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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59화 (1,159/1,329)

5화

중환자실 환자의 출혈이 완전히 멈췄다. 좌측 간만 남은 상태였지만 간 기능도 좋아져 일반 병실에서 치료가 가능할 정도로 회복됐다.

“일주일 더 지켜본 후 복부 CT와 초음파에서 별다른 이상이 없다면 퇴원해도 될 것 같습니다. 간 절제로 인한 후유증이 육 개월 가까이 지속되기 때문에 퇴원한 후 정기적인 검진이 필요합니다. 술, 담배, 한약, 성분을 알 수 없는 건강식품은 절대 안 됩니다.”

“언제 병실로 올라갈 수 있습니까?”

“현재 별다른 이상이 없지만 내일 아침에 혈액 검사 확인한 후 조치하겠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는 것만큼 껄끄러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답답함도 일주일이면 끝나는 데다 감정과 치료는 별개였다.

‘답은 모호하고, 계속 생각해 봐야 피곤하기만 한 일이다. 무사히 걸어 나가게 하는 것이 우리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송진우, 모찬우와 함께 전체적인 상태를 점검한 후 일반 병실로 옮겨도 된다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다소 홀가분해지는 순간 누군가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안면이 있는 형사였다.

동료 두 명과 동행했다.

“김 형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환자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들었습니다. 죄송하지만 향후 치료 계획과 퇴원 일정을 알 수 있을까요?”

김지훈이 순간 긴장했다.

일면식도 없지만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이름 모를 소녀의 아버지가 떠오른 탓이었다. 살인죄는 면하겠지만 간 절제까지 했으니 처벌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형사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충격적이었다.

사건 조사 중 혈흔 채취 과정에서 환자의 DNA를 확인했다. 별다른 의미가 없어 지나치고 말 일이었지만, 가해자를 향한 담당 형사의 동정과 피해자에게 느낀 의문 하나가 의외의 전개를 유발했다.

“성폭행범이라고 해도 자신의 범죄로 인해 사람이 죽으면 죄의식을 느끼기 마련인데, 이 사람은 출소 후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초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요?”

“성폭행과 관련된 미제 사건을 다시 확인했는데 두 건에서 환자와 동일한 DNA 검출 기록이 있었습니다. 일단 상습범이 확실하고, 수법이나 행동반경을 추적하면 피해자가 더 나올 가능성이 무척 높습니다. 그동안 잘 빠져나갔지만 이번에는 빠져나가지 못할 겁니다.”

“확실한 겁니까?”

“확실합니다.”

김지훈이 어깨를 떨었다.

흉악범 중의 흉악범이었다.

별일을 다 겪어 가며 그런 인간을 치료했다니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일반 병실에 올라갔을 때 치료를 담당해야 할 간호사들이 걱정될 정도였다.

접촉 자체를 막는 것이 최선이었다.

“너무 불안하네요. 내일 병실로 올라가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 병원에서 볼 수가 없습니다. 경찰 측에서 대책을 세워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몇 가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내일 아침에 이송이 가능한 상태입니까?”

“충분한 준비만 갖춘다면 가능합니다.”

“그럼 보호자도 모르게 이송을 준비해 주십시오. 이미 정식으로 영장을 발부받았지만 낌새를 채면 언제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형사가 함께 온 동료를 보며 말했다.

“우리 직원인데 이송 전까지 환자와 보호자를 감시할 목적으로 왔습니다. 양해해 주시면 중환자실 앞에서 상주했으면 합니다.”

김지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죠. 감사합니다.”

몇 가지 주의 사항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조치 등을 들은 김지훈이 즉각 송진우, 모찬우와 하룻밤을 흉악한 놈과 지내야 하는 간호사들을 모았다.

“간호사 선생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개별적으로 접촉하지 마세요. 송진우 선생, 모찬우 선생, 오늘 밤은 나하고 교대로 중환자실을 지키자.”

“선생님도요?”

“특수한 경우야. 사람이 많을수록 좋지 않겠어? 일단 티 내지 말고 평소처럼 움직이자. 무슨 일 있으면 소리라도 질러서 알려야 돼.”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아니었다.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한 놈이 눈앞에 누워 있었다. 어떤 범죄를 더 저질렀을지 모르는 데다 만약 죄의식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면 반드시 격리해야 할 인간이었다.

간호사들에겐 공포일 것이다.

중환자실에서 오래 있었기 때문에 팔다리 힘은 빠졌겠지만 손에 잡히는 것 모두 흉기로 변할 수 있었다. 김지훈도 은근히 겁이 나고 불안한 것이 사실이었다.

‘상습범이라니 저렇게 나쁜 놈이 없는데 가만히 보니까 멀쩡하게 생겼네. 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돼.’

화도 났다.

의사라는 이유 하나로 치료해야 하는 현실이 괴롭기만 했다. 이제는 많이 회복된 데다 일반 병실로 올라간다는 사실에 여유까지 보여 가증스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긴 밤이 지났다.

모두들 긴장으로 눈이 빨갰다.

재빨리 회진을 돈 김지훈이 직접 이송을 준비했다.

“모찬우 선생, 차트 준비됐지?”

“예. 다 준비했습니다.”

복사본이 꽤나 두꺼웠다.

그동안 인간 이하의 짐승을 살리기 위해 의사와 간호사의 피땀을 갈아 넣은 증거기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소견서를 작성한 송진우는 예전과 다른 의미로 얼굴이 벌게진 상태였다.

환자를 간이침대로 옮겼다.

드르르륵!

중환자실 문이 열리자 아비와 어미라는 작자들이 달려왔다. 환자의 손을 꼭 잡고는 눈시울을 붉히며 한편으로 환하게 웃었다.

“우리 아들 고생했다. 지난 일은 다 잊고 빨리 나아서 집에 가자.”

“아버지! 어머니!”

많이 보던 모습이었다.

뿌듯함과 기쁨이 교차해야 했건만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김지훈의 눈은 이미 대기하고 있는 형사와 사복 경찰에게 쏠렸다.

미리 약속한 대로 움직였다.

엘리베이터가 일 층으로 가자 보호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검사할 것이 있다는 핑계로 넘겼다. 아직도 환자와 보호자는 손을 잡고 있었다.

욕이 나오도록 눈물겨운 모습이었다.

응급실 앞에 도착했다.

형사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타 병원 의료진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재빨리 침대를 둘러쌌다. 범죄자 이송에 경험이 많은 모양이었다.

형사가 영장 집행을 시작했다.

두 건의 특수 강간이란 소리에 환자는 물론 보호자까지 사색이 됐다. 이내 아비라는 작자가 어떻게 환자를 옮길 수 있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짐승보다 못한 놈은 억울하다며 발악을 했다.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미 늦었다.

형사들은 단호했고, 이송을 맡은 사람들은 재빨랐다. 복사한 차트와 소견서를 받는 동시에 죽일 놈을 앰뷸런스에 태웠다. 침대에 묶여 버둥거리는 모습이 걱정되기는커녕 후련하기만 했다.

“수고하세요.”

다시는 얼굴조차 보기 싫은 인간들이 사라졌다.

아직은 전신 상태가 불량한 탓에 당분간 조사를 피한다고 해도 결국 갇혀 있는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첫 재판은 말도 안 되는 사유로 용케 피해 나갔지만 준엄한 심판을 피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김지훈이 속 시원한 숨을 토해 냈다.

‘죗값 다 치르고, 다시는 죄 짓지 마라.’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이 생각났다.

평범한 사람 입장에서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일 수도 있었다. 꼬리가 길어지기 전에 잡는 것이 마땅했다. 모든 행동이 법으로 규제되는 이상 누구도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겠지만 적어도 노력은 해야 했다.

한편으로 많은 생각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치료 원칙을 비롯해 가치관의 문제까지 평생을 고민해야 하겠지만, 두 건의 재수술이 가져온 결과는 구체적이자 현실이었다.

무엇보다 의료 과실 혹은 사고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다. 의사와 환자 간의 불신은 결국 의학 지식과 정보의 편향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불가피한 합병증이라고 말하지만 많은 환자들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의학의 특수성을 모르는 이상 당연한 일이다. 누구 탓을 하기 전에 우리부터 투명해져야 한다. 그래야 환자들도 의사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지.’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의료진이 아니면 치료할 수 없지만 의료진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고가 날 때마다 한낱 가십거리처럼 취급된다면 해결은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관계가 불신으로 점철된다면 그보다 심각한 일은 없었다.

아픈 사람은 계속 나올 테고, 사고 역시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과실에 대해 어떤 결정이 나도 환자나 의사 모두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하기에 서로에 대한 피해 의식을 버리고, 관련된 모든 이들이 머리를 맞대야 할 일이었다.

‘이번은 잘 넘어갔지만 다음번에도 괜찮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예방은 원칙을 지키는 것뿐이다.’

심각하고 답답한 일의 연속이었고, 단 하루도 방심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이렇게 살면 스트레스로 없던 병도 생기는 법이었다.

훌훌 털어야 할 때가 됐다.

사인방이 모처럼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진충기 교수까지 참석했건만 민정호는 숨도 쉬지 않고 단칼에 거절했다. 서운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김지훈은 충분히 이해했다. 생각해 보면 사적 자리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퇴근 후에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손일석은 역시 분위기 메이커였다.

“오늘은 병원 얘기는 입에 담지도 맙시다. 딱 하나, 칼에 찔린 놈 일은 빼고요. 김 과장, 상습범이라며? 왜 그런 놈은 끊이지 않고 나타날까?”

“법이 약해서 그래. 과태료는 단 한 푼도 안 깎아 주면서 성폭행을 한 놈이 반성문 썼다고 형량을 깎아 주는 게 말이 돼?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놈들은 초범일 때부터 확 잡아야 해.”

“답답한 일이 한두 개야? 오죽하면 거하게 사기를 치는 게 낫다는 말까지 나오겠어? 일억 먹은 놈이나 수백억 먹은 놈이나 그게 그건데 누가 겁을 내겠어? 그러니까 진상건 같은 놈들이 활보하지.”

술안주 확실하게 마련됐다.

간만에 술기운이 올라 자리가 떠들썩했다.

나쁜 일은 접고, 좋은 일과 기쁜 일만 입에 오르내렸다. 덕분에 스트레스가 풀렸고, 한두 잔 더 들어간 술이 유부남의 가슴에 쓸데없고도 무모한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전화했으면 됐지, 맨날 가는 집인데 하루 안 들어간다고 난리 나면 그게 말이 돼? 내가 가장이야. 가장!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오늘은 끝까지 달립시다. 고고! 진충기 선생님, 어디로 갈까요?”

‘헉! 현수 너마저!’

젊은 날의 써전이 아니었다.

소중한 안주만 축내며 간신히 이 차를 마쳤다. 소주 한 병에 술기운이 오를 대로 오른 신현수, 이경석, 진충기 교수가 끝까지 큰소리 뻥뻥 치며 연구실 소파를 찾았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김지훈이 밤 고양이로 변했다.

살금살금 연구실 소파 대신 거실 소파를 택했지만, 잠든 줄 알았던 마님의 예민한 감각을 피하지 못했다. 물론 술 취한 놈 발소리가 작을 리도 없었다.

“지훈 씨, 지금 몇 시예요?”

‘안 주무셨네.’

시간 물어보는 것 자체로 술이 깼다.

“조금 늦었네요. 신경 쓰지 말고 자요.”

“요새 힘든 일이 많다는 건 알지만 그럴수록 몸을 챙겨야죠. 다음에는 일찍 들어오세요.”

나직한 목소리가 무척 위압적이었다.

손일석이라고 다를까?

깨갱! 어디선가 난데없는 비명이 들렸다.

이런 일 안 생기면 둘 중의 하나다.

알아서 적게 먹고 일찍 귀가하는 남편이거나, 아니면 먹든 말든 포기했거나 애정이 식은 아내다. 만일 후자라면 잔소리 들을 때가 훨씬 행복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카르페 디엠!

간만에 달린 술자리 여파가 꽤 컸다.

주말 집담회 내내 여럿 얼굴 벌겠고, 향기롭지 못한 냄새까지 풍겼다. 송재덕 교수와 이준영 교수가 질문을 하다 말고 한숨까지 내쉬었다.

“작작 마시자. 작작. 김 과장, 술 먹을 일이 많긴 했지만 심하다. 심해.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수술 없는 날이라고 긴장 푼 거야? 그런 거니?”

“아닙니다. 얼마 안 마셨습니다.”

“나이를 생각해. 나이를. 근데 회진은 어떻게 돌았니? 환자들 얼굴은 똑바로 봤어. 냄새난다고 퇴원하고 싶다는 말은 안 들었니? 음주 진료 하지 말자. 음주 운전만큼 무서운 거야. 음주 운전만큼.”

“마스크 쓰고 돌았습니다.”

이준영 교수까지 거들었다.

“김 과장, 똑바로 하자.”

“죄송합니다.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나마 멀쩡한 김지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고양이 앞에 쥐가 따로 없었고, 사인방과 진충기 교수는 크게 후회하며 냉수를 찾았다. 평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교수들이 허둥대자 누군가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범인을 찾을 경황 자체가 없었다.

송재덕 교수도 결국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의사도 사람이고, 아침까지 남은 술기운을 어쩔 도리는 없다. 많은 직장인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지만 의사는 보다 주의해야 하는 일이긴 했다.

고비 하나를 또 넘겼다.

전문 병원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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