을 뜬다는 보장도 없어. 현실적인 문제가 산적한 데다 건물 하나 크게 짓는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거든. 근데 강은미 선생이 왜 그걸 궁금해하지?”
“질문 한 가지 더 하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해.”
“소아과 펠로우 파견을 이 년 동안 유지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이후에는 소아과 진료를 하지 않을 생각이세요? 아니면 계속 펠로우 파견을 요청하실 건가요?”
항상 미래를 대비해야 하지만 소아과는 전문 병원의 주력이 아닐뿐더러 고민하기에는 너무 이른 때였다. 그러나 강은미의 말을 절대 지나칠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신 교수, 한 번 개설했던 과를 폐쇄하는 건 정말 어려울 거야. 강 선생이 온 이후 외래 환자를 많이 보는 데다 일반적인 질환이긴 하지만 이혁원 선생이 수술까지 하고 있어. 그렇게 되면 기존에 보던 환자를 계속 봐야 하잖아.”
“나도 생각은 하고 있었어. 선천성 질환 수술까지 하는 마당인데 소아과를 유지할 수밖에 없겠지. 다만 이 년 후에 병원 환경을 예측하기 힘들어서 어떤 방식으로 운영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을 뿐이야.”
강은미의 눈이 반짝였다.
“선생님, 그럼 소아과 유지는 확정이네요.”
“그렇다고 봐야지.”
“말씀대로라면 펠로우 파견을 유지하는 방식은 병원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과들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엄마들은 자기 아이를 보는 의사 얼굴이 자주 바뀌는 것을 유독 싫어하거든요.”
“알고는 있는데 당장은 교수 신분으로 소아과 과장 자리를 만들 수가 없어. 근무 조건도 그렇고, 소아과 환자가 그만큼 올까?”
“주변에 소아 수술이 가능한 병원이 없어 환자는 계속 늘 겁니다. 과 하나를 유지하기에 충분할 것으로 판단합니다.”
이상하리만치 적극적이었다.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그래서?”
“이 년 동안 현재와 같은 조건으로 근무하게 해 주세요. 대신 종합 병원을 건립하게 된다면 교수로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을 주셨으면 합니다.”
“파견이 아니라 아예 펠로우 생활을 우리 병원에서 하는 것으로 하자는 말이야? 혼자 근무해야 해. 교수로서 갖춰야 할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겠어?”
펠로우는 주지하다시피 보다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분야에 매진하기 위한 단계다. 강은미의 제안에 귀가 솔깃할 정도였지만 전문 병원은 소아과 펠로우 수련을 할 수 있는 여건 자체가 되지 않았다.
김지훈도 무리라고 생각했다.
“강 선생, 말은 고마운데 잘 생각해야 돼. 신 교수 말처럼 종합 병원 건립도 요원하고, 교수를 인연이나 의욕만으로 선발할 수는 없어.”
완곡한 거절이었다. 그런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을 법도 한 강은미가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혁원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과장님, 매달 선천성 질환 아이들을 수술해야 하고, 비록 탈장이 전부지만 소아 수술도 몇 건 했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곧 다른 질환을 가진 아이들도 내원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예전에 소아 외과에 관심이 많으셨는데, 이 지역에서는 이미 개설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소아 외과를 전담하는 소아과 전문의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 병원 근무 역시 펠로우 과정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당한 논리였다.
결국 현재와 미래 상황을 모두 감안해도 소아과 전문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더구나 강은미는 같은 조건으로 근무를 자청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욕심인지 빤히 알지만 이혁원 말처럼 소아 외과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했다. 선천성 질환을 가진 아이 수술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여력이 없다는 사실 또한 분명했다.
“좋아. 소아과 전문의는 확보했다고 치자. 지금이야 너하고 나하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간 이식을 하는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수술이 늘어나면 감당하기 힘들어. 그때 소아 외과는 누가 담당해? 사람이 없잖아?”
“해마다 펠로우를 뽑으실 예정 아니십니까?”
“당연히 뽑겠지만 누가 가르쳐?”
“맡겨 주신다면 소아 외과 전문의가 나올 때까지 제가 하겠습니다. 과장님께 배우며 경험을 더 쌓는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예상되는 구멍에 대한 대비책을 다 세우고 왔다. 툭하면 둘이 붙어 다닌 이유를 생각할 때 사적인 감정이 개입됐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일 뿐이었다.
이 정도로 준비했다면 병원 입장에서 오히려 환영할 일이었다. 현 상태를 유지하면서 자연스럽게 소아 외과를 만들 기회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신현수가 이혁원과 강은미를 보았다.
냉철하게 판단해야 할 때였다.
‘분명 손해는 아니다. 도리어 우리 병원의 위상을 높일 수 있고, 향후 종합 병원 건립이 가능해지면 세부 분야 하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좋아. 운영 회의에 상정은 해 볼게. 하지만 서울 병원과 강은미 선생 근무 문제까지 상의해야 하고, 그 외에도 어려운 점이 많아. 어떤 결정이 나도 수긍해야 돼.”
많이 변했다지만 마음이 없었다면 단칼에 거부했을 신현수였다. 일단 한 고비를 넘겨 반 이상 허락한다는 의미에 이혁원과 강은미가 반색했다.
“감사합니다.”
이제 외과를 책임지고 있는 김지훈이 관건이었다. 행정적인 문제는 몰라도 환자가 걸린 일에 있어서는 더욱 깐깐한 경향이 있었다.
김지훈의 눈이 이혁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소아 외과 전담인 이상 강은미 선생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소아 수술 경험이 많지 않은 혁원이는 어떨까? 간 이식 파트에 문제는 없을까?’
생각이 깊어졌다.
경험은 쌓으면 된다.
무작정 욕심을 부릴 이혁원이 아니었고, 자신을 비롯해 쟁쟁한 선배들이 있는 한 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누구든 처음 시작할 때는 초보에 불과한 법이었다. 들인 시간과 노력 여하에 따라 더 빨리 혹은 더 느리게 익숙해지고, 노련해지기 마련이었다.
이혁원이 어느 쪽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써전에게 요구되는 실력을 모두 갖춰야 하는 간 이식은 외과 수술의 종점이자 출발점이기도 했다. 간 이식을 할 수 있다면 다른 수술 역시 어려울 것이 거의 없었다. 하기에 도리어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소아 외과 전문의를 하겠다면 어쩌지?’
후배 중 가장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이혁원이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평생 같은 길을 가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선배의 욕심일 뿐이었다.
이혁원의 인생은 이혁원의 것이었다.
강은미 또한 전문 병원에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걸었다. 어떤 이유가 있든 교수가 되기를 원한다면 도박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선택했고, 개척해 나갈 것이다. 아끼고 사랑한다면 선배로서 응원하고, 도와주는 것이 마땅했다.
강은미에게 눈길을 돌리던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아무리 무딘 사람이라도 가끔은 알 수 있는 눈빛이 보였다. 이혁원도 다르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에휴! 하긴 나도 첫눈에 반했는데 말해 뭐 해. 일과 사랑을 동시에 얻겠다 이거지? 그럼 확실하게 도와줘야지.’
“나도 신 교수와 같은 의견이지만, 무엇보다 이혁원 선생과 강은미 선생의 마음이 확고해야 돼. 솔직히 말해 강은미 선생에겐 인생이 걸린 도박일 수도 있어. 여건이 안 된다면 바로 소아 외과를 포기할 수도 있어. 강은미 선생, 혼자 공중에 붕 뜰 수도 있다는 사실 명심해. 내일까지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정식으로 논의해 볼게.”
이게 도와주는 걸까?
제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사랑 앞에서 눈이 머는 경우가 제법 있다. 둘만의 사랑이 아니라 병원 운영까지 관련된 이상 장밋빛 미래만이 아니라 진흙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강은미는 주저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내일 오후에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만 나가 봐도 될까요?”
“한 번 결정하면 돌이킬 수 없어. 깊게 고민하고 알려 줘. 이혁원 선생도 마찬가지야.”
이혁원이 고개를 숙였다.
강은미에 앞서 문을 열어 주는 모습이 무척 당당했다. 그동안 만나 본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결혼 얘기는 나온 적이 없었다. 이제야 진짜 사랑을 만났는지도 몰랐다.
즉시 사인방을 소집했다.
진충기 교수도 빼놓을 수 없었다.
비 온 뒤에 땅 굳는다는 말처럼 재수술로 인한 분란 이후 오히려 더욱 친밀해졌다. 매사 함께 논의해 이젠 오인방이라고 해야 할 수도 있었다.
상황을 설명하자 손일석이 크게 웃었다.
“꽃이 핀 줄 알았는데 아주 제대로 불이 붙었어. 둘 다 바싹 열이 올라 마른 장작이 됐네. 그 나이에 불장난할 리도 없고, 사리분별 다 했을 텐데 난 찬성이야.”
“만일 혁원이가 소아 외과를 하게 된다고 해도 우리로서는 환영할 일이야. 경험이 쌓이면 오히려 소아 간 이식까지 안심하고 맡길 수 있잖아. 강은미 선생과 마음까지 맞으면 환자도 더욱 철저하게 보지 않겠어?”
이경석도 바로 동의했다.
“김 과장, 신 교수, 뭘 고민해? 이쪽저쪽 다 생각해 봐도 병원에 문제 될 일이 없잖아. 펠로우 지원하는 사람의 선택 폭까지 넓힐 수 있는 기회야. 밀어줘야 할 때 팍팍 밀어주자고. 이렇게 되면 국수 먹을 일만 남은 건가?”
“농담하지 말고.”
“에헤! 공사 구분해서 잘 들으세요.”
둘 다 학교 후배인 데다 오랜 기간 함께한 이혁원에게는 감정까지 개입시킬 수 있었다. 김지훈이 가장 객관적일 진충기 교수의 의견을 구했다.
“나 역시 두 선생의 생각이 확고하다면 동의합니다. 우리 병원이 한층 더 발전할 수 있는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신 교수, 본원과 문제는 없겠어?”
“알아봐야지. 그간 일하는 걸 봐서는 강은미 선생을 강력히 원할 것 같긴 한데, 본인 뜻이 변하지 않는다면 소아과 과장으로 초빙하는 것도 생각해 봐야겠어.”
“반드시 펠로우를 마쳐야 교수 임용이 가능하다는 규정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그 방법도 괜찮긴 하네. 사실 우리가 교수 자원을 육성해 내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지.”
손일석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얘기 끝난 거네. 김 과장, 과장으로서 최종 결정하고 퇴근하자. 이준영 선생님이 둘 사이를 아시면 과연 우리 앞에서 웃으실까, 아니면 무뚝뚝하게 ‘알았다’ 하고 돌아서서 웃으실까? 난 답이 빤해 보이네.”
“섣불리 얘기하지 마라.”
“내가 애냐? 사실 둘이 학교 다닐 때 썸씽이 있었다는 소문을 입수한 지 오래야. 그게 아니더라도 내 촉에 걸렸겠지만 한마디도 안 한 이유가 있어요. 남녀 사이 왈가왈부하다가 뺨 맞은 사람 한두 명 본 게 아니다. 굿이나 보고 떡 먹는 게 상책이야. 자식! 이제야 짝을 만났구나.”
심각하게 논의해야 할 일이면서도 즐거운 일임이 분명했다. 농담 속 진의를 각자 전달했고, 김지훈이 과장으로서 외과 내부의 마지막 결정을 했다.
“그럼 운영 회의에 정식으로 상정해 결정하겠습니다. 모두 이의 없죠?”
“없습니다.”
짝짝짝!
박수로 자리를 끝냈다.
이제 이혁원과 강은미의 최종 의사만 남았다.
다음 날, 바쁜 하루 일과를 보낸 김지훈이 두 사람을 불렀다. 약간은 상기된 얼굴이었지만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특히 강은미는 더욱 확고한 의사를 밝혔다.
“전 제 결정이 도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건만 마련해 주시면 제가 세운 목표를 향해 열심히 가 보겠습니다. 서울 병원과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년 동안 지속해야 할 파견이기 때문에 서울 병원이 실질적으로 입는 피해는 없었다. 다른 문제가 없다면 원만히 해결될 테고, 도리어 전문 병원이 준비해야 할 일이 훨씬 많은 상황이었다.
“알았다. 진행한다.”
“감사합니다.”
환하게 웃는 이혁원과 강은미를 보던 김지훈이 덜컥 마음속을 드러내고 말았다.
‘행복해 보이네.’
“너희들 모습이 참 좋아 보인다. 미리 축하해 줄게. 함께 근무하면서 싸우지 마라. 사랑싸움은 병원 밖에서 해.”
얼굴 벌게질 줄 알았건만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야말로 초고속이었다.
김지훈이 이혁원의 어깨를 툭 치며 함께 웃었다.
덩달아 행복해졌다.
친형의 마음이 이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