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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58화 (1,158/1,329)

4화

거즈가 불그스름했다.

제법 색이 진했지만 물, 체액, 피가 한데 섞였다. 간 절제가 아니더라도 메이저 수술을 한 후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양상이었다.

희망적이었다.

뚝!

드레인을 따라 한 방울이 떨어졌다.

허용 수준 이상의 출혈이 지속되고 있다면 바로 핏방울이 맺힐 것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미 결과를 짐작하고도 남았지만 재수술을 한 환자였다.

그것도 간 절제를 했다.

째깍! 째깍! 뚝!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수술은 잘된 것 같다. 지켜보자.”

송진우와 모찬우도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환자는 약해질 대로 약해져 언제 어떤 문제가 터질지 모르기에 방심할 때가 아니었다.

중환자실을 나가던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거의 잠을 못 잤다.

피곤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환자는 기다려 주지 않을뿐더러 대신할 의사도 없었다. 이런 날 실수하기 마련이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시간 날 때마다 휴식을 취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루 전 간 이식을 한 환자와 재수술을 한 환자의 보호자를 만났다. 경과가 좋다는 소리에 모두들 반색했고, 별다른 말도 없었다.

‘상태가 좋다니까 태도도 변하는구나. 후우! 역시 환자를 열심히 치료해야 편해지네.’

평소와 다름없는 일과가 이어졌다.

이젠 밥보다 잠이 급해져 점심 식사를 건너뛰긴 했다. 퇴근 때까지 재수술 환자의 경과는 좋았고, 다음 날 아침 출근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루가 더 지났다.

불그스름한 기운이 강했던 삼출액이 확연하게 노란빛을 띠기 시작했다. 간 절제 여파로 기능 수치만 비정상적일 뿐 환자 상태도 분명한 회복세를 보였다.

슬슬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환자는 진심이었다.

살 수 있다는 안도감은 여느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인간의 양면성이자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된 애정일지도 몰랐다.

문득 환자와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끔찍한 과거를 비롯해 사적인 문제를 말할 수 없었겠지만 조금은 혼란스러워졌다.

‘죗값을 다 치렀다고 생각할까? 평범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을까?’

환자 본인만 알 일이었다.

의사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기에 최대한 머릿속에서 지우고, 회진을 돈 후 수술 방으로 향했다. 아픈 사람은 많았고, 주변에 종합 병원이 없는 탓에 오늘도 수술 방이 무척 바빴다.

‘경석이 형하고 현수도 엄청 바쁘네. 대장, 위장관, 혈관 부분 모두 독립 파트로 만들어도 돌아갈 것 같은데 아쉽다. 우리 과가 이 정도면 다른 과는 말할 것도 없겠지?’

현실적 대안으로 전문 병원을 만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종합 병원이 대안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더구나 날로 도시가 커지고 있었다. 그만큼 의료 수요도 급격하게 늘기 마련이었다.

당장은 희망일 뿐이었다.

언젠가 이뤄질 꿈이기도 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환자와의 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건만, 간 이식에 모든 힘을 쏟고 있는 진충기 교수를 보며 김지훈도 서둘러 수술실로 들어갔다. 나태해지거나 안주하려는 마음을 다잡아 주는 강력한 자극이었다.

모든 수술이 끝났다.

중환자실에 들렀다 잠깐 외래에 들른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마치 데자뷔처럼 아주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왜 안 와? 어디 있는 거야?”

재수술 환자의 보호자와 낯선 사람들이 간호사에게 삿대질까지 해 대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보나 마나 빤한 일이었다.

아예 브로커들이 상주하는 모양이었다.

화장실 갈 때와 올 때가 다르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진충기 교수 때는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하게 답답해지며, 머릿속까지 엉켜 버렸다.

‘침착하게 대처하자.’

애써 가슴을 진정시키며 한 발 내디디려는 순간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민정호였다.

“김 과장님, 지금은 직접 만나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번 건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민 부원장님, 날 만나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일이 더 커질 수도 있어요.”

“진 교수님 일을 잘 처리하신 것은 압니다만, 본인 일이 되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환자와 관련된 일로 고민을 많이 하시지 않습니까?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제가 요청드릴 때 저 사람들과 접촉해 주십시오.”

김지훈이 머뭇거렸다.

민정호 말대로 당사자가 나서지 말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반면 자칫 피한다는 인상을 주면 상황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과장님 입장만 고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나서야 할 이유가 또 있습니다.”

“다른 이유가 더 있다고요?”

“병원비 문제 때문에 몇 번 만났는데, 말하는 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확실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떼먹고 도망갈 사람들이더군요. 이때다 하고 달려드는 것 같은데 그런 일은 방지해야죠. 누군가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으면 본인들은 피눈물을 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정호는 조금도 흥분하지 않았다.

김지훈 역시 진충기 교수 일을 해결할 때 같은 모습을 보였다. 감정적으로 불안한 지금은 한 발 뒤로 물러나 필요한 준비에 집중하는 편이 나았다.

“알겠습니다.”

김지훈이 보호자의 눈을 피해 회진을 돌았다. 마지막으로 중환자실에 들르며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하는지 고민했지만 정작 보호자를 만나지 못했다.

송진우와 모찬우가 씩씩거렸다.

“과장님, 별일 없으셨습니까? 기껏 살려 놨더니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알았어?”

“민 부원장님이 차트 복사를 부탁하기에 물어봤더니 대충 알려 주셨습니다.”

“신경 쓰지 말고 환자만 잘 봐. 여기서 문제가 더 생기면 진짜 법정까지 갈지도 몰라.”

사인방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손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졌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꼴이네. 하는 짓을 보니까 칼에 찔릴 만해. 그렇다고 죽게 놔둘 수도 없고, 인간들 참 무섭다. 신 교수, 연이어 말도 안 되는 일이 터지는데 대책을 세워야 하는 거 아니야? 최소한 브로커라도 막아야 하지 않겠어?”

“출입 금지를 써 붙인다고 안 들어올까? 원칙대로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야. 과실이 없는 한 합의는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려야 돼.”

“그 정도로 되겠어?”

“소송 공짜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브로커 말만 믿고 억지를 부리면 더 큰 손해를 입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병원비도 철저히 받아 낼 생각이야.”

“재수술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잖아? 배후에 체면이고 뭐고 가리지 않는 놈이 있다면?”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대가를 치러야지.”

“어떻게?”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게 하면 돼. 우리가 우왕좌왕하길 바랄 거야. 앞가림도 못하는 병원이 다른 데 신경을 쓸 여력이 있겠어? 하지만 잘못 봤어.”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측이 맞든 틀리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야. 개별적으로 대처하다간 모두 무너지게 돼 있어.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다 함께 힘을 합쳐야 돼.”

“경석이 형이 좋은 소리 하셨네. 이게 영어로 All for one이야, One for all이야?”

“둘 다 아니겠어? 김 과장, 미안한 일이지만 치료 기록 검토는 우리가 해야겠다. 아무래도 당사자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어.”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시간이 꽤 늦었다.

간 이식 수술을 마친 진충기 교수였다.

“다들 여기 계셨군요. 민 부원장에게 소식 들었습니다. 김 과장님, 차트 검토를 내게 맡겼으면 합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시선이 마주쳤다.

김지훈이야말로 누구보다 기록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진충기 교수였다. 또한 이준영 교수나 송재덕 교수를 제외하면 이런저런 일을 가장 많이 경험한 의사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이제 사인방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보였다.

긴말은 필요 없었다.

응당 모든 일을 함께해야 했다.

김지훈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만에 하나 미흡한 면이 있으면 의사가 지켜야 할 원칙대로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알겠습니다. 여러 선생님이 계시지만 민 부원장과 함께 보호자를 만나도 되겠습니까? 과실이나 실수가 없다면 김 과장님이 하신 것처럼 당당하게 대처하겠습니다.”

김지훈이 웃었다.

“기록을 검토하신 분이 맡아 주셔야 할 일이 아닐까요? 죄송하지만 이번에는 제가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습니다.”

진충기 교수도 웃었다.

생각해 보면 기록을 검토해야 하는 의사 역시 무척 답답하고, 입장 곤란한 일이었다. 하지만 올바른 원칙을 견지하는 이상 부담스러운 일만은 아니었다.

환자가 약자인 것은 분명했다.

완벽한 의사가 있을 리 만무했다.

따라서 책임져야 하는 일을 회피하거나 꼼수로 모면하려 하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었다. 정직함이야말로 현실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전문 병원이 가야 할 길이었다.

그 시간, 민정호도 퇴근을 하지 못했다.

목소리를 높이며 병원과 의사의 책임을 강조하는 보호자를 조용히 지켜만 보았다.

“첫 수술 때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서 결국 간까지 잘랐는데 책임이 없어? 내 아들 인생을 책임져야 할 거 아니야? 당신 가족이라고 생각해 봐. 어이구! 칼을 휘두른 놈에 실력도 없는 의사까지 원통하다. 원통해.”

“같은 말을 한 시간이 넘도록 반복하시는데 말씀 다 하셨습니까?”

“답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지금부터 답을 드리겠습니다. 일단 치료 기록 검토 후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조치를 취하겠지만, 없다면 의료 과실 문제는 법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그 전에 치료비 중간 정산부터 하셔야 합니다.”

“뭐? 돈을 내라고?”

“치료를 받았으니 당연한 일 아닙니까? 만일 제때 납부가 안 되면 바로 소송을 걸어 끝까지 받아 내겠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하시면 칼을 휘두른 사람에게 피해보상을 청구하시면 됩니다. 형사적 처벌을 받아야 하는 분에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가해자를 분이라고 했다.

보호자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민정호가 보호자 옆에 앉은 사람들을 보았다.

“기우였으면 좋겠습니다만, 브로커의 개입을 조심하십시오. 합의가 되든 안 되든 그들이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 억지를 부리면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 가족에게 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억지라니?”

“환자가 산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것은 의료에 문외한이라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치료비가 꽤 많이 나왔지만 한 푼도 깎아 줄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에 소송 비용까지 내다간 패가망신할 수도 있습니다. 필요한 자료는 모두 제공할 테니 선택 잘하시길 바랍니다.”

강 대 강이었다.

김지훈과 수술 팀을 믿지 못하면 절대 보일 수 없는 태도였다. 잘잘못과 상관없이 조용히 끝내려는 병원의 행태를 기대하던 보호자에겐 중간 정산에 역소송까지 혹이 두 개 더 붙었다.

침묵이 흘렀다.

민정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미한 일에도 불구하고 담당 주치의 선생님들은 최선을 다해 환자를 치료할 것입니다. 보호자분은 내일 당장 중간 정산을 하시고, 소송 여부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브로커가 끼어 있다면 제 말을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브로커가 어디 있다고 그래?”

엉뚱한 사람이었다.

민정호가 묘한 눈빛을 보냈다.

“저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단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용한 자들이 얻을 이득은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장기 알선 같은 불법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우리 병원은 결코 간과하지 않을 겁니다. 간 이식 파트를 책임지고 있는 분의 확고한 원칙입니다. 그럼 이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민정호가 눈가를 굳혔다.

‘다른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도 죄의식 하나 느끼지 못한다면 어떤 배려도 받을 자격이 없지. 여기서 한 발 더 달려들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될 거야.’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우울한 하루였다.

예외적인 일이 연이어 벌어졌고, 두 경우 모두 불행한 일임이 분명했다. 환자와 의사 사이의 절대적인 신뢰가 없다면 승자는 없기 때문이었다.

단, 두 번째 환자는 용서받기 힘들었다. 설혹 본인은 참회하고 있을지 몰라도 아비라는 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실 아비에게 동조하지 않았다면 칼에 찔리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한 소녀의 죽음을 알고서도 웃고 떠들며 살기에는 너무 일렀다.

다음 날, 외래가 조용했다.

김지훈을 만난 이준영 교수와 김진호 교수는 강한 신뢰를 보이며, 민정호와 진충기 교수에게 모든 일을 맡기라고 조언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김지훈 역시 환자 차트를 앞에 두고 동일한 과정을 거쳤다. 진충기 교수의 날카로운 질문에 땀을 흘렸고, 새로운 시각을 얻는 계기이기도 했다.

‘역시 고수야.’

반면 보호자는 완전히 기가 죽어 있었다. 친척인지조차 의문스러운 사람들 역시 보이지 않았다.

병원은 점차 평온을 되찾았고, 그렇게 일단락 짓는 줄 알았다. 그런데 반드시 환자를 살려 건강하게 퇴원시켜야 할 이유가 생겼다.

김지훈이 고개를 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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